맛만큼 향기 따지는 술… 와인잔이 '딱'이죠

입력 : 2011-01-13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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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케(さけ) 일본술을 총칭하는 말. 니혼슈(にほんしゅ)라고도 한다.

물과 같은 무애융통의 도를 추구하는 '조젠미즈노고토시'(上善如水)와 '여자를 울리다'라는 뜻을 가진 '온나나카세(おんな泣かせ)'.

밤이 은근합니다. 이럴 땐 뒷골목 작은 선술집에서 마시는 사케가 제격입니다.

사케는 쌀을 원료로 하는 맑은 술입니다. 일본이 자랑하는 발효주로, 15~16도 정도의 알코올이 역시 은근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에겐 정종이라 불리지요.

여하튼 롯데호텔부산의 일식집 모모야마에서 지배인으로 일하는 신이현(43)이라는 분에게 청했습니다. 좋은 사케 소개해 달라고. 그는 사케의 전문가입니다. '기키사케시'(利き酒師)라고, 일본에서 국제 일본주감정사 공인자격증을 땄지요.

"아마 부산에서 제일 많은 종류의 사케를 갖고 있을 것"이라며 부산 서면에 있는 '시모노세키'(051-808-8088)라는 술집 겸 음식점으로 이끌더군요. 김병철(34) 씨가 사장인데, 그도 기키사케시 자격증을 갖고 있습니다. 신 지배인과 함께 공부했다네요. "드시면 맘이 편안해 질 겁니다"라며 소바차, 즉 메밀차를 내밉니다.

대뜸 물었지요. "이 집에 사케가 얼마나 있습니까?" "여기서 시판하고 있는 게 88종, 제가 소장하고 있는 게 조금 되니까, 모두 100여 종쯤 될 겁니다." 소장? 남에겐 안 팔고 자기만 마신다? 김 사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합니다. "진짜 단골께는 한 잔씩 드리기도 합니다."

호기를 한 번 부려 봤습니다. 제일 비싼 거 한번 보자고요. 김 사장은 내온 걸 보니, '菊姬(국희)'라. 일본말로는 '기쿠히메'겠네요. 1병에 200만 원쯤 한답니다. 침이 꿀꺽! 따서 마셔보자는 말이 입끝에서 맴도는데, 눈치를 챈 신 지배인이 한마디 합니다. "이거, 우리도 쉽게 따지 못하는 겁니다. 저도 사케 배울 때 딱 한 번 맛 봤을 뿐이에요." 눈으로만 구경하란 얘기겠지요. 알고 보니 정식 명칭은 '기쿠히메 구로깅'이라고, 일본 황실에서 국빈을 맞을 때 내놓는 술이랍니다. 언감생심! 맛볼 생각을 접었지요. 김 사장의 설명이 차근합니다.

"청주 만들 때 (재료를)베 주머니에 넣어서 짜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쿠히메'는 인위적으로 힘을 가해 짜지 않고 그대로 중력을 받아서 한 방울씩 똑똑똑 떨어지는 그걸 담은 겁니다. 그러니까 술이 스트레스를 안 받았겠죠. 보통 사케는 압착을 시키거든요. 근데 요거 같은 경우는 그런 인위가 없기 때문에 제일 원초적인 사케라고 볼 수 있겠지요. 발효가 돼서 올라간 그대로의 술이란 겁니다."

쌀 도정 정도 따라 가격 천차만별
통상 50% 이상 깎으면 최상급
日 황실용 '국희' 200만 원까지…

흔히 데워 먹는다는 '정종'
'아쓰캉'이라고 따로 있어
알코올 날아가지 않게 하려면
중탕기로 40도 넘지 않게 데워야


살짝 미안했던지 김 사장은 다른 사케를 내 옵니다. '닷사이 니와리산부'. 신 지배인이 감탄합니다.

"이 술은 준마이다이긴조인데, 정미율이 제일 높은 술입니다. 23%로 돼 있죠. 쌀의 77%를 날리고 만들었습니다. 엄청나게 깎은 거죠. 쌀의 눈이라고, 심백에 제일 근접하게 깎은 겁니다."

참,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사케는 청주 원액에 알코올과 여러 성분을 첨가한 보통주가 많지만, 특정 명칭주라는 게 있습니다. 고급주지요. 최상급인 대음양주(大吟釀酒·다이긴조슈)와 순미대음양주(純米大吟釀酒·준마이다이긴조슈), 중간급인 음양주(吟釀酒·긴조슈)와 순미음양주((純米吟釀酒·준마이긴조슈), 비교적 아랫급인 순미주(純米酒·준마이슈)와 본양조주(本釀造酒·혼조조슈)가 있습니다. 관건은 도정입니다. 도정이란 현미의 바깥쪽을 깎아 백미를 만드는 과정을 말하는데, 쌀에서 술의 원료가 되는 전분은 쌀 중심부에 있으며 바깥쪽의 단백질, 회분, 지질 등은 맛을 떨어뜨린답니다. 쌀을 많이 깎아낼수록 맛 좋은 술이란 얘기죠. 대개 50% 이상 깎으면 최상급이랍니다.

닷사이. 獺祭(달제). 수달의 제사? 김 사장이 유래를 설명해 줍니다. "수달은 물고기를 잡으면 강가에 좍 펼쳐놓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제사상 같고, 나아가 학자들이 연구하기 위해 여러 문헌들을 펼쳐둔 모습으로 여겨진답니다. 훌륭한 술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장인의 뜻이 담겨 있는 거죠."

'닷사이'도 꽤 비쌉니다. 니와리산부급이 25만 원 정도랍니다.



꼴꼴~ 와인잔에 한 잔 따랐습니다. 와인잔? 신 지배인은 맛만큼이나 향을 따지는 사케는 와인잔이 '딱'이라네요. 한 모금 입에 넣어 봤습니다. 약간 쌀맛이 납니다. 쌀맛은 감칠맛이라는데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신 지배인은 과일향이 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쌀 자체에서 과일향이 나요. 쌀을 깎아서 과일향이 나는 게 신기하지만, 사실은 긴조나 다이긴조급을 마셔보면 쌀맛보다는 과일향이 많이 납니다. 느껴 보세요. 저는 지금 과일향이 많이 나거든요. 잘 안나요? 하하. 그래요. 사람마다 다릅니다. 자기한테 맞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맞는 건 아니거든요. 비싸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고요."

김 사장이 거듭니다. "저는 꽃맛이 나는데요. 그것도 진한 빨간 장미꽃의 향." 그는 또 말합니다. "사케는 따른 후 시간이 변함에 따라 변하는 맛을 느끼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첫맛에서 온도가 올라가고 산소랑 결합하면서 점차 맛이 변합니다. 색깔도 변하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고요? 그건 개인에 따라 차가 있어요. 냉장 보관돼 나오면 4도 정도인데 그걸 좋아하는 분도 있고, 상온의 맛을 좋아하는 분도 있지요."

그런데 정종처럼 흔히 아는 데워 먹는 사케는 따로 있답니다. 그런 술을 보통 아쓰캉이라 부르는데, 신 지배인은 말합니다. 데우더라도 결코 뜨겁게는 하지 말라고.

"사케 중에는 음용온도대가 넓은 술이 있고, 좁은 술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음용온도대가 넓으면 차게 해서 먹어도 되고 뜨겁게 해서 먹어도 되는 술이란 얘기죠. 고급 사케는 대부분 좁은 것인데, 뜨겁게 해서 드시면 안되고 차게 드셔야 맛있게 드실 수있다, 그런 의미죠. 우리나라 시중에선 됫병으로 나오는 월계관이 일반적이죠. 그걸 데워주는데, 보통 주전자에 데우거나 주온기를 사용하거든요. 저희들은 주전자에 끓이는 것보다 도쿠리를 사용해 데워서 나가는 중탕기를 많이 사용해요. 주전자에 바로 넣고 끓여버리면 알코올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술의 참맛을 못느껴요. 너무 뜨겁다 보면 잔을 들었을 때 훅 얼굴에 끼치는 뜨거운 기운이 있지요? 그 자체가 술맛이 다 날아가는 현상입니다. 데우더라도 40도 정도, 따뜻하다 싶은 정도. 그래야 술의 참맛을 느낄 수 있어요."



술엔 안주가 맞아야 합니다. 김 사장은 "그날 준비된 안주에 맞는 술이 그날 제일 좋은 술"이랍니다. 신 지배인도 "가게에서 드시고 싶은 사케가 있으면 안주는 가게에서 추천받아 드시는 게 최고 좋은 방법"이라 권합니다. 이날 김 사장이 내온 안주는 메로숯불구이입니다. 사케랑 먹기엔 좀 기름지지 않나 생각 들었지만 먹어 보니 차지며 의외로 맑은 술에 잘 어울렸습니다.

신 지배인은 사케의 진정한 매력은 '자유분방함'이랍니다. "왜 좋으냐? 보통의 사케는 좋아하는 거 하나 시켜 놓고도 반은 데워 줘, 반은 차게해 줘, 이게 되거든요. 복잡·엄격하지 않다는 거죠. 차게 먹다가 따뜻하게 갈 수도 있고, 그 나름의 변하는 맛을 알 수 있지요. 자유분방. 자유로운 술. 안주도 한 가지로 죽 드시지 않잖아요. 차게 해서는 회, 따뜻하게 해서는 매운탕. 그런 게 좋아요."

김 사장이 '조젠미즈노고토시'(上善如水)라는 이름의 사케를 새로 내옵니다. 그 이름이 좋습니다. 상선여수라! 노자는 말했습니다. 선(善)에는 상선, 중선, 하선이 있는데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겁니다. 물은 어느 한 곳 막힘 없이 흐르고 모든 것을 아우르지요. 지극한 삶은 그런 물과 같아야 하는 법입니다. '조젠미즈노고토시' 한 잔에 그 물의 덕을 배워야겠습니다. 김 사장이 이런 말을 하네요.

"눈 쌓인 노천 온천. 순백의 눈 속에 이 '상선여수' 한 병을 꽂아 놓고 탕에 들어가 한 잔씩 마시는 상상을 해 보세요. 정말 그렇게 먹는다면 참 대단하겠지요. 눈과 사케는 잘 어울리는 조합이랍니다."

거 참, 대단한 상상입니다. 눈 쌓인 온천에서의 한 잔! 상선여수를 꿈꿨던 노자의 도가 별 거겠습니까. 그 한 잔이 곧 도이겠습니다.

글·사진=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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