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힘이다]<10>네팔-룸비니의 '국제사원'

입력 : 2000-02-29 00:00:00 수정 : 2009-02-19 21:24:04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국가이미지 상징 '세계 사찰 전시장'

카트만두발 룸비니행 비행기는 제 시간에 뜨지 않았다.공항직원들은 룸비니에 안개가 짙게 깔렸다고 전해주었다.

한국의 시골 시외버스 정류장을 연상한다면 엇비슷하게 맞아떨어질 듯한 네팔의 국내선 공항대합실에서 하릴없이 대여섯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그 와중에 한 두어시간 왁자지껄한 공항 바깥 한 구석에서 모포를 깔고 잠을 잤다.한국의 초가을 미풍같은 고산지대의 바람이 살갑게 얼굴을 쓸어주었다.한참을 잘 잤다.

생각하건대,불교나 힌두교의 처지에서 살핀다면,억겁의 윤회를 거쳐야 하는 하나의 생에서 대여섯 시간쯤이 무어 대수랴.







마침내 초라한 30인용 비행기를 타고 눈덮인 히말라야 산맥의 배웅을 받으며 한 시간쯤을 건듯건듯 난 뒤 룸비니공항에 착지하자 어둠과 미약한 안개에 둘러싸인 평원이 눈앞에 펼쳐졌다.목적지인 룸비니 동산은 공항에서 차로 20분 남짓 떨어져 있다.

룸비니 동산은 2천6백여년 전 가비라성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곳이다.그는 뒷날 왕궁을 박차고 나와 깊은 수행의 과정을 거쳐 "붓다"(크게 깨친 자)가 되었고,당대와 후대의 사람들에게 지극한 감화를 주었다.

네팔 정부는 자체 자금과 국제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와 여러 나라에서 보내 오는 지원금을 보태서 농지와 늪지대로 방치돼 있던 룸비니 지역 동서 1.6km와 남북 5km의 땅을 수용한 뒤,특별 성역 구역(성지)을 조성했다.그 과정에서 붓다의 탄생지인 "신성한 정원"(Sacred Garden) 조금 못미친 곳에는 "국제사원"이란 특별 구역이 확보됐다.

남북을 가르는 자그마한 운하를 경계로 "국제사원"의 동쪽에는 소승불교 국가들의 사원이,서쪽에는 대승불교 국가들의 사원이 자리를 잡았다.소승.대승 여부는 정오 이후에 음식을 먹느냐 먹지않느냐에 따라 구분했다고 한다.한.중.일 등은 대승에,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은 소승에 속해 있다.

국제사원 일원은 완공된 절,공사중인 절,부지 정리 중인 절 들로 소리없이 분주하다.중국의 중화사,미얀마 사원,네팔 비구니 사원 등은 완공됐고,한국의 대성석가사(주지 법신,1996년 12월 착공~1998년 12월 완공)를 비롯해 일본 프랑스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의 절은 공사중이다.대성석가사는 IMF사태로 인해 공사를 3번 연기하는 바람에 아직 요사채의 지붕을 얹질 못했다.대웅전은 50%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국제사원 일원에서 우리는 "문화",좁게는 "종교문화"의 중요성과 힘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다.요컨대 국제사원 일원은 세계 각국의 자국 불교 선전장 종교적 정체성과 동질성 확인의 장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각국의 절들은 그 나라의 국가이미지와 연관된 대표적 국내 건축물을 오롯이 빼어 닮았다.대성석가사는 고대 불국사의 배치도를 감안한 경우다.중화사는 자금성을 축소한 모양이고,일본 절은 후쿠오카 성을 닮았다.미얀마 사원은 사진으로 낯익은 원뿔모양 황금빛 구조물을 내세우고 있다.

미얀마의 사원은 국가적으로 공을 들인 태가 물씬 나고 돋보이는데,이 나라는 워낙 불교국가이니까 그렇다치고,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 정부가 중화사를 짓는 데 커다란 공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중화사는 지난 96년 12월에 착공돼 2년여만에 완공된 사원으로 연건평 5백평,대지 7천평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정면 지붕 밑 중앙에는 "중화사"란 현판이 번듯하게 걸려 있고,중국 특유의 황토색과 주황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 정부는 건립 주체인 북경 불교협회에 1천만 달러,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이 넘는 큰 돈을 지원했다고 한다.표면적으로는 불교협회가 지었지만 배후에는 중국 정부가 있다는 뜻이다.북경 불교협회는 이 돈으로 사찰 건축전문가 2백여명을 동원하고 북경에서 기와를 공수해 오는 등 지대한 공력을 쏟았다고 한다.

절 안에 들어서니 웅장한 느낌이 피부에 와닿는 가운데,적막감이 감돈다.주지 스님의 거처를 찾아가니 영어공부에 한창이던 사무처부주임 주에 덩 스님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기자를 맞는다.그의 말에 의할 것 같으면 중화사에는 북경에서 파견돼 온 7명의 스님들과 영어 통역사 1명이 상주하고 있다.주된 일상은 외국인 순례객/방문객들에게 중국 불교를 설명하는 것이다.정작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중국인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정부가 절운영현황을 챙긴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정과 관련해 대성석가사의 법신 스님과 다른 나라 절의 스님들은,중국 스님들한테서 들었다면서,상당히 의미있는 말을 전해주었다.요지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중국은 현재 국가주도로 종교를 교통정리하고 있다.중국은 아마도 손문 이전의 "불교국가"이미지를 되찾고 싶어하는 것같다."

그리고,추측하건대,중국이 불교 관련 홍보에 적극적인 것은 티베트의 독립운동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주지하다시피 티베트란 나라와 티베트의 정치.종교지도자 달라이 라마(지혜의 바다라는 뜻)는 사람들에게 "불교이미지"로 확실하게 각인돼 있으므로,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티베트 탄압은 일견 불교탄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따라서 중국으로서는 불교이미지를 강화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희석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터이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사회학자 기 소르망이 "한국의 IMF사태는 국가이미지 부재에서 초래됐다"라고 한 말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면,중화사를 비롯한 각국 사원의 은근한 역할은 "종교문화 이미지"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셈이다.

그런 현장에서 대성석가사가 유일하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좋은 평판을 얻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기실 매년 룸비니를 찾는 수십만명의 여행객들과 순례객들은 국제사원에서 한 나라가 가진 종교문화의 일단을 읽고 가고 있다.그들은 돌아가서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들을 이야기할 것이다.

네팔 룸비니=이광우기자

leekw@pusanilbo.com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