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는 사이의 음식이다. 새참으로 먹는, 끼니와 끼니 사이 가벼운 음식이다. 나른한 봄철 추락하는 입맛에 살포시 들러붙는 입맛이다. 국수의 결은 무엇보다 순하고 곱다. 라면이 파마한 머릿결이라면 국수는 봄처녀의 기다란 생 머릿결 같이 순한 결이다. 국수의 하얀 결에서 복사꽃 핀 시골의 봄길, 보름달이 비치는 동네의 훤한 골목길이 아른거린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시인 백석은 국수를 노래했다. 국수 하면 구포국수다. 낙동강 하구의 강바람과 바다 바람이 섞여 구포국수는 쫄깃하면서도 짠맛이 스며들었다. 지금 국수는 '할매'들이 주로 말아주고 비벼주는 '할매의 장르'에 머물고 있다. 명맥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힘없이 부드러운 국수 면발을 후르륵 삼키며 생각했다. 백의(白依)의 온순한 옛 맛을 뒤로하고 우리는 강퍅한 맛으로 자꾸 달려가고는 있지 않은가? 시절이 하 수상하다.
① 육수 맛, 국수의 기본은 물국수
유명 국숫집을 수소문하니 단연 경남 김해시 대동면의 '대동 할매국수'가 꼽혔다. 구포대교를 완전히 내려서기 바로 직전 오른쪽 대동 가는 길로 내려서야 했다. 구포대교를 건너버려 U턴을 해서 대동 쪽으로 접어들었다. 한 2㎞쯤, 대동 수문을 지나 조금 더 가니 '할매국수' 집이 있는 대동면 초정리 안막마을이다.
오후 5시, 아주머니 세 명만 방에서 상을 닦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와 '대동 할매'(사진)는 몸이 으슬으슬해 누우셨단다. 할머니는 언론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데 '오늘, 글렀나' 싶다. 뜻밖에 주방 안쪽에 할머니 소리가 들린다. "무에, 취재할 끼 있다고요?"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대동 할매'는 82세라고 했다. 열여덟에 부산 대신동에 시집 가서 살다가 스물여덟에 신랑이 병으로 이 세상을 뜬 뒤 갈 데 없이 두 살짜리 딸을 업고 친정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들일에 품을 팔아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러다가 5일장이 선다는 얘기를 듣고 아이를 업고 국수 한 그룻을 3원인가, 30원인가에 말아서 팔기 시작했지. 글쎄 처음에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돼지국밥집에만 가더라니까…." 그렇게 시작한 것이 50년 전통의 '대동 할매국수'였다.
5일장인 '안막장'도 시들시들 20여년 전부터 서지 않자 할머니는 외려 '매일 해 보자'며 국수 장사에 본격 나섰다. 할매 국수의 특징은 땡초(매운고추)를 넣는 것이다. "내가 매운 것을 좋아하니까. 땡초를 국수 장에 다져 넣다가 상 위에 올려놔 보기도 했지. 한 번은 술 먹은 손님이 속이 메슥거린다며 땡초 넣고 다시물을 먹더니 속이 확 풀린다며 좋아하더라고." 국수에 땡초를 넣는 것은 지금 부산의 많은 국숫집에서 본떠서 하고 있다. 이 할매 국숫집으로 인해 이 일대는 국수 국밥을 파는 음식점 골목으로 변해 있다.
좁은 식당, 나무젓가락. 흰 국수 위 양념장 단무지채 동초나물 깨소금, 수수한 국수 차림이다. 주전자에 담긴 뜨거운 육수, 맛이 진하고 시원하다. 아득한 '고향의 맛', '어머니의 맛', 잃어버리고 있는 그리운 맛이었다. 할매의 삶이 곰삭아 녹아 있는 맛이었다. 화려한 맛을 좇는 시대에 맛을 내지 않는 것, 그것이 대동 할매국수의 비결이었다. 할매는 "남해 진해 마산으로 좋은 멸치를 사러 다닌다. 육수를 낼 때 실은 멸치를 많이 넣는다"고 했다. 이 집, 국수의 기본인 물국수만 말고 있다. 양에 따라 3천원, 3천500원, 4천원. 올초 500원씩 올린 것이다. 오후 6시30분까지 장사하고 일요일은 장사 안 한다. 장사할 때는 전화기를 빼놓는다.
물국수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곳이 부산 금정구 남산동 구포촌국수(051-515-1751)다. 이 집은 줄 서는 집이다. 오후 1시30분에 가서 20분쯤 줄을 서서 먹었다. 대체 무슨 맛이기에? 우리는 먹고서 "역시"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주 뜨거운 육수의 맛 속에서 멸치들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깊은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듯했다. 맛이 깊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가서 또 먹었다. 오전 10시~오후 7시30분. 올초부터 500원 올렸다. 물국수 양에 따라 3천원, 3천500원, 4천원. 금정로, 외대구장 올라가는 길 맞은편.
② 맘껏 먹는 무한리필 국수
'국수 뷔페'도 있나? 궁금했다. 부산 강서구 대저1동 '대저할매국수'(051-973-0837) 집이다. 무한정 먹을 수 있는 무한 리필 국숫집이다. 물국수 비빔국수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솥에서 밥도 양껏 떠 먹을 수 있고, 시금치 콩나물 고사리 도라지 파 미역 정구지 무침 등 기본 반찬이 40가지다. 고등어 찜에 된장찌개 묵은김치찌개 재첩국 선짓국 시락국 등 국물도 2가지 이상. 요일 따라 번갈아 팥죽과 호박죽을 내고, 10그릇을 먹어도 상관없다.
바깥 부엌 쪽을 보니 시뻘건 장작불을 때는 아궁이가 3곳. 장작불로 구수하게 육수를 끓여내고 국수를 삶고 있었다. 육수가 투명하고 시원했다. 거제와 충무의 멸치를 쓴다고 했다. 한 손님이 "너무 맛있다"며 국수를 사 간다.
국수 뷔페를 하게 된 주인 손순연(70·사진) 할머니의 사연이 애닯다. IMF의 파고가 집안에도 닥쳐 1998년 처음 하루 5~10그릇을 팔면서 장사를 시작했다. 7, 8년 전 끓는 물을 대야째로 내오다가 손 할머니는 그만 넘어져 왼쪽 팔을 온통 데고 말았다. 옷을 올려 보여주는데 팔 전체에 흉터 자국이 남았다. "고생 참 많이 했어요. 아는 동생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치료를 받으러 가곤 했지요." 팔이 아파 장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본 반찬을 마련하고서 '손님들 마음대로 떠 잡수이소' 하는 국수 뷔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반응이 좋았다.
아주머니들은 팥죽에 쓸 새알을 한참 빚고 있고, 부엌 쪽에는 다음날 낼 선지를 장만하고 있다. 장작불 타는 냄새가 구수하다. 오후보다 점심시간에 맞춰 오면 신선하게 먹을 수 있단다. 성인 1인 3천500원을 받았는데 3월부터 4천원으로 올렸다. 주차가능하고 실내 30여석, 실외 50여석. 구포다리 내려서기 전 우측 대동 쪽으로 빠져 500m 올라가 '고향산천' 간판을 보고 좌회전해서 800m가량.
부산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 옆길로 올라가면 2년 된 무한 리필 국수 뷔페인 '진미국수'(051-818-4090)가 있다. 물국수 비빔국수에 카레국수까지 있는 게 이 집의 특징. 반찬은 김치로 단출하다. 김밥 전 호박죽도 있고, 밥도 있어 국수에 넣는 오이 양배추 정구지 따위와 함께 비벼 먹을 수도 있다. 1인 4천원.
③ 바다가 헤엄친다, 회 국수
회국수는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 특유의 국수다. 부산 강원 제주에 회국수가 있고, 경북 포항은 물회가 더 유명하다.
부산 동구 수정시장 안 '창녕식당'(051-465-8298)의 회국수부터 소개한다. 시장 인심에 양도 많고 우선 싸다(한 그릇 3천500원). 싼 것을 두고 가격이 착하다, 협조적이다, 예쁘다, 라고 평하는데 회국수의 맛도 착하고 협조적이고 예쁘다.
하기야 이집 주인 박소순(63·사진) 아주머니, 여기서 27년간 장사를 했으니 그 세월의 맛이 우러나지 않을 리 없다.
3명이 가서 회국수를 시켰다. 국수를 기다리며 2천원짜리 막걸리 한 병을, 간단하게 묵은 김치만 앞에 놓고 갈라 마신다. 회국수 안에 제철인 밀치 회가 제법 많이 들어 있다. 횟감은 매일 아침에 들여오는 싱싱한 것들이고, 철따라 달라진다.
이 집의 특징은 국수에 넣는 횟감을 고추냉이(와사비)로 버무린다는 것. 비린 맛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 무 쑥갓 상추 깻잎 따위의 채소가 상큼하고 시원하게 아삭거리는 게 기분이 좋다. 비빔장은 달콤하다. 채소, 횟감, 국수의 면발, 이 3가지 사이를 젓가락이 왔다 갔다 하면 어느새 한 그릇이 뚝딱이고 배는 두둑하다.
이집 단골인 최원준 시인은 "5천원짜리 가오리회 작은 것 한 접시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 사발로 입을 적신 다음, 비빔국수(2천500원)와 남은 가오리회로 회국수를 만들어 먹는 것도 별미"라고 말했다. 이집 물국수(2천원) 맛도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부산 서면의 영광도서 앞 '회국수할매집'(051-817-9260)의 회국수(4천원)도 제법 이름이 나 있다. 가오리 회를 넣는데 맵싸한 것이 이 집 회국수의 특징이다. 영광도서 김교섭 차장은 "변함없이 맛있는 회국수"라며 "식사할 시간이 없을 때, 중간에 배가 출출할 때 먹기에 아주 적당하다"고 했다. 이 집, 김밥 쫄면 우동 수제비 칼국수 비빔밥 15가지 메뉴를 갖추었다.
부산 남포동 '할매집회국수'(051-246-4741)의 회국수(4천500원)도 이름 나 있다. 이 집 회국수는 매워서 화끈하다. 가격이 비협조적이라는 네티즌들의 불만이 없지 않지만 육수가 시원하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 부산역 맞은편 큰길 가에는 금호할매회국수&전통보리밥 전문' 집이 있다. 뒤탈 없는 가오리 회를 넣는 매운 회국수 한 그릇이 4천원(곱배기 5천원)이다. 사진=김경현 기자 view@
④ 별의별 국수 다 있다!
'거창까막국수'(051-751-4334, 부산 수영구 망미2동) 집은 까만 영양국수를 직접 뽑아 국수를 파는 곳이다. 국수를 직접 뽑는 집은 부산에 이곳밖에 없을 것이다. 까막국수는 까만 쌀·콩·깨 등을 섞어 만든 특화 국수. 냉면처럼 먹는 까막국수는 4천500원, 한우쇠고기 고명을 얹은 '온(溫) 다시소바'는 5천원이다. 흰 국수도 있다. 취재하러 간 날, 흰 국수가 국수 건조실에 치렁치렁 널려 있었다(사진). 주인 박연채(55)씨는 "우리 집 국수는 직접 뽑은, 햇살 담은 태양국수다. 쫄깃한 면발이 죽여준다"고 자랑했다. 돼지오리수육, 비빔밥 등의 메뉴도 있다.
서면 동보서적 뒤쪽 골목에는 '국수전문 1500'(051-806-2259) 집이 있다. 국수 한 그릇에 1천500원으로 아주 싸다. 그것도 밀가루 값 폭등으로 얼마 전 1300원에서 올린 것. 물국수 비빔국수 비빔밥이 각 1천500원이고, 소고기국밥 소고기국수는 각 2천원이다. 오전 11시30분께인데 30여 석의 자리가 연령 구분 없는 손님들로 빼곡했다. 물국수 육수가 시원하고 깊으며, 무엇보다 양이 많다. 비빔국수는 참기름 맛이 짙다. 쥬디스백화점 신관 패밀리마트 맞은편 골목.
북구 덕천지하철역 인근의 '장골양반국수'(051-336-4123)는 밀양 부북국수를 말아내는 곳이다. "'디포리(전어과)'로 우려내는 시원한 육수, 그리고 시금치 정구지 호박나물 따위의 야채를 듬뿍 넣는 것이 부북국수 스타일"이라고 주인 박순자(50)씨는 말했다. 남편이 국수 마니아인데 밀양 부북의 국숫집을 10년간 단골로 다니다가 종내 국숫집을 직접 내게 됐다고.
부평시장 안에는 '김치국수'(051-241-1929) 집이 있다. 김치국수는 북한식이란다. 북한 출신의 할매가 처음 장사를 시작한 이후 서너 명의 주인이 바뀌었다. 지금 주인은 거의 명맥을 잃던 '국수 한 그릇 매상'에서 장사를 시작해 꼬박 10년을 김치국수 장사를 하고 있다. "이집 특징이 뭐냐"는 질문에 "비빔이고 물이고 간에 김치를 넣는다"고 주인은 말했다. 광복동에서 2년 전 이곳 부평시장으로 옮겨왔다. 아주머니는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신문에 내지 말라"고 했지만 질문을 하니까 꼬박꼬박 답해준다. 그게 인심이다. 네티즌들은 "이집 인심 좋다"고 평들을 했다. 부산은행 부평동지점 오른쪽 골목 아래 블록 모퉁이에 간이 의자를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전화 통화가 잘 안 된다.
부산 동구 초량동의 '평산옥'(051-468-6255)은 돼지수육(1인분 5천원)과 세트로 나오는 물국수(2천원)가 유명하다. 특유의 소스와 함께 먹는 돼지수육(제육)이 널리 이름이 나 있으며 수육을 먹은 뒤 시켜 먹는 물국수는 별미다. 이집 물국수는 돼지 육수에 말아내는데 노린내가 나지 않으며, 무거운 수육 뒤 가벼운 국수로 궁합이 잘 맞는다.
국숫집 거리와 골목도 있다. 연산동 교차로에서 법원 쪽 큰길 오른쪽 가로를 따라 연산동 즉석국수 집들이 있고, 해운대시장 안에는 골목을 따라 해운대시장 국숫집들이 있다. 해운대 얘기 난 김에 해운대 달맞이언덕 인근 협진태양 쪽, 김경자(56)씨가 10년째 운영하고 있는 '달맞이국수'(051-746-8754) 집은 국수 맛으로 이름이 꽤 나 있다. 칼국수 수제비 떡국 메뉴도 있다.
최학림 기자theos@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