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은 없어도, 생각나는 술집은 있다. 비가 오면 술이 더 맛나다는 객관적 연구 결과를 아직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경험을 근거로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장마철이 시작되는 즈음에 술집 목록을 다시 정리하며, 빨간 줄 쭉쭉 그은 두 곳을 소개한다. 안주가 예사롭지 않고, 술을 부르는 '마성의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마침 두 곳이 해운대에 위치해 있다. 피서객들이 점령하기 전에 부지런히 드나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인심 과 손맛 만난 곳 - 원산생고기집
"이 집 많이 알려지면 안됩니더. 우리 자리도 없는데…."
음식 사진을 찍는데 옆자리에서 술 한잔 걸친 이가 소리를 높인다. 단골 가게에 대한 애정, 충분히 이해간다. 소문이 나면 단골이 설 자리는 줄어든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런 집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원산생고기집'의 가장 큰 매력은 넉넉한 인심이다. 가게 한쪽 테이블에 16가지 안팎의 반찬이 매일 마련된다. 필요한 만큼 수시로 가져다 먹을 수 있다. 반찬을 대충 만든 것도 아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박순애(55) 대표의 깔끔한 손맛이 느껴진다. 반찬뿐 아니다. 손님이 직접 계란 프라이를 해서 먹는 곳도 있다. 30개들이 계란 수십 판이 조리대 옆에 쌓여 있다. 많이 나가는 날은 300개도 나간단다. 물론 이것도 따로 돈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이문이 생기는 건지, 오지랖 넓은 걱정이 저절로 든다. "소주 한 잔에 계란 하나만 먹어도 든든하다 아입니꺼. 반찬도 마찬가지고예. 못사는 사람들 형편 누구보다 잘 알지예." 여장부의 포스가 저절로 느껴지는 박 대표의 대답이다. 사람들에게 퍼줘야 이득이 생긴다는 '통큰' 장사 철학도 한몫했다. 그래도 가게를 아끼는 입장에서는 마구잡이로 퍼 먹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가 문을 닫으면 안 되겠기에.
이 집의 '퍼주는 기운'은 술맛을 고조시키는 최고의 안주다. 너도 없고 나도 없는, 대동단결의 무아지경을 술이 들어가기 전부터 느끼게 된다.
생고기 구이도 팔지만 제육볶음, 두루치기, 김치찌개가 더 유명하다. 맛은 비슷한데, 국물이 조금씩 많아진다. 두루치기에는 김치가 들어간다. 얼큰한 국물을 즐기고 싶다면 김치찌개를 주문하면 된다. 김치찌개 작은 것에도 김치 반 포기가 통째로 들어가 있다. 김치와 돼지고기, 파와 무 정도만 넣어도 이런 맛이 나다니 신기하다. 최소한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내는 내공! 잡스러운 맛을 싫어해서 소화가 잘되는 무로만 육수를 낸다고 했다.
두루치기와 제육볶음은 쫄깃한 고기 맛이 제대로다. 돼지고기가 닭고기처럼 담백한 것도 특징인데, 돼지를 끓는 물에 살짝 담그기 때문이다. 혹시 몰라서 '소독'하느라 그렇게 조리한다고.
의자 종류도 테이블마다 다르고, 일부 천장에는 비닐 천막이 쳐 있다. 돈 없던 대학 시절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주제로 시작해, 결국 연애 이야기로 끝났던 숱한 술자리가 떠올랐다. 1차 하러 들렀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는 곳이다.
두루치기·제육볶음·김치찌개 소 1만 7천 원. 중 1만 8천 원, 대 2만 5천 원. 영업시간 5시~오후 11시(연중무휴). 부산 해운대구 우1동 636의 1. 로드비치호텔 뒤편. 051-731-0683.
차원이 다른 이자카야 - 붉은수염
'붉은 수염'이란 일본 영화가 있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로, 자신의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시골 의사 '붉은 수염'이 주인공이다. 가게 이름을 영화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에서 '붉은 수염'을 검색하면 영화가 아니라 이곳 정보가 더 많다. 일본 거장 감독의 영화보다 더 유명한 이곳의 매력이 궁금했다.
이곳은 생맥주 맛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알고 보니 10년 전 아사히 생맥주를 부산에 처음 들여온 가게가 이 집이었다. 맥주는 개운함을 넘어, 깨끗한 맛이다. 다른 일본식 주점에서도 마시는 똑같은 상표의 술인데, 여기 맥주 맛이 더 좋은 이유는 대체 뭘까?
국물 맛이 진하고 고소한 '붉은 수염'의 스지오뎅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