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전배기 한잔 하실래예?"

입력 : 2012-12-27 08:06:16 수정 : 2012-12-28 09: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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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마을 '우물집'

집에서 만들던 옛 방식 그대로, 한 달 이상 발효시켜 걸러낸 막걸리.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막걸리의 진수를 맛본 듯하다.

권불십년? 10여 년 성가 드높던 막걸리의 인기가 요즘 확실히 시들해졌다. "우리 술"이라며 막걸리를 찾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케"라 외친다. 수출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왜 이리 됐을까? 이유는 분명하다. 맛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막걸리 인기가 막 시작될 무렵 사람들이 "우리 술"이라 환호한 것은 막걸리 고유의 맛을 기대하고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기에 올라 타 온갖 것을 섞어 현란해진 맛의 막걸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막걸리가 막걸리답지 않게 된 것이다. 뿌리가 흔들리는데 가지가 온전할 리 없다. 업계에서는 뒤늦게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막걸리 본래의 맛으로 돌아가자." 문제는 본래의 막걸리 맛이 무엇이고,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다.

■ 옛 방식으로 담근 '전배기'는 어디 없나?

경상도 말로 '전배기'라는 게 있다. 서울 말로 '전내기'라는 것인데, 물을 조금도 타지 아니한 순수한 술을 말한다. 막걸리는 쌀로 지은 고두밥에 누룩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누룩으로 삭힌 고두밥에서 알코올 기운의 액체가 슬몃슬몃 배어나오는데, 이게 전배기다. 이 전배기를 거칠게 걸러낸 뒤 물로 희석시킨 것이 시중에서 흔히 마시는 막걸리다.

전배기가 좋지 않은데 희석한 막걸리가 좋을 리 없다. 전배기가 좋으려면 누룩이 좋아야 한다. 누룩, 그러면 부산 금정구 금성동 일대 산성마을이다. 이 마을의 옛 사람들은 오랜 기간 누룩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누룩에 전통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엔 산성마을에서도 제대로 된 전배기 맛보기가 쉽지 않다. 산성마을 음식점에서 파는 막걸리라고는 해도 공장형 시설에서 속성으로 대량 생산된 막걸리가 대부분이고, 거기에 사용된 누룩도 옛날 방식이 아니라 역시 현대식 시설에서 대량 생산된 누룩이니까. 집에서 옛 방식으로 담근 전배기는 거의 사라진 것이다.

할매들 밟아 만든 누룩 사용해
물 한 방울 안 섞고 그대로 발효
막걸리의 원형 바로 그 '전배기'

알코올 도수 10도 안팎 진하지만
여성도 부담 없고 뒤끝 안 남아
바삭하게 구운 염소고기와 궁합

■ 있다! 산성마을에. 포도향 시큼한 전배기!


산성마을에서 염소고기와 막걸리를 파는 100여 곳 음식점 가운데 '우물집'이 있다. 고맙게도! '우물집'은 집에서 일일이 사람 손으로 막걸리를 담근다. 옛 방식 그대로의 전배기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은 박경숙(55) 씨다. 시어머니에게서 막걸리 담는 법을 배워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

"웬만해선 내주지 않는다"는 박 씨를 졸라 이 집 특유의 전배기를 내오게 했다. 양푼이에 무언가 가득 담아 내왔다. 밥알이 삭혀서 죽처럼 됐고 그 사이로 누룩 알갱이가 보였다. 액체가 흥건한데, 그게 바로 술이다. 걸러지기 전의 전배기, 곧 원형의 막걸리다.

시큼한 냄새가 확 풍겼다. 코를 가까이 대고 집중해 냄새를 맡아 보니, 시큼한 가운데 잘 익은 포도향이 났다. 포도향이 나지 않으면 술이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라 했다. 박 씨는 누룩 건데기를 꼭꼭 씹어서 먹으면 혈압에 좋다며 숟가락으로 알갱이째로 떠서 먹어 보라 했다. 술을 '씹어 먹는' 맛이 재미있었다. 거칠게 씹히는 가운데 구수한 누룩내가 나고, 이어서 시큼한 술 기운이 입 안에 확 번지는데, 씹을수록 희한하게 단맛이 은근하게 나는 것이다.


걸러내기 전의 전배기. 삭힌 밥알 사이로 누룩 알갱이가 보인다.
■ 물 한 방울 안 섞고 한 달간 발효시킨다!

박 씨는 내친김에 발효가 막 진행 중인 술통 하나를 보여줬다. 밥과 누룩이 뒤엉켜 발효되면서 걸쭉한 가운데 허연 거품이 막 일어나는 참이었다. 담근 지 보름 지난 것이라 했다. 완성되려면 한 달은 족히 걸려야 한다고 했다. "양조장에선 빠르면 3일 정도면 막걸리가 되던데?"라며 의아해하니, 박 씨는 웃으며 말했다. "발효 잘되게 뭔가를 넣어서 물을 부어 저어주면 폭폭폭 거품이 막 일어나요. 보통 집에서도 그렇게 해. 그럼 5일 만에 막 퍼 먹을 수 있어. 그렇게 해도 맛은 있을 수 있지만, 먹고 나면 머리가 아프지. 아무 것도 섞지 않고 자연으로 발효시켜야 몸에 좋은 술이 돼요."

술 만드는 데 물 한 방울 안들어간다고 했다. 오직 누룩하고 밥하고만 넣는데, 그래야 발효됐을 때 달고 시큼한 누룩의 제 맛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술통 하나에 쌀 20㎏, 누룩 20장이 들어간다고 했다. 누룩이 중요한데, 박 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파는 누룩은 안 쓴다고 했다.

"산성마을 할매들이 발로 꼭꼭 밟아 만든 걸 써야 돼. 아직 그렇게 하는, 나이 많은 할매들 몇 분 있어요. 공장 누룩은 깨끗하지만 발효가 덜 돼. 술이 요런 맛이 안 나. 기계로 찍어서 건조실에 들어갔다 나오는데 깨끗해. 할매들이 떠온 누룩은 안그렇거든. 누룩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어. 곰팡이가 잘 뜬 것으로 술을 담가야 맛이 진해져."


'우물집' 박경숙 씨가 구워낸 염소고기는 바삭하면서도 꼬득꼬득했다.
■ 막걸리와 궁합 딱 맞는 구운 염소고기!


박 씨, 염소 고기 굽는 솜씨가 좋다. 꼬득한데도 바삭한 느낌이 나게 잘 굽는다. 1985년 경남 합천에서 이곳 산성마을로 시집 와서 반평생 해 온 게 염소 고기 굽는 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연애를 했는데 꾀여 왔지. 세상에 이런 동네 있는지 상상을 못했어요. 처음에는 무슨 색싯집인 줄 알았다니까. 마을에 무슨 집, 무슨 집, 하고 엄청 많았어요. 그러니 아가씨 장사하는 집인줄 알았어. 아이고야 속았다, 날 팔아 치우려고 이 외진 곳으로 데리고 왔구나, 그랬다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염소고기 파는 집이라. 고생, 고생 말도 말아요. 아침 7시에 밥 먹고 8시에 장사 준비. 8시 반이면 손님들이 들어오니까. 하루 종일 손님으로 미어터졌어. 염소 고기에 반찬 세 가지. 그것밖에 없어도 방이 모자라 마당에, 그것도 안 되면 남의 논에까지 멍석 깔고 손님을 받았다니까.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으면 결혼한 뒤 한동안 애가 들어서지 않아 마음 고생이 심했어요."

내놓는 반찬도 깔끔하다. 무를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 깻잎과 함께 지로 만든 게 있는데, 이게 맛이 독특하다. 구운 염소고기와 궁합이 딱 맞는 것이다. 박 씨는 자기가 '발명' 했단다. 고기 한 점을 싸서 먹어 보면, 새큼하고 아삭한 맛이 난다.


■ 어이쿠, 막걸리의 진수를 맛보다!

'우물집'에서 보통 손님 상에 내는 막걸리는 전배기를 걸러내 물로 적당히 희석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꽤 진하다. 시중의 병 막걸리는 보통 알코올 도수가 6도 정도다. '우물집' 것은, 묽히기 나름이겠지만, 알코올 도수가 10도 안팎이다. 은근히 취하는 것이다. 좀 진하게 내달라면 그리도 해 준다. 진하다고는 해도 마시기에 불편하지는 않다. 의외로 쉽게 넘어간다. 여성들도 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는 정도다. 취기가 쉽게 오르지만 또 쉽게 가신다. 불쾌한 뒤끝은 없다.

내온 막걸리 한 잔을 죽 들이켜고 염소 고기 한 점 씹으니 "캬∼" 소리가 절로 난다. 산성마을이라고는 해도 대부분의 집이 공장에서 만든 병 막걸리 올려서 파는데, 이처럼 집에서 담근 술맛을 보는 게 귀하고 고마운 것이다. 좋은 술에 맛난 안주, 거기에 마침 겨울비까지 줄기로 내리니 흥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어이쿠,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 술잔은 수이 돌아간다. 어쨌거나 막걸리의 진수를 맛봤다는 느낌이다.

부산 금정구 금성동 539. 금성동 2통회관에서 북문로를 따라 국청사 가는 방향으로 30m쯤 오르면 왼쪽 언덕 아래에 있다. 051-517-5130.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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