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레시피, '하씨조리비망록' 탄생

입력 : 2014-11-06 08:01:28 수정 : 2014-11-07 10: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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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의 식당'으로 유명한 경남 양산 덕계 '하씨전통추어탕'의 하우필(오른쪽) 여사. 가족들이 하 여사의 손맛을 잊지 않으려 레시피를 집대성한 '하씨조리비망록'을 만들었다. 사진은 비망록 작성을 총괄한 남편 이충섭 부산교대 명예교수가 밥상을 받는 모습.

며느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는 손맛의 비밀. 계량 스푼으로 수치화된 레시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있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며느리들은 초긴장이다. 싱겁다, 짜다까지는 괜찮은데 장을 잘 못 썼다, 혹은 이거 대체 누가 만들었느냐는 책임추궁에 이르면 대략난감이다. 귀신같이 알아내는 어른들의 입맛에 겁이 나서 아예 허드렛일만 자처하기 일쑤다. 오로지 종부의 손끝을 거쳐야만 상차림이 완성된다. "돌아가시기 전에 조리법을 제대로 전수받아야 하지 않겠나!" 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가문의 숙제'다.

대학교수와 외식프랜차이즈를 하고 있는 두 아들 내외와 딸 부부가 머뭇거리는 사이 기다리다 못한 칠순의 시동생이 나섰다. 대기업 임원까지 하고 은퇴한 그는 '종갓집 음식이 사라져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형수를 붙잡아 놓고 며칠 걸려 구술을 받았다. '돼지고기수육- 물, 산초가루(약간), 소금 약간 넣고 저어서….' 1번 메밀묵장을 시작으로 28번 파절이(불고기용)까지 또박또박 받아 적은 게 28가지의 레시피가 담긴 '하씨조리비망록'으로 탄생했다.

양산 '하씨전통추어탕' 하우필 씨
입맛 까다로운 종갓집 손맛
남편·시동생 합심해 구술 기록
"자식들이 살 붙여 승화해 주길"

조선시대 문중의 조리서 '음식디미방' 혹은 '규곤시의방'에 비견될 만한 이 비망록의 주인공은 하우필(78) 여사. '명사들의 식당'으로 유명한 양산 덕계지하차도 근처 '하씨전통추어탕'의 그 '하씨'다. 이 비망록의 작성을 총괄한 이는 남편인 이충섭(81) 부산교대 명예교수. 자식들이 보고 배우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기록까지 남겼지만 하 여사는 여전히 못 미덥다. "다 감으로 하는 긴데…. 그게 전수가 되까이?"

온 가족이 모일 때면 어느 집에서나 있을 법한 '엄마의 손맛을 지켜라!' 프로젝트. 가문의 레시피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까다로운 입맛이 있었다

'하씨전통추어탕'은 시장·군수, 정치인, 대학총장, 연예인, 기업인들이 단골이다. 근처 골프장 이용객 중 이 식당을 모른다면 한국사람이 아니라고 봐도 된다. 10년 묵은 장맛, 예스런 상차림이 좋다는 말을 듣는다. 추어탕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암퇘지 갈빗살로 끓인 '돼지고기 된장찌개'가 더 유명하다. 명성이 높다 보니 울산현대백화점에는 이름을 내 건 식당까지 입점했다. '하우필보쌈'.

흥미로운 대목은 하 여사가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위가 약해서 소고기, 돼지고기 따위 기름진 것들은 아예 입에 대질 않는다. 물론 가족들은 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니 평생 먹지도 않은 고기 요리를 척척 해냈다. "고기를 딱 보면 간이 나온다카이." 입에 넣지 않고 보기만 해도 감이 온다는 말이다. 고기뿐만 아니라 냄새나 재료를 가려서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도 일체 먹질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음식이라면 뭐든지 그냥 간을 맞춰내니 신통방통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예민한 감각이 '하씨전통추어탕' 명성의 기반이 됐을 터이다.

입맛 까다롭기로는 남편이 한 술 더 뜬다. 이 명예교수는 밥상이 차려지면 항상 촌평을 내놓는다. 묵장에 제대로 된 장을 넣었나, 쌈 재료에 맞게 장을 배합했나…. 고집스러울 정도로 장 맛에 집착한다. 반찬 중 원칙에 어긋난 장을 쓴 게 오르면? "아예 손을 안 대지요. 집 사람으로서는 싫었겠지만…." 가게에서도 파절이에 식초를 넣은 게 나오면 "참기름과 부딪히니 식초를 빼고 다시 무쳐 가져오라"고 물릴 정도다. 이 명예교수는 오로지 부인의 손맛만 신뢰한다. 두 아들 집에 가서도 며느리가 해 주는 음식을 먹질 못하고 아내를 시킨다. 커피도 본인의 비율대로 직접 '조제'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다.

부부의 유별스러운 입맛은 집안에 내력을 두고 있다. 성철대종사의 생가가 있는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가 고향인 이 명예교수와 진주 진양의 부유한 집안 출신 하 여사. 이 명예교수는 "입맛 까다롭기로 일컬어지던 두 집안이 만나 승화된 것 같다"고 풀이했다.

■"종갓집 음식이 사라지면 안돼"

명절 때 며느리들은 함부로 음식을 차릴 수가 없다. 60년 넘게 하 여사의 손맛에 익숙해져 있는 이 명예교수와 동생 이영정(72) 씨가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이다. 행여 다른 사람이 간을 맞춰 차려내면 즉각 "누가 했느냐"고 알아차리니 도리가 없다.

부부의 두 아들은 이재혁(58) 부산외대 러시아어과 교수와 이준혁(53) ㈜글로벌다이닝그룹 대표. 증권사 간부와 대학교 직원으로 있는 며느리들도 중년에 접어들어 나름 살림의 관록이 쌓였지만 시댁의 입맛은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벽이다. 둘째 아들 준혁 씨가 '바르미샤브샤브칼국수' 등 7개의 외식브랜드를 갖고 있는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고 있어도 소용없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나 집안의 대소사 때 '엄마의 손맛을 기록으로 남겨야 된다'는 말이 해를 거듭해서 되풀이된 것이다.

무심한 시간이 자꾸 흐르자 이 명예교수가 운을 뗐다. "며느리들도 나름대로 음식을 차려내긴 하는데, 엉터리가 많으니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배우라!"

이에 마음이 급한 동생이 조리법을 손으로 받아쓴 것을 PC로 타자를 쳐서 정리한 다음 조카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하씨조리비망록'은 이렇게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됐다.

■엄마의 손맛, 재연할 수 있을까?

"집사람이 발효음식을 특히 잘했는데 빠져 있네요." 어렵사리 탄생한 비망록을 반가운 마음에 찬찬히 훑어보던 이 명예교수. 누룩, 전통주, 단술 등이 들어 있지 않다며 약간의 아쉬움을 드러냈다. "누룩을 직접 담가서 청주를 빚어 제주로 쓰기도 했는데, 그게 참 맛이 있었어요." 

'돼지고기 된장찌개'.
이번 비망록에는 돼지고기 된장찌개와 수육을 비롯해 호박잎양념장, 들깻잎쌈장, 돼지고기 김치찌개, 배추김치, 깍두기, 쇠고깃국, 콩나물국 등 집밥 상차림에 필요한 것들이 망라됐다.

이 비망록에 담긴 레시피를 따라하면 과연 그 맛을 낼 수가 있을까? 둘째 아들 준혁 씨는 "집에서 따라서 조리해 보면 엄마가 해 주던 그 맛이 얼추 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 들은 하 여사는 그냥 웃고 만다.

"가게로 찾아와 하도 졸라대는 사람이 있어서 조리법을 가르쳐 준 적도 있는데, 막상 해봐도 그 맛이 안난다쿠데." 장 맛과 좋은 재료에 감각이 어우러져야 하는데 그 레시피만 달랑 들고 어찌 같은 맛을 낼 수 있겠냐는 말이다. 계량화된 조리법에 한계가 있다는 뜻일 터.

어쨌거나 영혼을 배부르게 하던 '엄마의 손맛'을 잊고 싶지 않아(비망!) 기록을 남겼으니 여기에 살을 붙여 승화시키는 건 자식들의 몫으로 남았을 것이다.

※경남 양산시 덕계2길 5-21 세신상가아파트 101호. 055-365-0710.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사진=강원태 기자 w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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