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탐조기행] 분단의 한탄 모르는 척… 비경 뽐내며 흐르는 한탄강

입력 : 2014-11-20 07:56:02 수정 : 2014-11-21 09: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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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군 한탄강은 오랜 세월 거치며 형성된 협곡과 주상절리가 아름답다. 사진은 고석정에서 바라본 한탄강이다.

쇠둘레 땅 철원. 그 땅의 현대사는 아리다. 38선 이북이었던 땅은 해방 맞자 북한 통치를 받는다. 한국전쟁 끝나고 이번엔 남한 땅으로 등록된다. 수복지구다. 전쟁은 그 땅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토박이 주민 80%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고향 땅은 금단지대였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가 발길을 잘랐다. 그래도 그들은 줄기차게 살았다.

그 땅은 그러나, 풍요롭고 정취 수려하다. 철원평야는 한결같이 기름지다. 정전협정 중 참혹했던 고지전도 옥토 둘러싼 혈전이었다. 철의 삼각지 전투. 뺏어야 했고 뺏기지 말아야 했다. 철원 젖줄 한탄강은 굽이마다 수묵화다. 수직절벽 우뚝하고 주상절리 돌꽃이 지천으로 핀다. 폭력으로 형편없던 시절에도 유유했던 그 강은 철마 끊긴 땅을 오늘도 느릿느릿 달린다. 김기덕 시인은 이 강을 두고 '아름다움과 처절함이 공존하는 공간'이라 했다. 그 강과 그 땅의 서정은 대체로 그러하다.

한국전쟁 상처 오롯한 철원평야
이맘때면 '철새들의 천국' 둔갑

휴전선 가로질러 흐르는 한탄강
노동당사·승일교 등 볼거리도…


봄 짧고 겨울 유독 긴 그 땅에 찬바람이 분다. 멀고 험한 길 날아온 두루미 울음이 유난히 길다. 고단한 한숨인듯, 절절한 사무침인듯. 싸한 냉기가 허공을 맴돈다.

■철원평야

철원평야는 산이 사방을 빙 둘러싼 분지다. 예부터 곡창지대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정치적 변방이었다. 주목 못 받던 들녘은 궁예가 905년 '미륵불의 나라' 태봉국의 도성을 축조하면서 역사의 중심에 섰다. 영광은 짧았다. 14년 만에 도성이 무너졌다. 지금은 비무장지대에 그 터만 쓸쓸하다.

태봉국 도성지 조망지는 철원평화전망대다. 2007년 준공됐다. 전망대 아래로 남한 최북단 초소와 북한 최남단 초소가 서로를 겨눈다.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낙타고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참담했던 전장은 하나같이 황량하고 핏기가 없다. 남한 초소 옆으로 태봉국 도성지다. 대동방국(大東方國) 꿈꿨던 시절, 도성은 견고했다. 그러나 패자의 것은 세월 따라 키를 낮췄다. '모두 흙으로 쌓았으며 반은 무너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패망 500년 후의 모습을 그렇게 기록했다. 그리고 또 500년, 이제는 그 반마저 종적이 없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태봉국 도성지.
전망대 정면 들녘이 북한 평강고원이다. 철원평야는 거기서 비롯됐다. 27만 년 전 평강고원 오리산에서 화산이 터진다. 화산은 큰 폭발 대신 꿀럭꿀럭 용암을 토해냈다. 점성은 묽었다. 분출된 용암은 낮은 골짜기를 메웠고 거대한 들녘을 만들었다. "그 들녘이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입니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영규 소장 설명이다. 철원평야는 그래서 용암대지다. 그 땅을 15m쯤 파 내려가면 온통 현무암밭이다.

철원평야는 일제강점기 교통요지로 떠오른다. 일본이 경원선과 금강선 철도를 깔았다. 수탈 자원 옮기고 군 물자 나르는 장치였다. 노동자와 상인으로 거리가 흥성였다. 1937년 철원읍 인구는 2만 명에 달했고, 접객업소는 100개가 넘었다. 해방 후에도 군수품 이동로 기능은 유효했다.

전망대에서 노동당사 가는 길은 허망하다. 얼음창고, 농산물검사소, 철원제2금융조합, 녹슨 기차…. 총탄과 폭격 맞아 주저앉은 건물 잔해가 처참하다. 노동당사는 포탄 자국으로 어지럽다. 구멍 숭숭 뚫린 벽채에 간신히 앙상한 골격. 해방 후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였던 그 시절의 위세는 찾을 길 없다.

노동당사 근처, 총탄으로 살점 팬 도로원표가 애처롭다. '평강 16.8㎞, 김화 28.5㎞, 평양 215.1㎞….'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도로원표는 도시 중심지란 사실을 애써 알린다. 그 일대가 구철원이다. 철원에 두 개의 철원이 있다. 전쟁 전의 철원과 전쟁 후의 철원. 전자를 구철원, 후자를 신철원이라 한다. 한때 은성했던 구철원은 1·4후퇴 무렵 어느 날 통째로 사라졌다. 미군은 소개 작전이라 했다. 불지른 이는 미군 돕던 노무자였고 철원사람이었다. 노동당사 앞 철원평야가 비어간다. 바싹 마른 억새가 서걱댄다. 목이 탄다.

■한탄강 그리고 민통선

한탄강은 철원평야를 남북으로 가른다. 북한 평강군 장암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임진강으로 흘러나간다. 역시 오리산과 관련 깊다. 오리산 용암대지는 오랜 세월 침식과정을 거쳐 협곡을 형성했고 그 과정에서 주상절리가 탄생한다. 현무암 틈새로 스민 물이 얼고 팽창해 결따라 쪼개지면서 육각기둥의 돌꽃이 됐다.

대교천 현무암 협곡에서 한탄강 주상절리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현무암이 직조한 부챗살 절리가 신비롭다. 시간이 공들인 작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거기서 5분쯤 달리면 고석정이다. 높이 20m의 장대한 화강암 '고석바위'가 우뚝하다. 정상부엔 소나무가 작은 군락을 이뤘다. '신선의 구역'. 고려 승려 무외가 적었다. 맞은편으로 조선 왕들이 사냥하러 철원 들렀다 연회 베푼 2층 누각이 보인다. 전쟁 때 불탄 걸 복원했다.

임꺽정도 고석정에 등장한다. 조선 명종 때 의적은 관군에 쫓긴다. 고석바위 안 석굴에 숨어 위기를 모면한다. 한탄강 꺽지 둔갑술 신화는 풍문으로 떠돈다. 확인되지 않은 전설의 지층은 두텁다.

승일교는 고석정에서 가깝다. 한탄강 서쪽 동송읍과 동쪽 갈말읍을 잇는다. 1948년 북한이 건설하다 중단한 걸 1952년 미군 공병대가 마무리했다. 용도는 두쪽 다 군사용이었다. 교각 폭이 조금 다르다. 북한 것은 좁고, 미군 것은 넓다. 다리 중간에 틈이 있는데, 갈수록 벌어진다. 승일교가 늙어간다. 그 아래 한탄강은 남쪽으로 나아간다. 큰 바위 만나 크게 돌고, 작은 바위 만나 작게 비켜가며 그저 묵묵하다. 신세 한탄않고 자세 낮춘 흐름이 도도하다.
북한군이 짓다가 미군이 완공한 승일교.
민통선으로 길을 잡는다. 이길리 민박집이 숙소여서다. 가던 길에 들런 양지리 토교저수지. 1978년 흙을 쌓아 만들었다. 쇠기러기 월동지다. 이른 아침이면 수십만 마리가 하늘을 까맣게 덮는다. 들녘 군데군데 그들이 어울려 논다. 멀찌감치 떨어진 재두루미 가족은 가을볕에 여유롭다. 앳된 군인이 경계를 섰다. 토교저수지 너머가 민통선이다. 민통선은 1954년 설정됐다. 처음엔 '귀농선'이었다. 4년 후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이 허용됐고 귀농선은 민통선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 민통선에 전략촌이 들어섰다. 자립촌 재건촌 통일촌이 그때 생겨났다. 1979년까지 조성된 마을은 총 14개. 현재 민통선은 계속 북진중이다. 민통선 마을도 이길리 정연리 유곡리 3개만 남았다.

"타지에서 시집 왔죠. 찬기운은 뼛속 찌르고 전화나 교통수단은 없고, 꽉 막힌 느낌이었죠. 벌써 30년 전 일이네요. 남북 긴장? 여기는 오히려 태평한 편입니다. 어지간해서는 호들갑 떨지 않아요. 험한 꼴 다 겪었는데…." 안주인이 말꼬리를 흐린다. 지뢰 캐고 황무지 개간했던, 참는 데 이골 난 사람들의 마을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든다. 달빛 젖은 민가가 봉쇄된다. 가을 늦었다고 사나운 냉기가 기습했다.

글·사진=임태섭 기자 tsl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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