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서 떠나는 멕시코·이탈리아 여행

입력 : 2017-03-01 19:19:59 수정 : 2017-03-03 10: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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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남 그릴드 파히타는 불 맛 그윽한 쇠고기, 돼지고기, 새우, 양파, 카르니타스가 한 그릇에 담긴다. 또 기본 소스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소스 5종이 추가로 나온다.

낯선 세상에 자신을 던져 보는 여행은 깨달음과 발견에서부터 잠깐의 충전까지, 여러모로 도움 되는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문화를 접하며 인식과 감각의 지평은 한층 넓어진다. 그런 점에서 다른 지역 문화가 녹아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테이블 위에서 떠나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부산 한복판 서면에 멕시코와 이탈리아의 낯선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집이 생겼다. '세상은 넓고 먹을 것은 많다.'

이억남의 그릴에서 만난 '멕시칸 파히타'

밥으론 2명·안주론 4명 넉넉
향신료 많이 넣는 소스 탈피
전통 장류·토마토소스 배합
고기 맛은 오로지 불·소스로

'이억남의 그릴'이라는 상호에서 고기나 채소를 바로 구워서 멕시코식으로 내놓는 집이겠거니 생각했다. '이억남은 뭐지?' 궁금하기도 했다.

오후 4시에 문을 연다기에 10분 전쯤 도착했다. 큰길도 아니고, 좁은 골목길에 웬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메뉴판을 보고 있는데 이 멕시칸 음식점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이억남 그릴드 파히타'를 먹는다고 했다. 파스타 말고 파히타(fajita)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릴에 구운 쇠고기와 돼지고기, 새우, 양파 등을 토르티야에 싸 먹는 음식이었다. 잠시 후 나온 파히타를 보니 밥으로는 2명이 먹어도 넉넉하고, 안주로는 3~4명도 충분히 먹을 양이었다.

이현동 대표의 특제 기본 소스.
어느 지역에서든 쌈에는 소스가 빠질 수 없다. 파히타도 마찬가지. 각기 다른 식재료를 조화시키는 역할을 맡아 풍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현동(25) 대표는 소스 개발 비사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멕시칸 음식점이 부산에 많이 생기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아 분석해보니 소스에 멕시코 향신료를 너무 현지 방식대로 사용한 것 아닌가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간장, 고추장 등 우리에게 친숙한 장류와 토마토소스 등을 적절히 배합했더니 주변 반응이 좋았습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했던가. 적응과 변용, 퓨전이 이 집 음식 맛의 비결인 셈이다. 실제 먹어본 파히타는 불 맛 은은한 고기와 포근한 토르티야, 향이 풍부한 양파가 감칠맛 제대로 나는 소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토르티야에 고기와 소스를 얹어 먹기 전 모습.
하지만 변화는 쉽지 않은 길이다. 무엇을 얼마나 섞어야 '적절'한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는 이 대표의 일을 돕고 있는 아버지 이주식 씨는 "아들이 직접 소스를 만들어 수백 수천 번 맛보고 다시 만드는 일을 꼬박 석 달, 아침부터 밤까지 반복하며 지내더라"며 "가게를 시작한 뒤 수십 년 경력의 전문가가 이 집에서 소스 맛을 보더니 '직접 맛을 보며 만든 것 같다'고 알아봤다"고 전했다. 가게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는 현재의 작은 성공은 몇 달 동안 잠을 줄여가며 겪었을 수많은 작은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대표는 고기 맛을 좋게 하려고 일각에서 사용하는 연육제를 거부하고, 오로지 불과 소스 맛으로 승부를 건다. '내가 못 먹는 음식은 손님도 못 먹는다'는 호혜의 정신이다. 외식경영 전공 공부뿐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는 관점으로 음식 먹는 일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이 바로 이런 열정의 밑바탕이다.

왜 하필 멕시코였을까? "처음에는 족발집을 생각했는데 유행을 타는 멕시칸 요리를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못할 것 같았고, 시작도 많이 하지만 오래 버티는 전문 식당이 드물어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지난해 9월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오후 7시 이후로는 대기 번호표를 받아야 할 정도로 인기인 것을 보면 음식 개발자로서도, 경영자로서도 일단은 합격점을 줘야 할 것 같다.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이런저런 대출을 끌어모아 서면 한복판에 식당을 차린,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은 드높은 취업장벽을 생각하면 어쩌면 조금 빨리 찾은 돌파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10여 명의 후배가 이곳에서 이 대표를 도우며 내일을 꿈꾸고 있다. '청년 창업'의 성공담이 될 수 있을까? 연간 '2억'을 버는 남자라는 뜻의 '이억남'이라는, 장난기 넘치는 세속적 이상향을 간판에 내건 이 젊은이들의 앞날이 궁금하다.

이억남 그릴드 파히타 3만 1000원, 트리플 미트 파히타 2만 9000원, 쉬림프 콤보 파히타 2만 8000원. 영업시간 오후 4시~오전 2시. 월요일 휴무. 부산 부산진구 중앙대로702번길 27-8(부전동). 051-802-2469.

아란치니 벅스에서 만난 '시칠리아 아란치니'
앙증맞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아란치니 매장 외부 모습.
우리 주먹밥 닮은 대표 간식
한국 사람 입맛 맞게 재해석
소박하면서도 이질적 '매력'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많다.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를 제외하고 한국인의 입맛에 가장 잘 맞는 서양 음식이라는 평가도 있다.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서 현지 문화를 깊이 있게 느껴보지 않는다면 대표적인 것 위주로 겉핥듯 접하게 된다. 유홍준이 '아는 만큼 보인다' 했듯, 음식도 미리 공부하지 않으면 한국에서는 구경도 못 할 음식들을 맛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마련이다. 약 2000년간 끊임없이 이웃 나라와 이민족의 식민지였던 시칠리아는 현재 이탈리아 음식 문화의 뿌리로 꼽힌다. 아랍, 스페인, 그리스 등 지배자들의 문화가 음식 속에 융화돼 역설적으로 이탈리아 최남단 섬에서 꽃핀 것이다.
쇼콜라또, 버팔로, 라구 아란치니를 한 쟁반에 담아 놓은 모습.
최영진 '아란치니 벅스' 대표는 시칠리아의 이런 매력에 빠졌다. 2년 전 그곳에 머무르며 현지인이 즐겨 먹는 아란치니를 눈여겨봤다. 리소토를 만들고 남은 밥에 치즈나 고기를 넣어 뭉치고 밀가루, 달걀, 빵가루를 차례로 묻힌 뒤 튀겨 먹는 대표적 간식 메뉴가 아란치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도 종종 아란치니가 나오지만, 겉에 토마토소스를 끼얹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최 대표는 우리의 주먹밥이나 일본의 오니기리처럼 현지인 대부분이 소스 없이 편하게 들고 다니며 먹는 것을 보고 그대로 들여오고 싶었다. "흉내만 내는 것 말고, 우리 실정에 맞게 제대로 선보이고 싶었어요." 
사프란 향신료를 넣은 리소토에 쇠고기, 돼지고기, 토마토, 완두콩을 그라나 파다노 치즈에 섞어 익힌 라구 아란치니 속.
최 대표는 해운대 드마리스를 비롯한 전국 대형 식당 개점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한 베테랑이지만, 한국인 입맛에 맞는 아란치니를 개발하려고 1년 동안 신중하게 노력했다. 영국 유명 셰프 제이미 올리버 소유의 레스토랑에서 아란치니를 만들던 김인성 셰프도 영입했다. 김 셰프는 "치즈가 들어간 단조로운 아란치니만 만들다 이제 다양한 시도와 연구를 해볼 수 있어 재미있다"고 말했다.
아란치니 매장 진열장.
라인업은 화려한데 가게는 소박하다. 식탁 없이 포장 판매와 배달을 중심으로 해 점포를 작게 열었다. 민트색을 대표색으로 내세우고 내부도 환하게 만들어 가게만 뚝 떼 놓고 보면 마치 이탈리아 어느 시장에 와 있는 느낌이다. 인근 서면시장에서부터 이어지는 돼지국밥이나 어묵 같은 메뉴와 아란치니는 이질적인듯하면서도 서민적인 음식으로 묘하게 어우러진다.

라구·고르곤크림 소 2500원, 대 3000원. 버팔로·쉬림프 소 3000원, 대 3500원, 쇼콜라또(소)·맥볼 3개 2500원.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 부산 부산진구 중앙대로691번길 14(부전동). 051-805-7779.

글·사진=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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