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은 뻔하고 맛없다? 그런 편견은 버려

입력 : 2017-08-02 19:07:42 수정 : 2017-08-03 10: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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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나랑'의 대표 메뉴인 흑미콩가스는 바삭함이 육안으로도 느껴진다(왼쪽).

영양 과잉, 운동 부족. 생활습관병이라 부르는 질환 대부분은 여기서 시작한다. 보양도 넘치면 모자람만 못할 수 있다. 혀끝을 유혹하는 맛의 세계도 점점 세련되고 고도화되고 있다. 명상을 통해 나와 세상을 잇는 생명의 고리를 깨우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채식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다고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저 약간의 균형과 비움이 필요할 뿐이다. 부산은 물론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채식주의 맛집과 빵집을 다녀왔다. 맛을 내기 쉬운 재료에 스스로 제한을 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베지나랑

한 번쯤 부처님오신날 절에서 공양한 적이 있을 것이다. 절집 규모와 사정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볶은 나물에 밥을 비벼 먹는 것이 주된 방식이다.

합천 해인사 말사인 행복한절(경남 거창군)이 2014년 10월 부산 민락수변공원 인근에 차린 '베지나랑'은 사찰음식의 화려한 변신을 경험할 수 있는 채식 밥집이다.

해인사 말사 '행복한절'이 운영
사찰음식 맛볼 수 있는 채식 밥집
대표 메뉴 흑미콩가스·볶음쌀국수
50년 넘은 씨간장으로 양념 '비결'


절밥과 채식에 대해서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었다. 심심하고, 혀끝에 남는 맛이 별로 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베지나랑 밥을 먹어 보고는 역시 편견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흑미콩가스와 볶음쌀국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입맛을 돋우는 솜씨를 보여줬다.

베지나랑 '볶음쌀국수'
돼지고기 대신 콩으로 만든 콩가스를 흑미에 묻혀 일본식 돈가스처럼 바삭하게 튀겨낸 흑미콩가스는 과연 베지나랑의 대표 메뉴로 부를 만했다. 또 무농약 현미와 찰 현미, 백미로 지은 밥은 나물과 쓱쓱 비빈 뒤에도 구수한 밥맛을 제대로 간직했다.

베지나랑 음식의 성취가 놀라운 또 하나의 이유는 절밥 원칙대로 오신채(마늘 양파 파 부추 달래)를 전혀 쓰지 않고도 맛을 냈다는 점이다. 마늘, 양파, 파는 양념의 기본 아닌가.

"베지나랑에서는 50년 넘은 씨간장을 사용합니다. 여기에 표고버섯과 다시마 등을 넣어 맛간장으로 쓰고요." 도근 점장의 말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베지나랑의 메인 셰프 역할을 하는 수인 스님이 충남 부여에서 요리를 배울 때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씨간장이라는 설명이었다.

정성과 세월을 어떤 맛이 이길 수 있을까. 모양은 예쁘고 화려해졌지만, 채식과 절밥의 기본은 굳게 지키는 베지나랑의 정신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베지나랑 '나랑비빔밥'
"전통 사찰음식은 이미 널리 보급됐죠.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해보고 싶었고, 체질 때문에 고기나 밀가루 같은 것을 먹지 못하는 분들이 편히 올 수 있는 밥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꿀이나 우유도 쓰지 않는 비건(완전 채식) 원칙을 지키지만 그렇게 강하게 내세우고 구분하지는 않아요. 불교는 애써 구분하지 않는 불이(不二) 사상이니까요."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 도 대표의 이 말을 듣고 생각했다. 음식을 수단으로, 채소와 고기를 생명이 아닌 식재료로만 봐서는 우주 만물이 모두 연결된 세상(인드라망)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는 얘기 아닐까. 채식의 목적이 세상을 깨우는 것이고, 베지나랑이 입주한 건물 2층에 '나랑 명상센터'가 함께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생각 좀 하고 먹자.' 영화 '옥자'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무렵 베지나랑에서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흑미콩가스 1만 500원, 나랑비빔밥 1만 원, 볶음쌀국수 9500원, 연차림 세트(2인 이상 예약 주문) 1인 1만 6000원. 영업시간 오전 11시 30분~오후 10시(오후 3~5시 브레이크 타임). 부산 수영구 광안해변로370번길 9-32(민락동) 노블스카이 9층. 070-4177-5555.

밀한줌
우유와 달걀, 버터를 쓰지 않고도 예쁘고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밀한줌'은 보여준다.
'당신이 우유를 마시지 않으면 이 송아지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우유 생산 과정을 고발하는 한 동영상에서 이런 문구를 본 적 있다. 우유 취득이 목적인 낙농가에서는 암소가 쉴 새 없이 송아지를 낳아야 한다. 송아지가 태어나면 곧바로 어미 소로부터 분리하고, 수송아지는 12~23주 후 도축된다는 내용이었다. 우유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도살장으로 향하는 송아지들을 보고는 우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채식주의자 가운데서도 비건과 오보(채식+달걀)를 제외한 대부분은 우유를 먹는다. 우유와 버터는 빵을 만드는 데 필수 재료다.

채식주의자 위한 건강한 빵집
우유·버터는 물론 달걀도 안 넣어
우리 몸에 맞고 건강한 국산밀 사용
단맛은 조청, 짭짤한 맛은 죽염 써


'밀한줌' 최태석 대표는 비건이 먹을 수 있도록 달걀까지 넣지 않는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화학 첨가물이나 이스트(효모)를 넣지 않는 '건강 빵집'은 많지만, 우유와 버터, 달걀까지 넣지 않고 빵이 될까? 지난 4월 온천천 인근 상가에 조그마한 둥지를 튼 밀한줌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가능할 뿐 아니라 맛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스스로 재료에 제한을 둔 빵집이라는 얘기에 빵 종류도 얼마 없겠거니 짐작했다. 오산이었다. 오후 4시쯤 찾아간 가게 한쪽에는 이미 다 팔린 메뉴 알림판을 한 무더기 모아 놓았고 진열장 일부는 텅 비어 있었다.

알림판을 보니 소보로 치아바타 쿠키 스콘 머핀 러스크 캄파뉴 모닝빵 단팥빵…, 여느 빵집과 다를 바 없는 구색을 다 갖췄다. 몇 가지 빵을 잘라 맛을 봤는데 찰지고 고소한 맛이 더했다.
밀한줌 '통밀식빵'
우리 땅에서 나는 전통 종자인 앉은뱅이밀(박력분), 금강밀(중력분), 조경밀(강력분)을 갈아 반죽한다. 수입밀보다 글루텐 함량이 낮아 알레르기 반응이 적고, 미네랄 등 유익한 성분은 더 많다는 게 최 대표의 설명이다. 그뿐만 아니라 단맛은 꿀 대신 조청으로, 짭짤한 맛은 일반 소금 대신 죽염을 썼다.

얘기를 들어보니 한두 해 실력이 아니었다. 명상 수련을 하다 자연스럽게 채식을 시작한 최 대표는 목공예 전공자였다. 빵을 좋아하는데도 달걀이나 우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리하게 된 도반들의 요청으로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도넛을 만들었다. 요리가 체질에 맞았던지 반응이 좋았다. 이때부터 최 대표는 누구도 해본 적 없는 비건 베이커리의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벌써 25년이 넘었다.

"혼자 실험도 해보고 시중 빵집에서 일도 해봤죠. 그러다 6년쯤 전에 서울에 가서 비건 빵집을 처음 열었는데 마침 건강한 빵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크게 인기를 끈 겁니다."

서울 신촌과 망원동 등지에 빵집을 내 주목받았던 최 대표는 지난 4월 돌연 고향인 부산에 돌아와 밀한줌을 차렸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한국베지푸드협회 관계자들로부터 꼭 가게를 내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왔죠."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비건 베이커리 장인이 부산에 있다는 점이 자랑스러워졌다.

흑미식빵 6000원, 흑임자크림빵·홍국단팥빵 각 2500원, 단호박소보로 5000원, 쑥치아바타 3000원.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9시. 부산 동래구 온천천로 471번길 7. 051-528-5876.

글·사진=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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