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맛집] 고명 돼지 올리고 석쇠구이 더하고… 밀면의 변신은 '무죄'

입력 : 2017-09-20 19:11:23 수정 : 2017-09-21 10: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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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상호에 담은 '초정밀면갈비탕'의 물비빔면 양념 빛깔이 곱다. 육전과 면을 한 젓가락 집어 먹어보면 꼬들꼬들하고 구수한 고기와 탱글탱글한 면발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음식도 역사의 산물이다. 메밀이나 옥수수·고구마 전분을 넣어 정성스러운 육수와 함께 먹던 냉면을, 유엔 구호물자로 만든 밀면이 대체한 것 역시 전란의 흔적이다.

전쟁은 오래전 멈췄고, 물자도 풍부한데 밀면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고단했던 시절을 추억하는 장년 세대가 맥을 이었고, 이제는 좋은 재료로 훌륭한 맛을 내기에 전후 세대도 즐겨 찾는 메뉴가 됐다.

피란수도 부산을 상징하며 관광객도 즐기는 음식이 된 밀면 품질을 높이려 애쓰는 집을 찾아봤다. 제맛을 아는 사람은 겨울에 냉면을 찾듯, 밀면도 이제 사계절 음식이다.

초정밀면갈비탕

진주냉면서 착안, 밀면 위에 풍성한 육전
천연해독제 '인진쑥' 달인 물로 밀가루 반죽
육전 '꼬들꼬들' 면 '탱탱' 양념 '새콤달콤'


밀면에 육전을 얹어 나오는 집이 있다는 얘기에 군침이 절로 나왔다. 차를 몰아 '초정밀면갈비탕'이 있는 양산 서창으로 향했다. 밀면 먹으러 서창까지? 좋은 음식은 언제나 먼 길을 마다하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밀면이냐 물비빔면이냐 고민하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육수 한 컵이 먼저 나왔다. 마침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려 물비빔면을 주문했다. 옅은 갈색을 띤 육수는 시원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냈다.

이렇게 음미하며 창밖을 보는 도중 비빔면에 오이와 무, 배 등 고명과 육전이 풍성하게 얹힌 물비빔면이 나왔다. 바닥에는 육수가 자작하게 깔렸다. 쓱쓱 비벼 육전과 밀면을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면이 탱탱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양념은 새콤하고 달짝지근했다. 겉모습은 평범한 국수 면발인데 자꾸 씹어도 밀가루 특유의 비릿한 맛이 나지 않았다. 함께 씹히는 육전은 꼬들꼬들했다. 살코기는 씹을수록 구수한 맛을 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육수는 마르지도 흥건하지도 않은 적당한 면발을 유지해줬고, 양념과 함께 맛을 조율하는 비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듯했다.

육전 하나에 국수 한 젓가락, 그리고 따뜻한 육수 한 모금. 이런 식으로 먹다 보니 10여 분 만에 밀면 그릇이 깨끗이 비었다. 이렇게 맛있는 밀면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런 국수를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지인에게 물으니 부산에서 일찍이 '국시에미치다'라는 자가제면 국숫집을 운영했던 김영찬 대표란다.

밀면에 육전을 얹을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김 대표에게 물었다. "여러 전문점에서 밀면을 먹어 봤는데 고명에 별 차이가 없어서 '원래 밀면은 그런가 보다' 여겼거든요. 그런데 진주냉면을 먹어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재료는 다르지만 진주냉면 정도 굵기인 밀면에 육전이 어울릴 것 같더라고요." 채소 고명으로 소고기의 묵직한 맛을 상쇄하고, 양념에 키위 파인애플 등 과일이 추가됐다. 국물도 시원한 맛을 내도록 채소를 더 우려냄으로써 육전밀면이 자리를 잡았다.

육수의 비결도 궁금했다. 김 대표는 소·돼지 사골과 닭발을 함께 곤다고 했다. 이 뼈를 16시간 곤 뒤 시원한 맛을 더하는 갖가지 채소와 과일을 넣고 6시간 더 끓인다. 국물이 가라앉지 않도록 통을 돌려가며 이틀 동안 상온에서 식힌 뒤 살얼음 국물로 만든다. 이 정도 정성이면 웬만한 냉면 국물에도 뒤지지 않겠다.

육전과 국물은 냉면에 필적할 만하지만, 밀가루 면의 한계는 어떻게 극복할까. 김 대표의 선택은 인진쑥이었다. 인진쑥 달인 물로 밀가루를 반죽해 6시간 숙성시킨 뒤 면을 뽑는다. 찬물에서 한 번, 얼음물에서 두 번 면을 헹궈 쫄깃한 식감을 살린다. 김 대표는 "천연 해독제로도 사용되는 인진쑥이 밀가루 거부 반응을 줄이고 소화를 돕는 것 같다"고 말했다.

냉면과의 비교를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밀면, 이 정도면 운명의 고리에서 떳떳하게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육전밀면 6000원, 육전물비빔면 7000원, 왕갈비탕 1만 원, 손만두 5000원, 매운소갈비찜 3만 5000(중)·4만 5000(대).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 경남 양산시 삼호동부로 8(명동). 055-372-1011.

황금밀면
'황금밀면' 비빔밀면은 국산 고춧가루로 직접 빚은 양념장 빛깔이 짙다.
범내골역 바로 앞 북적이는 대로변에 밀면집이 있다. 대형 생명보험사 건물이 마주한 상권에다 버스와 지하철 이용 시민이 몰리는 중심가다. 이런 곳에 있는 식당에는 일단 의혹의 눈길을 준다. 더구나 신생 식당이라면…. 하지만 보석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될 때 더 빛나는 법이다. '황금밀면'을 가보고 의외의 발견을 떠올렸다.

가게에 들어서니 벽에 붙은 메뉴판 글씨 크기가 웬만한 가게 간판 작은 글씨만 하다. 밀면·비빔면·만두, 주메뉴는 이렇게 딱 3가지다. 9월로 접어들며 플래카드로 만들어 붙인 육개장과 육칼국수는 밀면 비수기에 대비한 성격이 강했다. 메뉴판 복잡한 집 치고 제대로 된 음식 내놓는 집 없다는 것을 웬만한 사람은 경험으로 안다. 그런 점에서 일단 신뢰가 갔다.

석쇠에 구운 돼지, 면과 싸 먹으면 '든든'
온육수는 한우사골로, 냉육수는 한약재 더해
비빔밀면에 넣은 냉육수, 해장에 좋아


자리에 앉으니 뽀얀 사골 국물 육수가 먼저 나왔다. 소 사골을 제대로 우려 진하고 깊은 맛을 내면서, 끝 맛은 칼칼했다. 냉면이든 밀면이든, 먼저 육수를 먹어 보면 그 집 맛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다 마신 육수 컵에 후춧가루도 남지 않았고, 입안에도 조미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분명 내공 있다.
밀면을 주문하면 함께 나오는 석쇠 돼지고기 구이를 밀면과 함께 집어 먹으면 속도 든든하고, 새콤한 양념과 고기 불맛이 동시에 느껴진다.
잠시 후 주문한 비빔밀면이 나왔다. 석쇠에 구운 돼지고기를 따뜻하게 먹을 수 있도록 촛불 위에 얹어줬다. 고기는 근기 약한 밀면을 보완해주려고 기본으로 나온다. 언젠가 냉면에 숯불구이 고기를 싸 먹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비빔면 양념장은 검붉었다. 이영근 대표는 "국내산 고춧가루와 갖은 과일로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고 했다. 양념 속에는 오돌토돌 씹는 맛이 일품인 간자미가 들어갔다.

고기를 면과 함께 둘둘 말아 한 입 먹었다. 고기는 불 냄새를 풍겼고, 면은 매콤했다. 간자미는 가오리보다 부드럽게 씹혔다. 젓가락을 놀릴수록 매콤한 맛이 더해지며 저절로 육수를 불렀다. 이 대표는 냉육수를 넣어 비벼 보라고 한 대접 갖다 줬다. 수정과처럼 맑은 갈색이 도는 냉육수를 약간 부어 비비니 마치 물비빔면처럼 육수가 자작한 상태가 됐다. 붓고 남은 냉육수는 달콤했다. 이 국물을 해장용으로 마시는 손님도 있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비빔면을 먹을 때 냉육수와 함께 비빌 것을 강력 추천한다. 매콤한 맛이 잦아들고 촉촉한 면발에선 훨씬 풍부한 맛이 난다. 그러잖아도 이 대표는 내년쯤 물비빔면을 내놓을 생각이라고 했다.

온육수는 한우 사골만 우려 깊은 맛을 내지만, 냉육수는 여기에 한약재와 간장을 더해 원액을 1년 전에 만들어 둔다. 이 냉육수가 그대로 물밀면 국물로 쓰인다.
수영동에서 낙지와 생주꾸미 장사를 10년간 했다는 이 대표는 디자이너 출신이다. 지금은 사라진 유나백화점이 그의 직장이었다. 수도권 대형 유통자본의 공세 속에 향토 백화점은 사라졌으나, 그는 지역을 대표하는 밀면을 가성비 높은 고품질 메뉴로 승격시켰다. 자못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밀면 5500원, 비빔면 6500원, 곱빼기 1000원 추가, 불고기 추가 8000원, 만두 4000원, 육개장·육칼국수 8000원.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 부산 부산진구 중앙대로 625(범천동). 051-918-2225. 글·사진=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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