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맛집] 보리밥의 유혹

입력 : 2017-11-15 19:13:57 수정 : 2017-11-16 00:02:08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발그레한 고추장 속에는 보이지 않는 짭짤한 강된장도 숨어 있다. 안동찰보리밥을 비비면 아삭한 나물과 구수한 보리밥이 손수 담근 장맛과 어우러지고, 반찬도 정갈하다.

길 위에 누운 낙엽이 드문드문 차가 지날 때마다 하늘로 잠시 떠올라 흩날리다 이내 추락한다. 겨울을 나려 잎을 떨어뜨린 나무도 몸을 가볍게 했고, 떨어진 잎도 한없이 가볍다. 부유하는 낙엽을 보며 문득 보리밥이 떠올랐다. 겨울을 준비하는 자연을 보며 인간이 뭔가 배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우고 보강할 때가 있으면 때론 비우고 힘을 빼야 하지 않을까. 보리밥과, 함께 먹는 나물은 소화가 잘 되고 칼로리도 상대적으로 낮다. 강함과 약함, 채움과 비움을 조화시키는 음식, 이만하면 이 가을에 어울리는 밥 한 끼 아닐까?

'○○○이 거기서 거기지. 뭐 별다른 데가 있겠냐?' 사람들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저렴한 음식은 다소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보리밥도 그런 저평가의 대상 중 하나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겉으로는 쉽고 저렴한 음식일지라도 제대로 만들어내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안동찰보리밥

찰보리밥·쌀밥 정식 두 가지 메뉴
갖은 나물과 보리밥 '기막힌 조화'
싱싱한 재료로 반찬 새벽마다 조리


기장에 있는 작은 가게 '안동찰보리밥'을 다녀온 뒤 깨달았다. 일단 먹는 당시 맛도 맛이지만, 만드는 이의 정성과 노력을 알고 나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을.

우선 안동찰보리밥에 가면 메뉴는 찰보리밥과 쌀밥 정식 딱 두 가지인데, 쌀밥과 보리밥을 섞어 주문할 수 있다. 잠시 후 밥에 비벼 먹을 무채나물, 콩나물, 시금치를 비롯해 된장찌개에 강된장, 코다리찜, 미역무침, 취나물, 멸치볶음, 케일 쌈, 열무김치와 배추김치, 버섯볶음 등의 반찬이 가지런히 나왔다.

밥에 나물과 열무김치, 강된장, 고추장을 넣고 비볐다. 자극적인 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씹을수록 구수한 보리밥과 나물이 기막히게 어울렸다. 연두부가 넉넉하게 들어간 된장찌개도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 그대로였다. 반찬에서도 내공이 느껴졌다. 멸치볶음 하나만 해도 대가리와 내장을 일일이 따낸 뒤 고추장에 볶아 깔끔한 맛을 냈다. 재료 하나하나에서도 신선함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그릇을 비우다 제정신을 차리고 메뉴판이 붙어 있던 벽을 보니 바로 옆에 '안동찰보리밥 이력서'라는 알림판이 있다. 일본 오사카 그랜드호텔, 부산의 코모도호텔, 동래관광호텔, 파라곤관광호텔 등 호텔 한식 조리사 근무경력이 화려한 데다 옛 아람마트와 성우하이텍 직원식당까지 운영한 것으로 돼 있다. 아래엔 1996년 세계관광의날 기념식장에서 상패와 꽃다발을 든 한 여성 사진이 있다. 바로 주방과 식탁을 분주히 오가는 박경하 대표의 20년 전 모습이었다. 무슨 사진이냐 물으니 "부산시관광협회에서 그날 저한테 조리사 부문 대상을 줬습니다" 한다. 음식에서 느껴진 내공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었다.
안동찰보리밥 박경하 대표
맛은 실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일광면에 사는 박 대표는 매일 오전 3시에 일어나 가게에 와서는 3시 40분부터 그날 밥상에 올릴 반찬을 만든다. 씻고 다듬고 썰고 데치고 무치고 끓이고 볶고….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가느라 가게를 쉬는 박 대표에게 어쩌면 매일 새벽 홀로 음식을 만드는 시간은 다른 교인들의 새벽 기도와 다를 바 없는 성스러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을 만드는 틈틈이 박 대표는 좌천, 월내, 남창 등 시장에 가서 장을 본다. 기장에 터를 잡은 지 15년이 되니 이제 싱싱하고 좋은 재료를 가져오는 상인들과 거래선이 확실해졌다.

언제부턴가 박 대표는 '기장의 장금이'라 불린다. 음식 하나에 성심을 다하던 드라마 주인공과 묘하게 어울리는 캐릭터다.

큰 직원 식당을 경영하다 왜 이 작은 식당을 차렸는지 물었더니 그는 "제 인생에 이 보리밥집이 마지막 식당"이라고 했다. 근 30년 주방을 떠나지 못해 몸 이곳저곳에서 경고음이 들리는데 욕심 부려 무엇하겠느냐는 얘기였다. 보리밥과 기막히게 어울리는 생각 아닌가.

안동찰보리밥·쌀밥정식 각 6500원(2인 이상 주문 가능), 1인 주문 시 7500원(오후 1시 이후). 영업시간 오전 11시 30분~오후 9시(12~3월은 오후 8시). 일요일 휴무. 부산 기장군 기장읍 차성남로 58(대라리). 051-723-1905.

명주네 보쌈
명주네 보쌈은 큰 밥상이 가득 찰 정도로 반찬이 다양하게 나온다.
부산대 부산외대 부산가톨릭대. 장전동은 대학 밀집 지역이다.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에게 알맞은 밥집 술집이 많다. 2009년 부산대 북문 아래 장전역 인근 원룸촌에 탁자 5개를 놓고 문을 연 가게가 '명주네 보리밥'이었다. 구제금융 위기가 오기 전부터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은 김명주 대표가 처음 차린 가게였다.

"주변에 보리밥집이 없더라고요. 원래 다양한 나물 반찬에 밥을 비벼 먹을 수 있는 시골밥상을 좋아하는데다, 공간도 좁고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필요하겠다 싶어 보리밥을 하게 됐죠." 좋아하는 음식을 신나게 만들어서였을까, 김 대표의 명주네 보리밥은 주변 대학생들과 교직원,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고, 지난해 4월 기존 가게보다 배 이상 넓고 쾌적한 현재 위치로 가게를 옮겼다. 옮기면서 가게 이름도 '명주네 보쌈'으로 바꿨다.

가게 넓혀 '명주네 보리밥'서 개명
나물 5가지·반찬 15종 밥상 푸짐
보쌈·눈볼대구이 등 균형 잡힌 식단


오전 9시가 되면 서빙 담당 직원 1명이 출근하고 큰 딸도 일을 돕지만, 반찬 만드는 일은 온전히 김 대표 혼자 감당한다. 오전 5시만 되면 일어나 재료 준비와 손질, 조리를 한다. 
명주네 보쌈 김명주 대표
"처음부터 그렇게 하다보니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없더라고요." 김 대표의 말을 듣고 보리밥과 보쌈정식을 1인분씩 주문해 밥상을 받아보니 이해가 간다. 밥에 비비라고 내놓는 나물만 5가지에다 반찬이 15종에 이른다. 말 그대로 푸짐한 시골밥상이다. 이 많은 반찬 맛을 어떻게 분담해서 균일하게 맞출 것인가.

나물을 보리밥 대접에 붓고 고추장과 된장 국물을 섞어 비벼 먹었다. 간간히 보쌈과 달걀 프라이, 눈볼대(빨간고기) 구이도 집어 먹으니 속도 든든하고 균형이 잡힌 식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을 알아보고 단골로 찾아오는 손님들 보고 장사하는 거죠. 일부러 신문에 낼 것까진 없는데…." 겸연쩍게 웃는 김 대표의 표정에 겸손이 묻어난다.

김 대표는 품질 좋은 식재료를 대형마트에서 저렴하게 일괄 납품받고, 더 필요할 때는 반여농산물시장에서 구매한다. 집에 냉장고가 15대나 될 정도로 김 대표는 재료 욕심도 꽤 큰 사람이다.

자영업자 80%가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누구나 쉽게 생각하는 것이 밥집이라지만, 작은 가게를 키워가는 밑바탕에는 반드시 숨은 노력과 정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준 집이 명주네 보쌈이었다.
보리밥정식 7000원, 보쌈정식·게장정식·양푼이김치찌개 각 8000원, 보쌈 3만 원(대)·2만 5000원(중).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9시. 2·4째 일요일 휴무. 부산 금정구 금정로119번길 16(장전동). 051-512-2093.

글·사진=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

실시간 핫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