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정치비화 60년] ① 여성 정치의 시대를 열다 박순천

입력 : 2011-01-01 09:44:00 수정 : 2011-03-21 1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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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 급한데 암탉 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

부산 기장 출신으로 우리나라 여성 정치계의 1인자인 박순천 여사가 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부산일보DB

여기 한 여성 정치인이 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던 시절, "오죽 사내들이 못났으면 암탉이 나와서 이렇게 울어 대야 하냐"며 가부장적 제도에 분연히 맞섰던 여인. 한 집안의 아내로서 보다, 정치인으로서 더 알려진 여인.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내도록 독려했다는 의혹 때문에 '친일'의 오점을 남긴 여인. 바로 대한민국 여성 정치계의 1인자 박순천 여사이다.

박 여사 처럼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여성 정치인은 없다. 일제 강점기엔 항일운동을 했고, 8·15 광복 직후엔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부인신문'을 창간하는 등 여성 운동을 주도했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5번이나 국회의원을 지냈다.

"사내들이 오죽 못났으면 …"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 여성운동
광복 후 5선 국회의원, 야당 당수
친일 행적 논란 휩싸이기도

특히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생각하기도 힘든 시절에 그는 당당히 야당 최고위원과 당수를 지내기도 했다.

'부산 정치 비화 60년'을 기획한 부산일보가 첫번째 인물로 박순천을 지목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순천은 1898년 9월 10일 부산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련(命連)이다.

당시 아버지 박재형은 소 2마리와 당나귀 4마리를 키울 정도의 부자였다고 한다. 박재형은 무남독녀 외동딸을 무릎에 앉혀 밥을 먹일 정도로 사랑을 쏟았다. 박순천은 12살때 그런 아버지가 기장읍내에 나갔다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리는 모욕을 당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항일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박순천은 동래여고의 전신인 일신여학교를 다녔다. 박재형은 순천이 일신학교를 다닐때 기장 대변에서 학교까지 당나귀를 태워 등하교 시켰다고 한다.

박순천은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됐다. 당시 일본인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자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해 싸우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과 연결되어 마산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혀 1주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이때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을 사용하면서 이후 '박순천'으로 세인의 입에 굳어졌다.

그해 가을 기녀로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동경 요시오카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을 못 다니고 3·1운동 때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어 마산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

박순천은 1924년 12월 24일 서울 무교동 태화관에서 수감 당시 자신을 자주 면회와서 알게된 변희용과 결혼했다. 변희용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인물.

'부인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소설가 최태응은 "(변희용이) 집을 팔아 (박순천의)선거비용에 보탰다"고 말했다. 변희용의 아들 변준오에 이어 서울에서 음식점 '월선옥'을 운영하는 박순천의 친척 임질임(63)씨는 "대학총장 하면서 받은 월급은 외상값을 갚는데 다 썼고, 돈이 없어서 자식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박순천은 결혼후 시댁인 경북 고령군으로 건너가 농사일을 하면서 마을의 조산부와 대서소를 경영하다 1939년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여성운동가 황신덕과 함께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경성가정의숙 부교장이었던 박순천은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제의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설명이다. 공태도 기장향토문화연구소장도 "당시 교장이 시키니까 부교장이었던 박순천이 따라 한 것이다. 문교부 지침에 따라 정신대로 보낸 것이다"며 "위안부인줄 알았다면 박순천이 보냈겠나"라고 주장했다.

박순천은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해 '부인신문' 사장,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950년 2대 국회의원(서울 종로)에 당선된 뒤 부산(2번)과 서울(1번), 전국구(1번) 등 모두 5번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63년 2월 해금됐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그는 장면·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을 재건해 총재에 추대됐다. 1965년에는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당수가 됐다.

고령으로 정계를 은퇴한 뒤 1972년 경기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으로 여성교육에 여생을 바치면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85세에 세상을 떠났다.

박순천은 국회에서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남성 의원들의 인신공격에 "나랏일이 급한데 암탉 수닭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거리니 길러서 쓰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맞받아칠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실제로 그는 여성을 위한 입법활동에도 앞장서 남성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의 생리휴가 및 60일 산후휴가 등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하는 '박순천 법'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 2003년 학술논문집에 '한 여성정치가의 경우-박순천 의원'을 발표했던 황영주 부산외대 교수는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그사람은 치마만 입었지 남자나 마찬가지였어. 열 남자가 감당하지 못할 걸"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황 교수는 박순천이 정치에서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고, 일본에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독립 및 건국운동과 반독재 투쟁에서 현실에 대한 변혁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여성 정치지도자'로서의 특징을 두루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반면 신라대 이송희 교수는 "박순천은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이다"면서도 "정치가로 부상한 이후에는 여성을 위해 일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다.

진보 언론인 송건호는 박순천이 박정희 정권 말기에 변절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권기택 기자 kt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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