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고 상큼하게… 노란 봄꽃 같은 밥상 받으세요

입력 : 2012-03-29 15:49:00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봄의 맛을 찾아서

입이 텁텁하고 거칠하다. 그러하니 먹고 싶은 생각이 좀체 일지 않는다. 봄을 타는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겨우내 무뎌진 혀의 미각부터 소생시킬 일이다. 먹어야 힘이 나는 법! 미각을 자극하는, 그러나 강하지 않은, 입안을 봄으로 환하게 비춰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봄을 봄답게 해 주는 그 무엇!

# 봄 기운 가득 품은 녹차 향 은은한 보쌈!

무슨 보쌈이, 입에 들어가자 스르르 풀어진다. 뭔가 씹히는 맛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탕처럼 녹기야 하겠느냐만, 그만큼 부드럽다는 이야기다. 부드러운데, 목 넘김 뒤 은은하게 남는 향이 있다. 녹차 향이다.

부산 중부경찰서 인근에 있는 음식점 '평사리 가는 길'(051-441-9571·부산 중구 중앙동 4가 60의 1). 녹차음식 전문점이다. 같은 이름의 가게가 부산을 포함, 전국에 여럿 있는데 이곳이 본점이다. 그나저나 녹차음식?

박경리의 소설 '토지'로 유명한 경남 하동의 평사리는 차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 집 주인 강정진 씨는 그곳 평사리에 삼대째 내려오는 1만여 평 규모의 차밭을 갖고 있다. 거기서 나는 차를 분말 형태로 가공해 각종 음식에 사용하는 것이다.

강 씨에 따르면 녹차는 봄기운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 기운을 차로 끓여 마시면 제 효능을 다 얻지 못한다. 우려내고 남은 찻잎은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과정을 거쳐 음식으로 만들어 먹으면 그 기운을 100% 흡수할 수 있다. 

강 씨가 가장 자랑하고, 봄에 먹으면 좋다고 권하는 게 녹차보쌈이다. 보쌈으로 쓰이는 수육으로는 돼지고기도 되고 오리고기, 닭고기도 된다. 수육은 녹차가루가 들어간 물로 삶는다. 그래서 푸른 기운이 돈다. 녹차로 인해 고기의 각종 나쁜 냄새와 콜레스테롤, 느끼한 맛, 기름기 따위가 제거된다. 대신 녹차의 폴리페놀이라는 성분 탓에 맛과 육질은 부드러워진다.

그런 수육을 이 집에선 특제 녹차 소스를 찍어 먹는다. 녹차 진액을 뽑아 100일 숙성시킨 소스. 향은 은은한데 새콤한 맛이 난다. 소스에 찍은 수육을 상추나 깻잎으로 싸먹어도 되지만, 별도의 된장 소스를 바른 콩잎에 싸서 먹으면 특별한 맛이 된다. 콩잎의 쌉싸름함, 된장의 짭조름함, 수육의 부드럽고 향긋함, 녹차 소스의 새콤함이 어우러진다.

녹차보쌈을 시키면 함께 나오는 음식도 봄기운이 물씬 풍긴다. 김밥이 특이하다. 적상추를 비롯해 파프리카, 계란 등이 들어간다. 김밥 속 밥은 녹찻물로 지은 터라 연녹색이다. 사각사각 씹힌다. 밥이 아니라 아예 채소쌈이다. 연두빛의 녹차 밀전병, 분홍색 두부 무스, 유자청 소스 올린 노란 가래떡…. 빛깔부터 화려한 봄이다. 녹차보쌈 대 4만 원, 중 3만 원. 일요일 휴무.


# 땅끝 찬바람 견뎌낸 배추로 만든 묵은지!

묵은지전문점 '나들목'의 묵은지찜. 땅 속에서 3년간 숙성된 묵은지의 깊은 맛이 사라진 입맛을 되살린다.
흐물흐물하게 뭉그러진 묵은지를 하도 자주 봤던 터라 은근히 놀랐다. 묵은지, 그것도 푹 찐 찜 속 묵은지의 육질(?)이 제법 탄력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가능한가 의아해했는데, 답은 해남의 찬바람을 견뎌낸 배추라는 데 있었다.

'나들목'(051-611-1999·부산 남구 대연1동 875의 13). 부산도시철도 2호선 대연역 1번 출구에서 오른쪽 골목길에 들어서서 유엔기념공원 방향으로 5분쯤 걸어가다 보면 눈에 띈다. '묵은지 요리 전문점'이라 돼 있다.

주인은 김미수(41) 씨. 그가 석 달에 한 번씩 묵은지를 가져오는 곳이 있다. 바로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다시 배를 타고 40여 분을 가야 나오는 섬 노화도다. 바람 거센 이곳에 김 씨의 시누이가 기르는 배추가 있다. 김 씨는 그 배추로 직접 김치를 담가 땅속에 묵혀 두었던 것들 중에서 3년 치 된 것들을 골라 오는 것이다.

"여기 배추로 해 보면, 해 봤거든요, 묵은지가 제대로 안돼요. 해남 배추는 눈을 맞고 자란 월동 배추예요. 배추가 그만큼 단련이 돼 있어. 그 배추로 김치 담그면 육질이 엄청 단단해요. 얼마나 단단하냐면, 1년 지났어도 쓰고 질겨요."

딱 3년 묵은 것을 쓰는데, 그보다 묵힌 기간이 짧으면 맛이 덜 익고, 더 길면 흐물해져버리더란다. 경험에서, 3년짜리 묵은지가 가장 좋은 맛, 깊은 맛이 난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여하튼 그런 묵은지로 만든 찜은 의외로 가볍고 순한 맛이다. 약간은 밋밋하다 할 정도? 희한한 건 그럼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맛이라는 것. 김 씨는 강한 자극은 안 주는 대신 은근한 당김이 있는 맛을 추구한다 했다.

찜에는 묵은 통김치와 함께 삼겹살 수육과 호박, 버섯 따위가 들어가는데, 김 씨는 먹는 법이 따로 있다 했다. 먼저 묵은지를 제일 밑에 깔고 그 위에 고기 한 점 올리고, 그 위에 호박을 올린 다음 싸서 먹으란다. 시큼함, 부드럽고 달착지근함이 잘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단, 호박이 뜨거우니 데지 않도록 조심하며 먹을 것!

묵은지로는 찜 외에 전골, 김치찌개도 한다. 김 씨는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메뉴"라 했다. 자신 있다는 이야기다. 둘째·넷째 월요일은 휴무. 김치찜 2만 원.


# 와사삭, 봄이 씹히는 미나리에 삼겹살!

노릇하게 잘 구운 삼겹살을 연둣빛 미나리 줄기로 한 번, 두 번, 세 번 돌려 싼다. 삼겹살의 고소한 냄새가 미나리의 상큼한 향에 어울려 피어오른다. 입에는 침이 고인다. 그대로 한 입! 와사삭! 서늘한 미나리가, 봄이 먼저 씹힌다. 이어 뜨거운 삼겹살의 쫄깃거림. 봄 햇살 아래 마음은 더할 수 없이 포근해진다.

이즈음 한재미나리는 없어서 못 판다. 경북 청도 한재골에는 미나리 사러 오는 이들이 꽤 있으나 마치 제 돈 주고 구걸하는 모양새다. 그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재골에는 미나리와 고기를 파는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돼지고기를 구워 한재미나리에 싸먹으면, 그 향과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봄 미나리를 즐기려면 그런 식당을 이용해도 되지만 비닐하우스 같은 곳에 생산 농민들이 허름하게 차려 놓은 장소를 이용해도 된다. 미나리 팔면서, 불판과 가스 등 고기 구울 장비를 5천 원 정도 받고 빌려 준다. 고기와 다른 재료를 직접 준비해 가서 미나리만 현지서 사서 즐기면 되는 것이다. 한재미나리는 5월까지 수확된다.

많은 한재미나리 농장 가운데 우연히 들른 최윤환 씨 농장(010-4657-4556·경북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 주인이 젊다. 스물아홉 살이다. 안주인은 아예 앳돼 보인다. 김단비 씨. 이제 스물두 살이란다. 둘은 젊은 귀농 부부다.

상큼한 한재미나리
최 씨는 대구가 고향으로 서울에서 농산물 유통업체에서 일했다. 거기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있던 김 씨를 만났다. 둘은 눈이 맞았고 연인이 됐으나, 최 씨가 미나리 농사 짓는 어머니 돕겠다며 청도로 내려와 버렸다. 떨어짐을 못 견뎌 한 김 씨는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청도에 순전히 남자 하나 보고 내려와 버렸다.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아직 식은 올리지 못했다. 자리 좀 잡히고 날 좋은 때 골라 올리겠단다.

최 씨는 올해 미나리가 첫 수확이다. 직장 생활 하며 모아뒀던 돈을 미나리에 다 쏟아부었다. 식 올리고 못 올리고는 올해 미나리 성패에 달린 것이다.

최 씨에게 한재미나리가 왜 좋은가 물었다. "한재를 둘러싼 화악산 하고 청도 남산 하고 철마산에서 나오는 미네랄이 풍부한 지하수, 토질이 마사토와 자갈이 대부분이라 배수가 잘돼 흙내와 잡내가 없고, 겨울잠 재우고 첫 순 나오는 것만 수확하기 때문에 때깔 좋고 마디가 굵고…." 그 나름대로 공부 꽤 하고 있는 것이다

. 글·사진=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