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현호 선상 살인' 전말] 무술 유단자 항해사 침착함, 더 큰 피해 막았다

입력 : 2016-07-04 23:01:35 수정 : 2016-07-06 11: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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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 망망대해에서 조업 중이던 원양어선 '광현 803호'에서 일어난 칼부림 참극이 막을 내린 건 항해사 이 모(50) 씨의 남다른 기지와 침착함 덕분이었다.

지난달 19일 오후 6시 45분 선실에서 쉬고 있던 이 씨에게 베트남인 선원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캡틴 산타마리아!"라고 외쳤다. '산타마리아'는 선원들 사이에서 사람이 죽거나 물건이 파손됐을 때 쓰는 용어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한 이 씨는 조타실로 뛰어갔고, 목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선장 양 모(43) 씨를 발견했다. 양 씨는 5분 전, 앞서 회식 도중 다툼을 벌였던 V(32) 씨와 B(32) 씨가 휘두른 흉기에 당한 뒤였다.

선장 숨진 조타실서
범인들과 일촉즉발 대치
흉기 떨쳐내고 상황 종료 뒤
범인 다독이며 상처 치료
안전하게 귀항 이끌어


선장 목에 붕대를 갖다대며 상황을 살피던 이 씨 앞에 온 몸이 피범벅이 된 V 씨가 나타났다. 오른손에 흉기를 든 V 씨는 왼손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보이며 이 씨를 위협했다. 이 씨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라"며 한 걸음씩 V 씨에게 다가갔고, 재빨리 왼손을 움직여 흉기를 든 V 씨 오른손을 낚아챘다. 흉기는 갑판 상단으로 날아갔고, 이 씨는 V 씨 발을 걸어 넘어뜨려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이번엔 B 씨가 뒤에서 이 씨 목을 팔로 감으며 달려들었다. B 씨는 V 씨와 함께 선장을 살해한 뒤 선실에서 잠을 자던 기관장 강 모(42) 씨마저 살해하고 다시 돌아오던 길이었다. B 씨는 앞서 기관장을 살해한 후 하나뿐인 흉기를 V 씨에게 넘겼기 때문에 흉기를 들고 있지는 않았다. 이 씨는 당황하지 않고 B 씨의 팔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이후 펼쳐진 일촉즉발의 2 대 1 대치 상황. 하지만 흉기를 잃은 B 씨와 V 씨는 태권도 4단, 합기도 2단의 남다른 무술실력을 지닌 이 씨에게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르고, 갑자기 V 씨가 피 묻은 두 손으로 이 씨 얼굴을 쓸어내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짓을 알아차린 참회의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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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대신 두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그리고 범행 과정에서 다친 상처를 치료해 주는 등 이들을 다독여 가며 선장과 기관장을 잃은 배를 안전하게 세이셸로 몰고 왔다. 부산해양경비안전서 관계자는 "V 씨가 울음을 터뜨린 게 극한으로 치닫던 이번 사건이 막을 내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며 "남다른 기지와 침착함으로 더 큰 피해를 막은 항해사 이 씨에 대한 포상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부산해경의 조사 결과 피의자 B 씨와 V 씨는 서로 친인척 사이로, 흉기를 직접 휘두른 B 씨가 모든 범행을 덮어쓰기로 사후 모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해경 조사에서 B 씨와 달리 V 씨는 줄곧 범행을 부인해왔다. 하지만 해경은 V 씨 손에 남겨진 상처를 집중 추궁해 범행에 가담하는 과정에서 B 씨가 휘두른 흉기에 부상당한 사실을 밝혀내고, V 씨의 자백을 받아 냈다.

이번 선상 살인은 회식 도중 술에 취한 B씨와 V 씨가 조롱섞인 말투로 평소 감정이 있던 선장 양 씨와 기관장 강 씨에게 대들면서 몸싸움으로 이어진 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V 씨에게 뺨을 맞은 양 씨가 베트남인 선원들을 전원 조타실로 소집했고, 강제 하선을 두려워한 B 씨와 V 씨는 선장 살해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부산해경은 피의자들과 항해사 이 씨, 다른 선원과의 대질심문을 끝으로 수사를 마무리한 뒤, 광현 803호와 비슷한 규모의 어선을 빌려 국내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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