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민동 '라일라 카페'] 코끝에 맴도는 모로코의 향기

입력 : 2018-02-07 19:22:55 수정 : 2018-02-07 22:42:12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모로코식 찻집 '라일라 카페'의 테이블에 레몬버베나 차와 다양한 과자들이 차려져 있다.

'명멸하는 불빛 아래 자동차극장 뒷줄/'카사블랑카'를 보면서 난 사랑에 빠졌지/별빛에 빛나는 팝콘, 콜라는 캐비어, 샴페인이 됐지.(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 중)'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청춘들이 왜 그렇게 영화 '카사블랑카'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 '시간이 흐르면(As time goes by)'의 감미로운 선율 말고는 도무지 흥미를 붙이기 힘들었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영화의 낭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지금은 뜨거운 팬이 됐다.

모로코♡한국 국제커플 운영 카페
구석구석 곳곳 모로코 향기 넘쳐

디저트·차 문화 발달한 특성 살려
레몬버베나 등 26종 차 선봬

모로코식 빵 크랩, 잼·고기와 함께
프랑스식 케이크는 하루 3개 만

24년 전 뜻하지 않게 아프리카 모로코에 간 적이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수반과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총리가 진행하던 중동평화협상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화에 나오는 카사블랑카가 모로코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그때야 알게 됐다. 파리를 거쳐 간 에어프랑스 항공기가 도착한 도시가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행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가져간 카메라가 불량품이었던 탓에 제대로 된 사진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세 가지 추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먼저 카사블랑카 외곽에 있던 호텔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열린 야시장 풍경이다. 한 교민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모로코 왕자와 함께 마신 독특한 차의 향기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왕위 계승순위에서 한참 밀려 실망감에 빠져 있었다. 그 교민이 한 말도 여전히 생각난다. "영화 속 낭만적인 카사블랑카는 잊으세요. 현실에 그런 도시는 없답니다."

지난달 중순 이메일이 하나 들어왔다. 부산 동래구 낙민한일유앤아이아파트 상가에서 카페를 운영한다는 이동기 씨가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아내의 가족과 친척이 모로코와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저는)어설프게 모로코 스타일의 카페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한 번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마침 휴가를 떠나기 이틀 전이었다. 이 씨에게 "꼭 가겠다"는 답장을 보낸 뒤 비행기에 올랐다. 무슨 까닭에서였을까. 여행 기간 내내 24년 전 경험했던 모로코 카사블랑카, 라바트의 풍경과 잊지 못할 차 향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회사로 돌아온 다음 날 오전에 서둘러 낙민동으로 차를 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씨가 운영하는 찻집의 이름은 '라일라 카페'였다. 모로코 출신 부인의 이름인 라일라 분나지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씨 부부는 지난해 11월 라일라 카페를 열었다. 2015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지만, 처음 하는 일이어서 서툰 게 많아 개업이 많이 늦어졌다고 한다. 분나지 씨는 모로코에서 은행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이 씨를 만나 결혼했다.

찻집 실내장식은 첫눈에 보기에는 화려하거나 이국적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이 씨 부부가 차 달이기를 기다리는 동안 천천히 실내를 살폈다. 구석구석에 모로코 향기가 숨어있는 게 하나둘 보였다. 창 쪽에는 모로코 등불이 달려 있었다. 장식장에는 현지에서 가져온 여러 기념품이 놓여 있었다. 입구에는 차를 들고 가려는 고객들이 기다리는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테이블에는 모로코식 향로 세트와 찻잔 받침용 자수가, 의자에는 현지 풍 미니 카펫이 깔려있다. 찻집 주방 곳곳에는 다양한 병과 통이 있고, 그 안에는 이름 모를 차들이 담겨 있었다. 여행의 옛 추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로코는 기후대가 다양하다. 사막기후, 건조기후, 고산기후 등이 골고루 분포돼 다양한 식물과 꽃이 자라고, 차 종류도 그만큼 풍부하다. 장기간 프랑스 식민지로 있으면서 차와 케이크, 빵 제조기술을 배워 차 문화 수준이 상당하다고 한다.

이 씨는 라일라 카페에서 판매하는 모로코 차 종류가 적힌 메뉴판을 보여줬다. 시나몬, 석류껍질, 정향, 스타아니스, 레몬버베나, 갈랑갈, 세이지, 마조람, 카더몬, 마테 등 26가지에 이르렀다. 이 씨는 "모로코에 사는 아내의 가족과 프랑스에 사는 외삼촌, 이모가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모로코에 직접 건너가 각종 재료를 가져오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통주전자 '비라드'
분나지 씨가 레몬버베나와 6가지 연합 차를 가져왔다. 차는 '비라드'라고 불리는 모로코 전통 찻주전자에 담겨 있었다. 잔도 현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레몬버베나를 한 모금 마셔봤다. 상큼한 레몬 향 뒤에 낯설지만, 기분을 맑게 하는 허브 향기가 숨어 있었다. 6가지 연합 차는 리코리스, 갈랑갈, 스타아니스, 아니스, 시나몬, 캐러웨이를 섞은 차다. 설명하기 모호할 정도로 맛이 매우 독특했다.

이 씨는 "차마다 건강에 좋은 효능이 있다. 레몬버베나는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다. 정향은 위를 따뜻하게 해서 구토를 가라앉힌다. 갈랑갈은 술독 해소에 좋다"고 설명했다.
모로코식 과자
분나지 씨가 여러 접시를 차례로 들고 왔다. 초콜릿을 넣은 대추야자와 무화과, 프랑스·벨기에산 재료를 녹여 만든 초콜릿, 모로코식 빵인 '크랩' 등이었다. 라일라 카페에 손님들이 찾아와 차를 마실 경우 대추야자 등 한두 가지를 간식으로 대접한다고 한다.

크랩은 잼, 오일에 찍어 먹거나 소고기, 양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한다. 부부는 접시에 배·체리·복숭아·딸기·토마토 잼을 조금씩 골고루 담아 맛을 보여줬다. 또 크랩을 찍어 먹기 좋은 아르간 오일과 아몬드 가루를 갈아 섞은 아르간 오일도 가져왔다. 이런 오일을 '앰루'라고 부른다.
수제 초콜릿.
이 씨 부부는 차와 대추야자 등에 곁들여 카페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전통 향로를 가져다 테이블을 장식했다. 마치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궁전에서 차렸을 법한 독특한 아랍풍 분위기가 금세 만들어졌다. 스페인은 8세기 초 무렵부터 700여 년 동안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등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군대가 바다 너머 알 안달루시아로 건너간 곳이 바로 모로코 일대였다.

라일라 카페에서는 프랑스식 케이크도 만들어 판다. 초콜릿·치즈 케이크만 주문받아 하루에 3개만 만든다. 유화제나 화학 성분 재료를 일절 넣지 않는다는 게 이 씨 부부의 자랑이다.

이 씨는 "카페 창업을 위해 소상공인진흥공단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바리스타, 과일청, 제과, 효소 자격증 공부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큰 욕심은 없다. 아내와 상의해 하루 매출 12만 원을 목표로 잡았다. 다른 찻집보다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차를 제공한다. 부산 시민이 모로코, 프랑스 차를 즐기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라일라 카페' 주인인 이동기 씨와 부인 라일라 분나지 씨.
이 씨 부부와 인사를 나누고 라일라 카페를 나오려는데 레몬버베나 향기가 여전히 코에 배어 있었다. 병에서 일부러 꺼내 맡아본 정향의 짙은 냄새도 사라지지 않고 맴돌았다. 갑자기 영화 '카사블랑카'를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느껴졌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라일라카페/부산 동래구 온천천로 339번길 28(낙민동) 낙민한일유앤아이아파트 상가동 2층 209호. 010-4023-6788.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