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웠던 이와 막걸리 한잔 쭉 들이켜면 그것이 행복 아니겠소

입력 : 2012-08-30 06:27:02 수정 : 2012-08-30 14: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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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오거리 '해천'에서 하동 악양막걸리로 한 잔씩! 막걸리의 누룩 향기와 해산물 안주의 싱그러운 맛이 어우러지는 그 행복함이란!

바람이 소리도 없이 골목길을 훑고 지나가자, 후드득! 비가 흩뿌린다. 진작 그랬어야 할 것이었다. 해 질 때가 한참 남았는데도 세상은 미리 어둑해졌던 것이다. 막걸리가 당기고 사람이 그리워진다. 문득 떠오른 이, 최원준 시인. 술 좋아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맛 관련 글을 자주 쓰는 이다. 빗소리를 어떻게 견디고 있느냐고 하니 최 시인, 웃으며 말한다. "막걸리 한잔 해야지."

#1차='해천'…바다 냄새 물씬한 안주, 장난이 아니다!

"요 막걸리식초를 예전엔 우리 어머니들은 '내캉 살자' 식초라 그랬어. 먹다 남은 막걸리를 부뚜막에 놓아두고는 식초를 만들었는데 막걸리가 식초가 되려면 자주 흔들어줘야 되거든. 흔들면서 뭐라면, '내캉 살자 내캉 살자', 주문 외듯이 그런 거야."

부산 사하구 하단의 '해천'에서 갈치 회무침을 먹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비린내 전혀 없이 새큼하고 톡 쏘는 게 신기했던 터에, 주인 감영래(56) 씨는 막걸리식초로 만든다 그러자 최 시인이 그 말을 받은 것이다. 여하튼 갈치 회무침은 부산에선 쉽게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순태젓이라고, 갈치 내장으로 만든 젓갈도 때때로 낸다. 감 씨 고향이 경남 남해 미조항이라, 거기서 갈치를 가져온다.

'해천'에서 안주로 나오는 갈치 회무침을 상추에 싸먹는 모습.

막걸리식초도 고향의 것을 본뜬 것이다. 감 씨가 맛이나 보라며 권하는 식초를 반 숟갈 정도 입에 넣어 보니, 뚜렷이 설명 못할 기분 좋은 향이 화악 퍼진다. 감 씨는 막걸리에도 몇 방울 떨어뜨려 마셔 보라 했다. 그냥의 막걸리와는 맛이 완전히 달라졌다. 막걸리 특유의 텁텁함이 사라지고 뒷맛이 깔끔해졌다. 감 씨는 "이 막걸리식초가 멸치나 갈치 비늘에 있는 독성을 제거한다"고 했다.

이 집 막걸리 역시 부산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평사리막걸리'라고도 불리는 경남 하동의 '악양막걸리'다. 누룩 향이 솔솔 풍긴다. 감 씨는 물 타지 않은 원액 그대로 가져온다 했다. 그래서 알코올 도수가 시중의 다른 막걸리보다 2~3도 높다. 빨리 취한다. 하지만 빨리 깔끔하게 깬다.

갈치 회무침도 그렇지만 밴댕이젓, 열무김치, 취나물, 목이버섯 무침 등 나오는 안주들이 악양막걸리에 흥을 더한다. 농익거나 잘 삭은 그 안주들은 기실 안주라기보다는 반찬이라 해야 할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해천'은 막걸리집이 아니라 밥집이다. 갈치, 멸치 등 해산물을 비롯해 선어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다. 쌈밥도 잘한다. 다 안주인 김광선 씨의 손에서 나오는 맛깔이다.

반찬? 안주? 여하튼 그런 것이 매일 바뀐다. 전어도 잘 굽고, 운 좋을 때는 잘된 간장게장도 맛보게 된다. "매일 같은 안주는 재미 없지 않으냐?"는 감 씨다. 술 좋아하는 그는 가라앉힌 막걸리 웃물을 떠낸 청주를 권하기도 한다. 구수한 맛이 난다.

갈치 회무침 대 3만 원, 중 2만 원. 부산 사하구 하단2동 533의 5. 하단역 9번 출구, 본병원 건너편 골목 안쪽. 051-202-3888.


'옹기골' 주인 조경희 씨가 파전을 직접 뜯어주고 있다.
#2차='옹기골'…빗소리 맞춰 파전 뜯어 주는 입담 좋은 여주인


악양막걸리의 기분 좋은 취기가 살짝 가실 무렵 찾은 '옹기골'. 부산 서구 대신동의 꽃마을이라 불리는 엄광산 자락의 마을에 있다. 주로 산행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국수나 오리구이, 백숙 따위를 파는 집들 중 하나인데, 굳이 여기를 2차 자리로 찾은 것은 순전히 주인 조경희(51) 씨 때문이다.

딱, 여장부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풍채 당당한 글래머다. 바싹 당겨 올린 머리에선 만만치 않은 강인함이 묻어난다. 그가 농반 진반으로 자주 하는 말. "막걸리 처먹고 엉뚱한 짓하는 사람은 그대로 면상을 쌔려 버려야 돼." 빈말이 아니라 가끔 그러는 경우가 있다. 호불호가 분명해, 좋은 사람에겐 한정 없이 좋게 대하고 싫은 사람에겐 더할 수 없이 싫게 대한다. 그 말이 제법 위협(?)이 되는 것이, 젊었을 적 핸드볼 선수로 활동했던 그다. 손힘, 어깨힘이 보통이 아니다.

부산의 막걸리 브랜드 '생탁'에 우무채, 파전을 안주로 내 온다. 우무채는 아삭거리는 게 고소하다. 원래는 도토리묵과 섞어서 나오는데 마침 도토리묵이 다 떨어졌단다. 묵을 직접 만드느냐 물으니, 고개를 흔든다. 시장에서 사오는 것이란다. 등산객들 상대로 잠깐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인데 손 많이 가는 음식은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빗소리 들으며 막걸리 마시기 좋은 '옹기골'의 소박한 술상.

조 씨, 젓가락을 들어 직접 파전을 뜯어 준다. 그가 만든 파전이란 게 허여멀건해서 영 볼품없는데도 희한하게 맛이 좋다. 얼렁뚱땅 만든 것 같은데 달다. 원래 일 잘하는 사람이 뭐든 쉽게쉽게 하는 법이다.

'Y담'에도 능한 조 씨. 어떤 이는 그를 옹기골 옹녀라 부른다. 마당에 나무로 깎은 남근 조각이 여럿 우뚝 서 있다. "저것들 봐 손때가 타서 반들반들하지. 만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자기 것이나 만지지 저건 왜 만지나 몰라. 하하!"

막걸리가 몇 순배 돌면서 흥은 더욱 오르고 목소리는 한껏 높아진다. 마당 끝 벚나무가 꽤 크다.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진다. 그래서 이 집은 봄에 와야 제맛을 느낀다. 벚꽃이 흩날릴 때 그 아래서 한잔 걸치는 막걸리의 맛이란! 오늘은 벚꽃 대신 비다. 빗방울이 바람에 실려 비닐 창에 후드득 떨어진다. 평범할 뻔한 막걸리는 그 소리에 특별한 막걸리가 된다. 취중난만!

파전 4천 원, 우무채 4천 원. 부산 서구 서대신동3가 엄광산로 161의 1. 내원정사 가는 길목에 있는 꽃마을골프연습장 뒤편. 051-255-8264.
'옹기골'의 우무채 안주. 아삭아삭한 느낌이 좋다.


#3차='시골장터-해장국'…얼큰한 선지해장국, 쓰린 속을 달래다

부산 중구 영주동 코모도호텔 근처에 해장국집이 있었다. 해장국 맛이 깊고 24시간 문 열어 놓는 집이라 찾는 사람이 많았다. 주인이 김명덕(55) 씨였는데, 수 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모두 아깝다 여기는 터였다.

'시골장터-해장국'. 김 씨가 2년 전 새로 문을 연 집이다. 영주고가도로 아래 좁은 골목,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진 적산가옥에 차린 밥집이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오래 된 것이라 삐걱거린다. 밖으로 난 창을 통해 낙숫물이 보인다.
'시골장터-해장국'의 선짓국. 진하고 상쾌한 맛이 난다.
여기선 부산의 또 다른 막걸리 브랜드인 '산성막걸리'를 판다. 막걸리와 해장국을 달라 하니, 선짓국이 올라온다. 상에는 이런저런 반찬이 함께 오른다. 명태 껍질을 여러 채소와 무친 것, 바작바작 씹히는 게 특이한 맛이다. 쌉싸름한 정체 모를 나물 무침. 김 씨를 불러 물어보니 상추 무침이란다. 대 있는 상추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면 나물처럼 부드러워지고 쓴맛도 줄어든단다. 상추 겉절이와는 전혀 다르다. 남들은 버리는 대 있는 상추까지 반찬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 씨의 '애살'을 엿볼 수 있다.

귀한 것이 참죽나물로 만든 김치다. 완전히 익었다. "남편에게만 주는 것인데, 귀한 손님들이시라…"는 김 씨의 공치사가 밉지 않다. 선짓국 안 선지는 탄력이 있다. 진하고 상쾌한 맛이 난다. 선짓국은 먼저 선지를 푹 우려 깊은 맛을 뽑아낸 뒤 채소와 콩나물을 넣어서 다시 팔팔 끓여야 진하고 상쾌한 맛이 든다. 그런 선짓국에 약간은 뻑뻑하다 싶을 정도로 걸쭉한 산성막걸리는 잘 어울린다.

술잔이 오가는 걸 보고만 있던 김 씨, 자기에게도 한잔 달라고 한다. 죽 들이켜고 나선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내 고향이 경남 창원 상촌리였어. 시집을 갔는데, 시집이 부산 영도래. 그런데 가려면 배를 빌려야 한다는 거야. 아니 영도다리 있는데 무슨 배? 하이고, 알고 보니 영도가 아니라 가덕도였어. 너무 외진 촌이라 내가 시집 안올 줄 알았다나. 저 양반 나이도 속였어. 원래 나이대로라면 절대 결혼하면 안 되는 궁합이었던 거지. 위자료? 하하! 이미 때 늦은 걸 어쩌누…."

그런 푸념 아닌 푸념이 정겹다. 다 막걸리 때문이고, 비 때문이다.

선지해장국 5천 원. 부산 중구 대창동 2가 13의 7. 부산터널 아래 봉래초등학교 인근. 051-441-1913. 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사진=정종회 기자 j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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