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관심은 '어떻게 공존하며 살까'입니다”

입력 : 2024-08-01 13:48:48 수정 : 2024-08-01 1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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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가 페미에게 / 부산여성단체연합

20대부터 70대 여성들 모여
페미니즘으로 세대 연결 시도
결국은 어울려 사는 이야기로


2022년에 일어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서울 신당역 10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적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에 일어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1주기를 맞아 서울 신당역 10번 출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적고 있다. 연합뉴스

지하철에서 <페미가 페미에게>를 읽다 나도 모르게 표지를 가렸다. 누가 보면 어쩌나 싶어 스스로 눈치를 봤던 것 같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은 부산에 사는 20대 초반부터 70대까지의 여성들이 모여서 밥 먹고 나눈 이야기일 뿐이었다. 대체 뭐가 두려웠던 것일까. 하긴 이 책에 등장하는, 대화에 참가한 여성 모두가 끝까지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이걸 두고 어느 누구도 뭐라고 할 수 없다. “SNS에 페미라고 치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과 터무니없는 글들이 뜬다. 거기에 노출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압박이 된다”는 말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가 제시한 약 중에서 빨간약을 선택한다. 파란약을 먹으면 일상으로 되돌아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고, 빨간약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진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페미니즘에서도 ‘빨간약’이라는 용어가 통용된다. 이 책에는 빨간약을 먹고 ‘각성’한 여성들이 나온다. 이들에게는 사회에 존재하는 성차별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각성한 그날 이후로는 삶에 투쟁이 시작된다. 페미니즘을 알지 못했을 때가 더 편안해 보일 때도 있었다고 시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알고 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부산여성사회교육원, 부산여성의전화, 부산성폭력상담소, 부산여성회, 부산여성장애인연대, 부산한부모가족센터 등 부산에서 진보적인 여성운동을 표방하는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부산여성단체연합이 이들의 만남을 기획했다. 지역, 여성, NGO라는 열악한 조합인데 용케도 1999년부터 25년째 굳건하다.

이들이 모여서 대체 무슨 모의를 했는지 궁금해진다. 뜻밖에도 첫 번째 주제가 ‘무해한 대화’였다. 우선 이들은 규칙부터 정한다. 나이나 호구 조사, ‘내가 해 봐서 아는데(나도 알아)’는 소통에 방해가 되는 해로운(?) 말이다. 충조평판(충고·조언·평가·판단)도 금지다. 말을 제발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 다시 거론된 2001년 부산대에서 일어난 이른바 ‘월장 사건’은 지금 봐도 매우 상징적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대 여성웹진 월장이 ‘도마 위의 예비역’라는 제목으로 대학 내 권위적인 예비역 문화에 대해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일어났다. 부산대 안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었는데, 학교 밖으로 퍼 나르며 특히 고려대 예비역과 고려대 해병 전우회에서 난리가 났단다.

월장 측이 프리챌 월장 커뮤니티에서 토론을 실명으로 진행하자, 이들에 대한 인신공격·신상털이·성적 폭언이 퍼부어진다. 오프라인 토론회가 열렸지만 월장 반대측이 참가하지 않으며 사건은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만다. 남녀의 서로에 대한 혐오가 극심해진 지금의 혐오전쟁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부당한 일을 바로잡다 보니 자동으로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살아 보니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게 사람답게 산다는 말이나 다름없더라.” 60대 여성 B씨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 책의 제목에는 ‘페미’가 두 번이나 들어가지만, 꼭 페미니즘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20대, 30대 페미니스트들과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세계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조직을 만들고 단체 활동을 하라고 독려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각자 공존하면서 운동의 지평이 넓어지도록 묵묵히 지원하고, 이들이 손을 내밀 때가 되어야 뭘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50대 여성 C씨는 다른 세대와 어울려 사는 법을 말해 주었다.

“한창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을 때는 진짜 남성혐오였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공존하면서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을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많이 하고, 전략을 세우고 있다.” 20대 여성 D씨의 달라진 생각이 고맙다. 최고 연장자 70대 여성 E씨는 후배들에게 “먼저, 자신을 아끼고 성장시켜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생은 절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당부했다. 책에는 ‘두 개 중 하나가 없어도 된다면 온라인은 없어져도 되는 거다’라는 말도 나온다. 우린 진짜 중요한 걸 잊고 사는 게 아닐까. 부산여성단체연합 엮음/사계/212쪽/1만 5000원.


<페미가 페미에게> 표지. <페미가 페미에게>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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