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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민 대변한 질문이 “무례하다”는 용산의 무례한 인식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사과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혀달라는 〈부산일보〉 기자의 질문을 두고 대통령실이 “대통령에게 무례했다”는 입장을 내놨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은 19일 국회에서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마치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하듯 ‘뭘 잘못했는데’ 이런 태도는 시정해야 한다”고 불쾌한 심경을 드러냈다.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일이다. 기자가 온 국민을 대신해 정당한 질문을 던진 것인데도 이를 무례함으로 받아들인 대통령실의 대응에 말문이 막힐 뿐이다. 언론의 질문과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런 구시대적 인식이야말로 국민에 대한 무례요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7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와 기자회견은 국민 기대와 눈높이에 못 미쳤고 사과의 내용 역시 모호했다는 것이 주된 평가였다. 이날 〈부산일보〉 기자는 “국민들이 과연 대통령께서 무엇에 대해 사과했는지 어리둥절할 것 같다”며 사과에 대한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음직한 의문에 대해 해당 기자가 대신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후 이 발언은 국민들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돌직구 질문’ ‘사이다 질문’으로 세간의 큰 지지를 받았다. 회견 당시 윤 대통령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은 채 “팩트를 다퉈야 하겠냐”는 식의 책임 회피로 일관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통령실이 정당한 지적을 하는 언론에 대해 “무례하다”는 감정적 대응을 보인 것은 단순한 발언의 의미를 넘어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권력의 탈주를 견제하는 역할을 그 본연의 사명으로 한다. 그 대상이 대통령이든 누구든 의혹 제기에 성역이 없어야 함은 물론이다. 대통령실의 “무례” 운운은 그런 점에서 언론의 역할과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위험한 신호로 읽힌다. 특히 언론의 태도를 문제 삼아 ‘고쳐야 한다’고까지 지적한 것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언론을 통제해 권력의 잘못을 덮고 국민의 눈과 귀까지 막겠다는 의도는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권력에 대한 비판을 포기한 언론은 존재 이유가 없다. 비판 없이 치적만 홍보하는 공손한 언론만 있다면 그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언론을 권력의 동반자로 삼은 정권의 말로는 부패와 부정이다. 이번 대통령실의 반응은 기자회견을 직접 수행한 대통령 본인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일 터이다. 대통령실이든 대통령이든 아직도 구시대적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건 아닌지 냉철히 되돌아봐야 한다. 국민 눈높이로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민심과의 거리를 깨닫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나 통했던 이런 인식들은 더 이상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무례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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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세사기에 검찰 구형량보다 센 철퇴 내린 대법 판결
대법원이 부산에서 180억 원대 전세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최 모 씨에게 징역 15년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최 씨는 임차인들에게 임대차 보증금을 반환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데도 2020∼2022년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부산 수영구 오피스텔을 포함해 9개 건물에서 임대사업을 하면서 229명에게 전세보증금 180억 원을 받은 뒤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2022년 이후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한 대규모 전세사기범에 관한 대법원의 첫 유죄 확정판결이고, 경합범 가중까지 활용해 검찰이 구형한 징역 13년보다 더 센 법정최고형 철퇴를 내린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형이 너무 무겁고 부당하다”면서 1심 판결에 불복한 최 씨에 대해 “주된 책임은 자기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임대사업을 벌인 피고인에게 있다”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서민의 생명과 주거 등 삶 자체를 위협하는 악랄한 사기 범죄에 대한 경각심 차원에서도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 타인의 재산을 가로채고, 목숨까지 앗아가고도 반성하지 않는 범죄를 국가가 방치하면 법치 사회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법원 확정판결은 다른 전세사기 재판에도 주요 판례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민들의 전 재산을 강탈한 중대 범죄라는 점에서 향후 양형을 대폭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신혼부부와 사회 초년생 등 청년층이다. 정부가 인정한 전세사기 피해 사례에서도 20~30대가 70%를 웃돌았다고 한다. 한푼 두푼 어렵게 모은 돈을 일순간에 날린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은 피해자도 꽤 있다. 한창 미래를 꿈꿀 이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생각이나 능력조차 없으면서 사기 행각을 벌였으니, 결코 용서받지 못할 범죄다. 안타까운 점은 대법원 판결로 최고형이 확정됐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세사기를 당한 세입자들은 전 재산을 날리거나,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정부는 대법원의 최고형 확정판결과 함께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당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책을 실시해야 한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지원책은 쏟아졌지만, 삶이 나아진 게 없다고 하소연한다. 전세사기는 잘못된 주택공급 정책, 허술한 등기제 탓에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다. 정부와 정치권, 지자체는 피해자들이 조속히 보증금을 회수하고, 주거 불안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피해자 주거 안정 지원과 재산 보호는 정부의 당연한 책임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벼랑에 몰린 피해자들이 따뜻한 집에서 편하게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도록 다양한 구제 정책이 하루빨리 실행되기를 촉구한다. 전세사기로 눈물을 흘리는 청춘은 더 이상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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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취재가 시작되자
“배 째”를 외치며 그냥 버티는 이들이 있다. 배 째와 비슷한 종류로 “어쩌라고” “네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등이 있을 것 같다. 종종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난 이들은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정말 법은 멀리 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언론사에 제보를 하거나 커뮤니티에 글이라도 남긴다. 종종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언론사에서 취재를 시작하면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최근 서울로 1박 2일 워크숍을 떠난 강원도 정선군청 공무원 40명이 단체 예약을 해놓고 노쇼(예약 부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자영업자들의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노쇼를 당한 업주는 커뮤니티에 ‘정선군청에서 40명 단체 예약을 해놓고 예약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며 ‘녹음파일을 들려주니 그때서야 인정했다’고 글을 썼다. 이 업주는 피해보상을 받고자 정선군청에도 연락했으나 “보상은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취재가 시작되자’ 정선군청은 행사를 맡긴 위탁 업체 측의 실수로 인해 노쇼 사태가 일어났고 업주에게 최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절경이자 시민 휴식 공간인 이기대에 아이에스동서(주)가 고층 아파트 신축을 추진했다. 경관이 훼손된다는 우려에도 해당 관청인 남구청은 “법적 절차를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부산일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여론 악화와 부산 시민 반발, 시민 정서에 배치된다는 점에 부담을 느낀 아이에스동서는 아파트 건설 포기라는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사례들이 쌓이며 커뮤니티에는 ‘취재가 시작되자를 당해야겠네’와 같은 밈도 유행하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라는 말은 어디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취재가 시작되자’를 풀이하면 논란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결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던 이들이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거나 보도가 진행되어 사건이 공론화되자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때문에 배 째를 외치는 이들의 태세를 바꾸게 하는 마법의 단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커뮤니티에서는 게시글 1개보다 민원 1건이 낫고, 민원 1건보다 취재 1회가 문제 해결에 더 용이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취재가 시작되자’가 왜 마법의 단어가 됐냐를 두고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어떤 이슈가 터져 시끄러워지면 당사자만 손해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이 중요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취재를 당한다는 것 자체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취재가 시작되자’는 언론의 순기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의 언론 신뢰도는 낮은 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지난 6월 발표한 ‘2024 디지털뉴스보고서’ 조사 결과 ‘뉴스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한 한국인은 31%에 그쳤다. 한국이 처음 조사에 참여한 2016년(22%) 이후 성적에 비춰보면 지난해 28%보다도 3%포인트 높아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치긴 하다. 다만 조사국 평균 신뢰도(40%)보다 9%포인트 낮았고 아시아·태평양 11개 국가·지역 중에서는 최하점이었다.
언론의 힘은 ‘신뢰’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언론에 대해 혐오와 불신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밈은 언론사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 같은 코너를 신설한 언론사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커뮤니티에서 ‘취재가 시작되자 당해야겠네’라는 밈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여전히 취재의 힘을 믿어주시는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는 클릭 수만큼이나 PIS(Post Interaction Score) 지표가 중요하다. 이는 좋아요, 댓글, 공유 등을 지수로 합산한 수치로 쉽게 말해 사람들이 페이지 게시물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숫자다. 언론사로서는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전 같으면 부산일보로 전화가 온 숫자, 격려나 반론를 담은 편지의 숫자, 편집국을 찾아와 감사 인사나 고성을 지른 숫자 정도가 될 듯하다. 그래서 ‘취재가 시작되자’의 마법이 발휘된 기사는 늘 PIS 지표가 상위권이다. 독자들이 원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소위 먹히는 콘텐츠인 셈이다.
앞으로도 ‘취재가 시작되자’가 마법의 단어로 남기 위해서 언론사의 노력만큼이나 독자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접하는 부산일보의 콘텐츠에 댓글, 좋아요 등으로 콘텐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되어 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취재를 위해 많은 제보도 부탁드린다. 부산일보 제보 전화 051-461-4131, 또는 유튜브나 인스타 부산일보 채널은 ‘취재를 시작하기’ 위해 항상 열려있다. 장병진 디지털총괄부장 joyfu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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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국제아동도서전
중세 학문과 사상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볼로냐. 매년 봄이면 이곳은 동심의 세계로 변모한다. 전 세계에서 모인 그림책들이 전시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동도서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이다. 1964년 시작돼 올해로 61회째를 맞았다. 특히 세계적인 권위의 아동문학상인 안데르센상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자를 볼로냐도서전 기간 현장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아동문학 작가와 그림책 작가에게 꼭 방문하고 싶은 도서전으로 꼽힌다. 어느덧 세계 90여 개국 1000개 이상의 출판사, 5000여 명의 출판인이 참가해 아동도서 출판의 최신 정보를 교류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봄에 열린 도서전에는 한국 아동도서 전문 출판사 30여 곳이 참가했다. 한국 작가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볼로냐도서전이 선정하는 픽션과 논픽션 부분 상을 연이어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작가들의 이런 활약에 힘입어 도서전 내 한국관은 매년 한국 작가들의 그림책을 찾는 발길로 북적일 정도다.
국내 최초의 국제아동도서전인 제1회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오는 28일부터 나흘간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부산도서전은 볼로냐도서전을 모델로 하지만, 볼로냐전과 달리 전시장에 어린이들이 함께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저작권 거래와 독자들의 축제가 결합한 형식이다. 이번 도서전에는 16개국 193개 출판사가 참가해 도서 전시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도서전의 테마는 ‘라퓨타’로,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속 하늘에 떠 있는 상상의 나라를 의미한다. 어린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즐거운 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도서전에는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 수상 작가인 백희나를 비롯해 국내외 유명 작가들이 대거 북토크 연사로 참여한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아동문학은 연이은 해외문학상 수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차기 한류 열풍의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가 주목하는 그림책의 나라가 되었을 정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 작품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러한 기회를 발판 삼아 부산국제아동도서전이 한국의 우수한 아동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고 세계에 알리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영화,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 관련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온 부산의 저력을 믿는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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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선으로] 여자대학의 여자
여자대학이라는 말에는 지난 100년에 걸친 여성 고등교육의 역사가 묻어있다. 100년 전 일제 강점기 때는 여성에게 학교를 보낸다는 인식이 그리 굳건하지 않았고, 남녀 분리 교육은 그 자체로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까지 여성대학이 아니라 여자대학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 시절 여자고등보통학교(현 여자중·고등학교)와 오늘날 여자대학의 전신인 여자전문학교에서 그 말이 유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 여자대학의 커리큘럼은, 가정학 등 그 시절 여성이 배울 법하다 여겨진 것들로 종종 제한되기도 했다.
여자대학에 묻은 여성 공간의 뜻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변한다. 오늘날 여성 고등교육에서 여자대학이 갖는 여러 의미들 중 하나는, 여성들로 하여금 누군가의 배우자를 넘어 여성 자신의 삶을 그리도록 하는 데 있다. 여성이 다양한 진로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고, 여성이 누군가의 아내를 넘어 세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을 품게 만드는 것이 여자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마땅히 남녀공학에서도 행해져야 할 그러한 교육의 기능이 구태여 여자대학에서 추구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사회 속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지금도 여전히 남성과 연애하고 결혼하고 자식 낳는 것으로 강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여성 개인에게는 그 역할이 얼마간 행복한 일일 수 있지만, 인생의 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점쳐볼 20대에 그것이 제 삶의 전부인양 강제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제도적으로 주어지는 성 역할을 떠나, 4년이라도 여자대학에서 인생의 주체적인 꿈을 점쳐보는 일이 여성에게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여자대학의 성별 분리를 유의미하게 만든 것은 일차적으로 평생에 걸쳐 특정 방식으로 여성의 꿈을 다듬어온 사회다. 물론 그런 분리를 통해 어떤 의식이 성취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여성 개인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은 궁극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제약들로 이루어진다. 그럴 때는 그 제약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노력들이 이따금 필요하다. 앞선 예처럼 여자대학의 성별 분리를 운명이 아닌 전략적이고 일시적인 경계로 사고하여, 그 의미와 효용을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정의내리는 일이 그렇다.
여자대학 공학 전환 반대 시위에 여자대학 출신 한 트랜스젠더 여성이 연대했다. 인생에서 4년만이라도 남성에게 매력적인 존재로 ‘팔릴’ 신세를 면해보는 것은, 그 필요의 측면에서 시스젠더 여성에 비해 트랜스젠더 여성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다 할 수 없다. 여자대학을 낳은 것은 여성을 비롯한 누군가를 특정 역할과 공간에 집요하게 몰아넣는 제도적 이성애다. 여자대학을 비롯하여 거기에 저항하기 위한 거점은 많을수록 좋고, 그곳에서 바깥으로 향한 천 개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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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자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모습이 생생하다. 열광과 광기의 콜로세움, 역동적인 액션과 인물들 간의 들끓는 파토스까지 2000년 개봉한 ‘글래디에이터’는 놀라운 영화였다. 그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글래디에이터 Ⅱ’가 개봉했다. 1편에 이어 2편도 직접 연출한 감독 리들리 스콧은 전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고대 로마 시대를 완벽히 재현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글래디에이터’ 1편이 전쟁 영웅에서 노예로 전락한 ‘막시무스’가 황제 ‘코모두스’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로마와 자신의 명예를 찾는 여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편은 그로부터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시작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누마디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휘자 ‘하노’(폴 메스칼)는 정복자 로마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병사를 가진 로마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하노’는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온다. 고대 로마 시대로 단숨에 진입하는 이 오프닝은 ‘하노’에서 ‘루시우스’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 '글래디에이터 Ⅱ'
정국 혼란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웅
검투, 살라미스 해전 장면 인상적
하노는 어린 시절 ‘루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고귀한 존재였지만 황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마 바깥을 떠돌았다. 아내를 만나 누마디아 왕국에 정착했지만 노예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하노의 인생은 영웅의 일생과 닮아있다. 하노는 지금의 로마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로마가 아님을 눈치챈다. 로마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폭군 카라칼라·게타 쌍둥이 황제 통치 하에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검투사들의 주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하노’를 이용해 황권을 차지하고자 한다. 폭압적인 지도자로 사회가 안에서부터 무너질 때, 오히려 권력의 권위는 추락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닌 로마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이에게 권력을 계승하고자 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꿈꾸던 로마는 무너졌다. 권력을 잡은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뒤이은 쌍둥이 황제들 역시 시민들의 자유를 짓밟고 자신의 허영과 쾌락을 채우는데 바쁘다. 시민에게 자유가 없다면 로마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로 로마의 미래를 꿈꿨던 황제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질문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 고통받는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시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콜로세움이 중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욕망을 위해, 우매한 시민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콜로세움은 화려한 혈투를 제공하지만 정작 콜로세움은 시민을 각성시키고 영웅을 만들어내는 장이다. 콜로세움에서의 혈투 끝에 하노는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하며 비로소 로마의 꿈을 이룰 ‘루시우스’가 된다. 그 유명한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될 것인지 선언하는 말이다. 열광과 광기 사이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결국 무능력한 황제의 권위에 맞선다. 자유를 잃은 시민은 왕을 저버리고 광기 어린 폭도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실 ‘글래티에이터’ 2편의 서사는 진부한 면이 있다. 하지만 2세기 로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장과 마지막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치 당시 콜로세움 안에 있는 듯한 착시감이 들 정도다. “그 당시 로마의 냄새가 날 정도로 고증에 공을 들였다”는 노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영화를 보는 즉시 수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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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세대가 보내는 위기 신호
지하철을 타고 오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 안의 작은 기기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상당수가 시청하고 있는 것은 숏폼 형태의 짧은 영상이다. 15초 이내 영상들이 휙휙 지나가며 우리 시선을 끝없이 붙잡는다. 테크 기업들이 천문학적 비용을 투자해 자신들의 소셜미디어로 시선을 고정하도록 만든 마법의 알고리즘 덕분이다. 나부터가 훌륭한 실험 대상이었는데, 한동안 퇴근하고 집에 가면 부동자세로 침대에 누워 두세 시간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기 일쑤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친근하게까지 여겨지는 디지털 시대 일상의 풍경이 최근 읽은 책 때문인지 하나의 낯선 위기 신호로 다가온다. 몇 달 전 출간된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첫 세대인 이른바 Z세대의 정신적 위기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드러낸다. 담배와 술 중독성 못지않게 스마트폰 중독성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장시간에 걸친 스마트폰, SNS, 인터넷 사용이 아동과 청소년의 뇌와 정신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미국에서 우울증을 겪은 십대 비율이 2010년도 이후 남자아이는 161%가 증가했고, 우울증이 남자아이보다 3배 이상 높았던 여자아이의 경우 145%가 증가하여 수치가 더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응급실 방문 자해 환자도 2010년도 이후 여자아이는 188% 증가했고, 남자아이의 경우에도 48%가 증가했다. 저자는 디지털 세계로의 진입은 아직 신체 발달과 뇌 발달이 다 이루어지지 않은 십대 청소년들을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화성에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경고한다.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이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의 과소보호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현실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아이들을 과잉보호하면서 자율적 활동과 성장의 기회를 제약한다. 그러나 가상 세계에서는 아이들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테크 기업들은 아동과 청소년에게 심리적 트릭을 사용해 클릭을 계속하게 함으로써 자사의 제품에 열중하게 만든다. 이 시기에 뇌가 자극에 반응하면서 빠른 회로 변경이 일어나는데 아동·청소년들이 손쉽게 접하는 매체에는 소셜미디어, 비디오게임, 포르노 사이트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포르노랜드〉의 저자 게일 다인스 역시 오늘날 포르노를 처음 접하는 평균 연령은 고작 11세라고 전한 바 있다. 그는 아이들의 성적, 정서적, 인지적, 관계적 발달에 미칠 해로운 영향을 고려할 때 너무나 손쉽게 접하게 되는 하드코어 포르노는 디지털 시대의 공공보건 위기라고 정의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디지털 시대의 공공보건 위기의 결과를 이미 여러 차례 마주하였다. N번방 사건이 대표적이다. 가해자 중 10대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최근 딥페이크 성범죄에서 그 비중은 더욱 커졌다. 생성형 AI 기술을 이용한 성 착취물이 제작되고 SNS 플랫폼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한 범죄에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는 속수무책이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10월 검거된 딥페이크 성범죄 피의자 474명 중 10대 피의자가 381명으로 80%를 넘게 차지했다. 이 중 14.9%는 촉법소년이다. 피해자의 규모나 연령대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법 적용조차 어려운 어린 소년들이 범죄 가담자가 되어 가고 있는 현실의 심각성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
최근 국회에서 딥페이크 성범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입법 성과가 있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경찰의 위장 수사를 허용하는 성폭력 처벌법 개정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된 것이다. 이로써 수사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경찰의 초동 대응으로 가해자를 신속하게 검거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처럼 범죄 해결을 위한 입법적 보완 못지않게 근본적인 해결책들을 제도화해 나갈 필요가 있다.
자동차는 너무나 편리한 도구이고 우리의 세상을 뒤바꿔 놓았지만, 운전을 하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한 후 일정 시간의 교육을 받고 시험을 통과하여 면허를 획득해야만 한다. 내 손안의 디지털 세상도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지만, 그 위험성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디지털 노마드’ 세대는 현실의 과잉보호와 온라인 공간의 과소보호 사이에서 그 위험을 무방비 상태로 고스란히 마주하고 있는 중이다. 사태를 깨달은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에서도 강력한 조치 도입을 검토하거나 추진 중이다. 우리 역시 이미 ‘소 잃은 외양간’인 딥페이크 성범죄의 뼈아픈 교훈을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 대책으로 바꿔 나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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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풀숲에 지는 달'을 감상하는 초현실적 관점
반쯤 내려오는 달빛도 졸고 있는 밤 한가운데에 어디서 이슬이 날아와 풀잎에 슬며시 앉는다. 작은 이슬은 세상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싹을 품은 풀씨와 알들 속으로 스며든다. 이름이 아직 없는 원시 생명들은 적당한 달빛과 이슬로 또 다른 세상을 준비한다. 온통 초록인 세상 여기는 꿈틀거리는 여린 생명에게 일터이고 놀이터이며 우주이다. 슬그머니 침입한 이방인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미래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인다. 아주 작게.
갑자기 눈이 밝다. 달빛은 사라지고 강한 햇살이 눈에 들어온다. 아~ 꿈이었다. 어젯밤 나는 현미경보다 작은 풀잎 속 세상을 헤매고 다녔구나. 본 것 같지만, 있었던 것 같지만, 자신 없어 고개를 숙이고 달빛 흐르는 밤만 있는 미지의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구나. 꿈에서.
김춘자의 ‘풀숲에 지는 달’은 꿈속에서 일어난 풍경을 옮긴 그림일지도 모르겠다. 김춘자는 8~90년대 부산에서 ‘형상미술’을 형성했던 작가라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형상을 여전히 캔버스에 옮기면서 말이다.
‘풀숲에 지는 달’(1990년 제작)은 작가가 삼십 대, 좌절도 꿈도 많던 시절에 화면 어디라도 소홀함 없이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다. 현실에서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동물의 생명이 잉태하고 자라는 과정과 그것을 지켜보는 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여러 식물을 조합한 유화 작품이다. 캔버스 크기로 따지면 150호나 되는 대형작품으로 두 쪽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캔버스 화면은 대략 세 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아래층은 밝고 붉은 황토색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에는 식물의 뿌리인 듯 혹은 꼬리와 머리에 꽃이 달린 공작식물(?)인 듯한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바로 위층에는 더 옅고 얇은 황토색 띠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는 중간층으로 맨 위층과 경계에 작은 흰 꽃이 무더기로 모은 머리를 가진 무언가 있다. 무언가는 팔짱을 끼고 한 눈으로 화면 중앙에 있는 알에서 막 깨어나 날개를 펼치는 혹은 알을 지키는 나비를 관찰하고 있다.
가장 위층 왼쪽에는 반쯤만 빛나는 달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나누고 보니 캔버스 가운데 유독 푸른색으로 두드러지는 심장 모양을 한 공간 속에 알과 애벌레 같은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앉은 나비는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전체 분위기는 은밀하고 느리게 움직이며 주변을 경계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긴장감이 있지는 않다. 다만 초록색이 깔린 화면은 차분하고 조용히 응시해야 할 것 같은 공간이다. 김경진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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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부산, ‘디지털 블루푸드 허브’로 가자
최근 가속화되는 기후변화와 인구 증가 등의 이슈로 ‘식량안보’ ‘탄소 저감’ ‘물 부족’ 등을 포함한 지속 가능성 문제가 전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2021년도 통합식량안보 기준분류(Integrated Food Security Phase Classification)에 따르면, 현재의 식량 위기 수준은 지난 5년간 최고치보다 약 25% 높은 수준이다. 이에 대응해 유엔은 17가지의 ‘지속 가능한 개발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를 제시하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지속 가능한 식품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수산물은 2021년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학술지인 ‘Nature’에서 기존 농축산물 중심의 식량원을 대체할 수 있는 ‘블루푸드(Blue Food)’로 언급되며 주목받고 있다. ‘블루푸드’는 수산물을 활용한 식품을 의미하며, 자원의 다양성, 주요 단백질 공급원, 균형 잡힌 영양성으로 전 세계에서 주요 식품 공급원으로 기여해 왔다. 그러나 그 가치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돼 왔다. 또 ‘블루푸드’는 다른 단백질 공급원인 축산물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어 환경 부담이 덜하며, 생산과정에서 사용하는 담수가 적어 물 자원 확보 측면에서 유리하다. 더불어, 넓은 해양공간을 활용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수산물은 부가가치가 낮고 환경변화에 민감하여 자원 수급의 어려움과 같은 한계가 존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수산업과 수산가공업에 바이오,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3D 프린팅, 로봇 등 4차 산업의 혁신 기술을 융·복합하는 ‘블루푸드테크(Blue Food-Tech)’로 발전하고 있다.
부산은 국내 수산식품산업의 중심지로 수산식품의 생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규모 면에서도 국내에서 절대적인 우위(생산량 1위, 종사자 1위, 업체 수 3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기술적 수준에서는 최근 신산업으로 주목받는 ‘블루푸드테크’와 같은 혁신적인 변화는 더딘 실정이다. 지역의 대표적인 기반 산업인 수산식품산업이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4차 산업 혁신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블루푸드테크’ 산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블루푸드테크’는 ‘블루푸드(Blue Food)’와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수산식품의 생산-가공-유통-소비 전반에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바이오 기술(BT) 등 첨단 기술을 접목하여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기술이다. △세포배양 식품 △식물성 대체식품 △간편 식품(HMR, 밀키트) △케어푸드(메디푸드, 개인맞춤형 식품, 고령친화식품 등) △스마트 식품 제조(로봇·자동화) △디지털 식품 이력 추적 △디지털 수산식품 유통(온라인 플랫폼) 등이 있다 . 우리나라의 4차산업혁신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식품산업에 4차산업기술을 접목한 푸드테크산업은 한국이 선도해 나갈 글로벌 신성장산업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수산식품의 글로벌 이슈는 수산식품의 이력과 안전관리다. 미국의 경우 ‘식품안전 현대화법(FSMA: Food Safety Modernization Act)’에 따라 미국 식품의약국(US FDA)은 2026년 1월부터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농축수산식품 이력추적제도 의무화’를 시행한다. 이와 같은 국제규범 강화는 수산식품 교역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외에도, 불법·비보고·비규제(IUU·Illegal, Unreported, Unregulated) 어업국 수산물 및 수산식품 수입 거부’와 수산물에 대한 MSC(해양관리협의회·Marine Stewardship Council)와 ASC(수산양식관리협의회·Aquaculture Stewardship Council) 인증, 미국의 포유류보호규제인 MMPA(·해양포유류보호법·Marine Mammal Protection ACT) 2026년 수입규제 시행 등 수산식품에 대한 이력 추적 강화 및 의무화는 글로벌 규범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다. 부산은 동북아 수산물류 무역기지로서 러시아, 중국, 일본과 미국, 유럽의 중계 무역·환적지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부산으로 반입되는 수산식품에 대한 디지털 이력관리는 앞으로 수산식품에 대한 새로운 부가가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21대 국회에서 회기 종료로 아쉽게 폐기되었던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 연초 여야 국회의원 18명 전원 공동으로 참여해 1호 법안으로 재발의되었다. 특별법은 ‘글로벌 허브도시 기반’과 ‘생활환경 조성’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글로벌 허브도시 기반은 글로벌 물류거점, 글로벌 금융거점, 디지털·첨단산업 거점 조성 등 내용이 포함돼 있다.
부산이 가진 그리고 부산만이 잘할 수 있는 산업이 전통과 역사, 지역기반산업으로 성장해 온 수산식품산업이다. 이제는 그곳에 부산이 가진 잠재적인 첨단역량을 모두 집중해 ‘디지털 기반 블루푸드 플랫폼’을 조성해야 한다. 부산에서 반출입되는 수산식품에 대한 디지털 이력관리와 국제거래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면 세계는 가장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수산식품 원료 확보를 위해 부산으로 모여들 것이 자명하다.
세계는 지금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글로벌 아젠다를 지향하고 있어 향후 식품산업의 경쟁력은 ‘누가 얼마나 안전하고 친환경적인 믿을 수 있는 원료를 확보하는가?’ 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산이 지향하는 ‘글로벌 허브도시!’ ‘글로벌 블루푸드 플랫폼 조성’으로 가장 먼저 도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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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센텀2지구 발목 잡는 풍산 이전 빨리 매듭지어야
부산 해운대구 반여·반송·석대 일원 191만 ㎡를 개발하는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 사업은 ‘부산형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청사진을 갖고 있다. 센텀2지구는 2조 411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스마트 선박, 로봇·지능형 기계, 정보통신(IT) 등 부산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제조업 혁신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연구개발(R&D) 벤처 스타트업, R&D 센터, 혁신적인 주거 공간 등 부산의 도심에 산업·주거·문화가 집약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성장 거점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전 세계의 창업 기업과 인재를 끌어들이는 이 사업은 부산 미래를 책임지는 상징적인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센텀2지구 부지의 절반이 넘는 102만㎡를 차지하는 국가 방위산업체인 풍산 부산공장의 이전에 발목이 잡혀 사업이 답보 상태라고 한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풍산 측은 지난 2월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공장 이전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지만, 한 해가 다 가도록 후보지조차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풍산은 이전 부지가 확정되더라도 설비와 인프라가 갖춰진 이후에야 이전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어서, 전체 이전에 몇 년이 더 소요될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공장 이전이 지체돼 공사 완공이 늦어질수록 보상비 등 산단 조성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이는 결국 신규 사업이나 주거 복지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부산도시공사는 센텀2지구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조 4600억 원 규모의 공사채 발행을 앞두고 있는데, 풍산 문제로 사업이 지연되면 해마다 500억 원 안팎의 공사채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풍산 부지 이전·보상 작업에만 전체 사업비의 약 40%(8300억 원)가 쓰일 정도로 비중이 커 이전 지체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추가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게다가, 땅값과 공사비마저 급속도로 오르고 있어 조성 원가가 경기도 판교 수준까지 높아지면, 기업 유치 등 산단 성공 여부조차 불투명하게 된다.
센텀2지구 사업은 부산 경제를 한 단계 도약시키자는 지역 여론을 바탕으로 부산시와 풍산, 정치권이 합심해 진행한 사업이다. 사업 초기부터 국가보안시설과 그린벨트 해제, 도심융합특구 지정 등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지금 단계까지 이르렀다. 시는 디지털 산업 생태계 조성과 지역산업 체질 개선 및 일자리 창출 등 센텀2지구가 부산의 새로운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풍산 이전 문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풍산도 1981년부터 40여 년 동안 부산과 함께 성장해 온 만큼 ‘지역사회 발전과 공공기여를 위해 적극 노력한다’라는 양해각서 정신에 입각해 부산 시민의 여망에 화답해야 한다. 그게 국가 방위산업을 책임진 대기업, 지역 대표 기업의 바람직한 자세이다. 부산의 미래를 위해 모두가 합심해 풍산 부지 이전 문제를 빨리 매듭짓기를 거듭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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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의료 공백 장기화 속 부산의료원 정상화 시급하다
위기에 처한 부산의료원을 살리기 위해 부산시의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산 시민이 10명 중 9명 꼴이라고 한다. 사회복지연대 등이 19일 공개한 ‘공공의료에 대한 부산 시민 인식 조사’ 결과인데, 비단 해당 조사에 응답한 시민들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조사 항목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부산의료원 위기의 책임 소재를 묻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해당 질문에 “중앙정부”라는 응답도 35%가량 나왔지만 “부산시”라는 응답이 41.5%로 가장 많았던 것이다. 그에 비해 부산의료원의 책임이라는 응답은 15.1%에 그쳤다. 부산의료원 자체 경영 혁신 등을 주장하는 지역 정치권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인식이다.
기실 부산의료원의 형편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당장 환자 수가 급감하고 있다. 2019년엔 하루 평균 32명의 환자가 내원했는데, 올해 9월에는 24명에 그쳤다. 한 달 평균 병상 가동률도 같은 기간 80%에서 40%로 떨어졌다. 이는 전국 35개 지방 공공의료원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환자가 찾지 않으니 수익 역시 줄 수밖에 없다. 올해 들어 경상수지 적자가 매달 15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인건비 부족에 의료인력 이탈도 잇따라 진료 시스템이 제 기능을 못 한다. 응급실의 경우 전담 인력 상주 기준에 미달해 2023년 응급의료기관 평가에서 가장 낮은 C 등급을 받았다. 이런 형편에 양질의 의료서비스는 언감생심이다.
지역 정치권에서 부산의료원의 방만 경영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한 설명이 안 된다. 부산의료원은 2020년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됐다. 코로나19 환자 치료와 관련 업무만 수행하라는 당국의 명령에 일반 환자들은 모두 민간 의료기관에 보내야 했다. 지금 코로나19 사태는 진정됐지만 일반 환자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전담병원 역할로 이미 수익이 급감한 상태에서 일반 환자들마저 돌아오지 않으니, 부산의료원의 현재 경영난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지역거점 공공병원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라는 부산의료원 측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현재의 난국 타개를 위해서는 부산의료원 자체의 경영 혁신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공공의료기관이라는 특성상 수익 창출에 방점을 둔 경영에는 한계를 가진다. 그렇다면 기댈 곳은 부산시의 지원일 수밖에 없다. 다른 광역지자체는 지역 의료원을 살리려는 조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경기도의 경우 올해 3월 ‘의료원 정상화 TF’를 발족한 뒤 긴급 추경을 통해 내년 출연금 634억 원을 편성했다. 이는 올해 대비 250%나 올린 금액으로, 부산시의 내년 출연금 87억 원과는 크게 대비된다. 부산의료원은 부산 시민 건강의 최후 보루 같은 기관이다. 이런 곳을 외면하고서 달리 어떻게 시민 건강을 책임지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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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 특별함을 잃기 전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선거법 위반 1심 선고로 정국이 격랑에 휩싸였다. 당장 민주당에서는 ‘사법 살인’ ‘법 기술자들의 사악한 입틀막’ 등 격앙된 말들이 오간다. ‘비명계 움직이면 죽이겠다’로 상징된 민주당 내부 균열의 살벌한 조짐은 위태하게까지 느껴진다. 때를 만난 국민의힘은 ‘사필귀정’을 입에 올리고 ‘재판지연방지 TF’를 꾸리는 등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정국 반전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사생결단의 정치가 연말 정국을 달구게 된 것이다.
이 대표는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최종심에서 1심 형량이 유지되면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을 박탈당하는 무거운 형량이다. 정치인의 선거 중 허위사실 공표에 징역형이 선고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공직선거법이 낙선자를 엄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춰서도 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유죄 판결이 내려진 발언들은 이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을 해명하며 한 것이다. 양형에 대한 불만에 앞서 재판부가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부터 느끼는 게 마땅하다.
정부와 여당이라고 사정이 크게 나을 리 없다. 명태균 씨 사태로 촉발된 김건희 여사 공천·국정 개입 의혹과 윤석열 대통령 공천 개입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명쾌하게 정리하고 가지 않으면 두고두고 국정 발목을 잡을 사안이다. 혹여 이재명 사법 리스크로 대충 덮고 가자고 하는 날에는 화를 더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지금이야말로 정부와 여당이 혁신할 기회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고조될수록 민주당 공세는 더 거세질 것이다. 서로서로 죽이는 게임으로는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
25일은 이 대표 위증교사 혐의 1심 선고일이다. 진행 중인 재판만 4건인데 검찰은 법카 사적 유용으로 이 대표를 추가 기소하며 불난 민주당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가 윤 대통령 국정 후반기 정국의 상수로 자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국가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운 엄중한 시기를 정쟁으로 날을 새우며 보낼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미국만 위대하게 할 것’이라는 트럼프의 공언은 대미 수출에 목을 매는 우리 경제에 치명상을 예고한다.
더 근본적으로 파고들면 성장잠재력이 추락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망국적 수도권 집중과 초저출생으로 상징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대외 충격이 아니더라도 안으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총력을 동원해서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하는데 대통령의 낮은 국정 지지도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혔다.
윤 정부 출범 초만 해도 서울과 부산의 두 바퀴로 국가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며 균형발전에 올인하는 분위기였다. 그 모멘텀을 위해 월드엑스포 유치에 국가 역량을 총집결했지만 좌초했다. 대안으로 내세웠던 게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인데 이제 극단적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표류 중이다. 엑스포 유치에 실패한 게 1년 전이니 윤 대통령이 글로벌 허브도시를 공언한 지도 꼭 1년인데 특별법은 21대와 22대 국회를 이어오며 잠자는 중이다.
그나마 중앙 정부와의 협의 과정에서 ‘복합리조트’가 빠지는 등 각종 특례 조항에 대한 수정이 거듭돼 실효성 논란까지 더해진 마당이다. 벼랑 끝에 선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파격적 규제 혁파가 필요한데 중앙 관료들의 견제에 특별법의 칼날이 무뎌진 것이다. 그래도 글로벌 허브도시의 토대라도 놓자며 시민들이 서명운동까지 해 가며 법 통과에 목을 매고 있는 실정이다.
그 와중에 전남특별자치도법, 전북특별자치도법, 경기북부특별자치도법 등 지자체마다 유사한 특별법을 발의하며 부산의 뒷덜미를 잡는다. 이쯤 되면 노무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과 혁신도시 조성이 지역별 형평성만 고려해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했다는 한국은행의 연구 결과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에 판교형 테크노밸리를 만들겠다며 부산, 울산, 대구, 광주, 대전에 골고루 도심융합특구를 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 하겠다는 것은 때론 아무것도 제대로 안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회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혁신의 출발지로 부산을 키워야 하는데 정부의 의지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정치권은 발목만 잡는다. 결국 기댈 곳은 부산 정치권인데 사생결단의 결의가 보이지 않는다. 지역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민의힘 책임이 크지만 부산 민주당의 존재감 부재도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균형발전의 시계추를 되돌리기는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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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인간과 문어의 미래
지구의 역사는 대략 46억 년. 최초의 생명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인류가 쌓은 과학 지식은 38억 년 전쯤 바다에서 생명체의 기본 형태가 존재한 것으로 추정한다. 특정 환경에서 무기물이 유기물로 합성된 뒤 더 복잡한 유기물로 진화했다는 게 중론이다. 물론 이는 가설일 뿐 증명할 길은 없다.
지구 생명의 기원을 외계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이를 ‘범종설(汎種說·panspermia)’이라 한다. 우주에서 떠돌던 미생물이 혜성 혹은 운석의 충돌로 지구에 도착했고 이게 생명의 씨앗이 돼 진화하고 번성했다는 이론이다. DNA 구조를 밝혀낸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도 일찍이 이를 주장한 바 있다.
그 구체적 근거로 꼽히는 생명체가 있으니 바로 문어다. 얼음 운석을 타고 지구에 날아온 냉동 배아가 문어의 조상이라는 가설이 2018년 과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지구 유전자와 외계 유전자가 섞여 문어와 두족류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근거는 여럿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갑자기 나타난 점, 복잡한 특징을 담당하는 돌연변이 유전자가 추적되지 않는다는 점 등. 하지만 주류 과학계는 터무니없다는 반응이다.
어찌 됐든 문어의 외관은 지구의 다른 생명체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머리가 크고 지능이 높은데, 온몸은 신경세포로 채워져 형태와 색깔을 쉽게 바꾼다. 무척추동물임에도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집단생활을 하지 않는데 척추동물 이상의 소통 능력을 지녔다. 다양한 환경에서 생존이 가능하도록 진화해 왔다는 뜻이다. 문어는 확실히 인간과 다른 지성과 감정을 지닌 지구상 가장 신비로운 존재다.
최근에는 특별한 생명체로서의 문어를 실감케 하는 또 다른 뉴스가 전해졌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인류의 멸망 뒤 지구에 새로운 문명이 세워질 경우 그 주인공으로 문어를 지목한 것이다. 문어는 물 밖에서 30분 동안이나 숨을 쉴 수 있다고 한다. 육지로 나온다면 포유류 등을 사냥할 수 있고, 일부 개체는 바다에서 도시를 건설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마냥 흰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이 생명체의 정체를 우리는 미처 다 알지 못한다.
문어의 진화된 미래는 어쩌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경지 너머의 것인지도 모른다. 지성이 인간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은 착각이요 오만이다. ‘우주 시대’를 맞는 인간의 길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것을 묻게 되는 이즈음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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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수능 뒤 고3 교양교육을
지난 14일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뒤 당분간 고3 교실에는 정상적인 수업이 없어 교사와 학생들이 시간을 잘 보내기가 쉽지 않다.
일부 고교에서 기말고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고교는 이미 지난 10월 기말고사를 다 치러 학사력을 보면 대학입시 외에 다른 게 없다. 진학이나 진로 상담을 원하는 극소수의 학생 외에는 아예 별다른 계획도 없이 등교하지 않거나 등교해도 몇 시간 동안 급우들과 서성거리다 귀가하기 일쑤다.
매년 반복되긴 하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대학입시 일정과 맞물려 고교교육이 파행을 빚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준다.
2025학년도 대학입시는 가, 나, 다군 모두 내년 1월에 시작되며 원서 접수는 12월에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그때까지라도 유익하고 내실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여태껏 입시 준비를 하느라 지식교육에만 몰두해 왔는데 남은 이 기간만이라도 인성, 교양교육을 실시하면 좋겠다. 학생들이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양강좌, 한문 교육, 영어 회화, 독서, 사적지 및 박물관 견학, 저명인사 초청 강연회, 대학 안내 설명회, 학예전, 체육대회, 포크 댄스, 극기훈련, 선거관리위원회 방문과 선거교육 등도 해볼 만하다.
또 유익하고 보람 있는 대학교 신입생 생활을 할 방법을 소개하는 것도 좋다.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활용해 학기 중에 읽지 못했던 독서도 권장했으면 한다. 우정렬·부산 중구 보수동
※ 독자 여러분의 글을 기다립니다. 게재되면 고료를 지급합니다. 부산 동구 중앙대로 365 부산일보 편집국 독자여론부, 우편번호 48789, opinion@busan.com, 문의 전화 051-46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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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현의 남북 MZ] 통일은 새로운 용기다
“그는 ‘조난자’인 동시에, 통일의 소원을 내던진 한반도의 ‘마지막 생존자’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필자가 출판한 책에 대한 한 잡지사의 서평 일부분이다. 고향을 떠나온 탈북인으로, 남북의 분단체제를 모두 살아 낸 경험자로, 한반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난자 중 한 명으로, 통일을 미래 출구로 상정한 MZ세대의 연구자로서 통일을 열망한다는 구구절절하고도 광의적 내용의 책이었다. 하지만 저 한 문장의 서평에 나는 비로소 오랜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며 북한과 연고가 있거나 분단과 인연을 가진 이들의 개별적 소원으로 터부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용기를 가져야 살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북에서 어렸을 때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던 강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듣지 않았다면 영토 분단에 관한 관심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군에 계셨던 부모님이 병사들에게서 회수해 온 남쪽 관련 책자와 노래 테이프를 집에 두지 않으셨다면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면 민족 분단을 확인하고 한국을 동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통일을 전공으로 삼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숙명이나 진배없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개별적인 삶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주문과 욕구가 증식을 거듭할 터이다.
생존 급한 대학가 통일 강의 여유 없어
한반도 분단 해소 여전히 중요한 일
청년세대 새로운 통일 논의 분출하길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집과 이기심으로 단단히 무장한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것 같다. 이를테면 북한과 통일에 대한 수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에 이바지하겠다는 출발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가변적이다. 지방의 작은 대학이 북한 통일 관련 과목에 집중하는 교수의 수업을 이해할 만큼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 생존과 학생 모집은 학생의 졸업·취업과 연계되는 데 이에 부합되지 않는 교과 운영과 이를 바라보는 주변의 불편한 시선은 자조의 그늘이기도 했다.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빈틈없는 자본주의국가에서 관심의 팔 할은 생존인 현실에서 나에게 생존의 팔 할은 용기인 셈이다.
한반도가 신냉전의 화약고니 적대적 공존의 모순 등을 떠들어도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들에게는 실체가 불분명한 분단의 그림자일 뿐이다.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미지근한 담론은 빈곤과 경쟁에서 살아남고 통일보다 어려운 정규직 취업에 성공해야 할 청년들에게 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분단 서사가 일상을 지배하고 분단 폭력이 난무했던 과거와 달리 분단체제의 일정한 자기 성찰적 부분에서 어린 시절 영혼 없이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억지로 부르지 않아도 될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 확보이다.
희생으로 확보해 온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은 향후 청년들에게도 중요하다. 언제 전쟁을 불러올지 모르는 분단 상황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계 및 심각한 저출생 등 복합적 위기에서 서로 연동된 병리적인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성찰과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일상과 생활에서 분단을 발견하고 나아가 한반도 전반을 휩쓰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노력은 도전과 확장성이 될 것이다. 필자 또한 과거 필자의 교수 임명 조건이기도 했던 북한 통일 수업의 고집에서 벗어나 한반도 안에서 다양한 무늬들을 읽어내는 시도로 다양한 과목을 개발, 접목했다. 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던 터라 새로 선보인 한반도의 현대사나 한반도 미래의 기술창업 관련 수업에도 학생들은 예상외의 관심을 보였다.
통일포기론이 표가 되는 시대에 분단은 자연스럽고 또 일부는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은 외면하면서도 한반도로 불리기를 원하는 모순처럼 우리는 대륙(북방)과 해양(남방)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존재한다. 한반도의 대통합을 통해서 우리가 웅비할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했다면 주변 강대국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합구필분 분구필합(合久必分 分久必合, 천하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되고, 분열이 오래되면 언젠가 통합된다)’이라 했듯이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분단도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된 분단이 준 안일함과 복속에 안주해 다가오는 먹구름을 살피지 않으면 미래는 더 위태로울 수 있다. 어쩌면 분단과 통일에 감정적이지도 이념적이지도 않은 청년세대 앞에 미래를 향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용기의 시대가 다가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