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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통령은 재계와 '원팀' 의기투합, 여당은 '노란봉투법' 강행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순방에 참여하는 재계 총수들과 ‘원팀’ 전열을 정비했다. 이 대통령은 19일 ‘미·일 순방 동행 경제단체 및 기업인 간담회’를 열고 “현장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는 오는 25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국내 기업의 투자 계획 점검과 경제 분야 성과 극대화 논의를 위해 마련됐다. 앞서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에서 정부가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만큼, 기업들의 협조와 지원이 무엇보다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여당은 이번 주 노란봉투법 등 ‘기업 옥죄기법’을 강행할 예정이어서 관세 전쟁의 격랑을 헤쳐나가야 하는 기업들에게 족쇄가 채워질 수 있다.
노란봉투법은 하청업체 노동자 등에게도 원청을 상대로 교섭권을 부여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것이다. 재계는 법이 시행될 경우, 제조업 근간이 흔들리고 노사 관계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한다. 경총 등 경제 6단체는 18일 노란봉투법의 일부 독소 조항의 보완과 시행 1년 유예를 호소하는 성명을 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도 19일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에게 “노란봉투법의 국회 통과가 한국의 아시아 허브 위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전했지만, 김 원내대표는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는 일은 정부와 민주당의 확고한 의지”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대통령의 재계 ‘원팀’ 강조와는 결이 다른 여당의 행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18일부터 철강·알루미늄이 들어간 407개 파생상품에 대해 함량 비율만큼 50%의 품목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하기 시작했다. 각 제품에 사용된 철강·알루미늄 함량엔 50% 관세를, 나머지 부분엔 한국에 대한 상호관세를 15% 부과하는 방식이다. 철강·알루미늄이 들어가는 기계·부품을 미국에 수출해 온 국내 중소기업 1800여 곳은 관세 폭탄을 맞게 됐다. 이번 관세율 변동으로 부울경 지역 철강·자동차·기계업종의 수출 타격이 예상된다. 내수 침체, 중국 공세는 물론, 품목 관세까지 불길이 옮겨붙은 관세 폭탄까지 맞으면서 국내 중소기업들이 사상 초유의 삼중고를 겪게 된 것이다.
지난달 말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에서 우리는 ‘마스가’(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내세워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 정부와 기업이 한 팀으로 국익을 챙긴 성공적 사례로 여겨진다. 25일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정부와 기업의 ‘원팀’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측하기 힘든 미국의 추가 투자 요구에 맞설 대응 카드를 치밀하게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합심해야 할 중차대한 순간을 앞두고, 노란봉투법과 같이 기업 경영에 부담을 주는 법안을 정부와 여당이 숙의 과정도 없이 속전속결로 처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노란봉투법 시행 시기를 유예하고 경제계와 추가 협의를 하는 등 정책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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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원전 해체 장밋빛 전망에도 영구방폐장 등 갈 길 멀다
지난 6일 설계수명이 다한 고리 4호기가 멈췄다. 1978년 고리 1호기가 상업 발전을 시작해 대한민국의 원자력발전 시대를 연 이래 47년 만에 1~4호기 모두 가동을 중단한 것이다. 이 중 고리 1호기는 국내 최초로 해체 결정까지 내려졌다. 부산 원전 단지는 이제 본격적인 철거 단계에 접어들었다. 노후 발전 시설을 뜯어내고 부지를 복원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산일보〉 기획 보도 ‘해체되는 원전, 묻혀버린 검증’에 따르면 전 세계 원전 654기 중 215기가 영구 정지됐는데, 이 중 25기(11%)만 해체가 완료됐다. 원전 철거는 결코 만만치 않아서 기술적, 사회적 준비가 두루 갖춰져야 한다는 교훈을 새겨야 한다.
한국에서는 고리 1호기 해체 결정 이후 철거·복원 시장 규모를 놓고 근거 없는 낙관론이 퍼졌다. ‘500조 원 시장’ 운운하며 마치 거대한 신산업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이는 세계원자력기구(IAEA) 보고서에서 언급된 ‘향후 25년 내 절반의 원전이 해체 대상’이라는 전망을 단순히 수치화한 것일 뿐이다. 실은 원전마다 발전 방식과 안전성 평가, 사용후핵연료 반출과 저장 시설 이송 등 변수가 제각각이다.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원전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위험 요인 통제가 주요 변수다. 이 때문에 해외 원전 중 해체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장기간 지연되는 게 흔하다. 멈추는 원전은 늘지만, 해체 속도가 더딘 이유다.
고리 1호기 해체의 경우 12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이지만 구조적 지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준위 폐기물 처리 때문이다.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소가 포화 상태에 근접했는데도 영구방폐장 계획은 답보 상태다. 해체 일정이 지연될수록 사용후핵연료의 관리 부담은 누적되고, 부지의 ‘반영구 방폐장화’ 우려는 현실이 된다. 해체 시장의 장밋빛 기대감에 들뜬 사이 정작 우리 원전 안전 문제를 간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은 흑연감속형 원자로 26기를 중간 단계까지만 해체하고 최대 100년을 봉인하기로 했다. 안전 담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부와 부산시, 정치권은 지역 특화 사업으로 원전 해체 산업 육성 계획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원전 해체는 산업 육성과 시민 안전, 두 축이 병행돼야 한다. 고리 원전 부지 내 임시 저장소가 2032년 포화된다는 사정 때문에 특히 그렇다.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처리할 영구방폐장의 입지와 설계, 추진 일정에 대한 명확한 비전 제시 없는 해체 산업 육성론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자칫 위험하다. 지난 6월 고리 1호기 해체가 승인된 뒤, 해체 과정의 안전성과 사용후핵연료 처리에 대해 정부, 부산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방폐장 건립은 주민 수용성과 정치적 합의, 정밀한 기술 검토가 맞아떨어져야 하는 장기 과제다.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신산업도 날개를 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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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경 칼럼] 우리는 다른 나라에 산다
집값 이야기다. 서울의 부동산 열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등하자 결국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이른바 6·27 대책을 통해 수도권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 원으로 제한하는 대출 규제에 들어가자 지난달에는 거래량이 줄어들며 시장이 관망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비강남권의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을 중심으로 집값 급등 조심이 나타나는 등 상승 추세는 여전히 굳건하다. 서울이라는 지역적 희소성을 감안하면 상승세가 꺾일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학습효과도 한몫한다. 진보 정권에서 집값이 더 오른다는 역설이 오히려 시장의 믿음인 듯하다.
수도권을 벗어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수도권 부동산이 불장을 이어오는 동안 부산을 비롯한 비수도권은 하락세를 지속했다. 최근 부산의 하이엔드 아파트를 중심으로 분양시장이 반짝 열기를 보이고 있지만 전반적인 비수도권 부동산 시장은 냉기가 가득하다. 쌓여있는 악성 미분양 물량을 감안하면 당분간 회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부산 아파트 가격은 몇억씩 떨어진 게 예사인데 서울이 몇억씩 올랐다는 건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쌓이는 미분양 물량만큼이나 상대적 박탈감도 쌓여간다.
문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부동산 양극화가 추세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올해 들어 전개되는 양상은 양극화를 넘어 초양극화다. 이전의 부동산 시장은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는 동조화 현상이 있었다. 서울이 뜨거워지면 부산은 따뜻해지고 대구는 미지근해지는 정도의 온도차였다. 하지만 이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뉴노멀이 되고 있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부동산지인’이 지난 10년간 전국 주요 도시의 공동주택 실거래 가격을 분석한 결과 서울의 아파트값 상승률이 부산의 3배가 넘었다고 한다. 이 기간 부산의 평당 아파트 매매가격이 823만 원에서 1226만 원으로 48.9% 상승했는데 서울은 1750만 원에서 4482만 원으로 156.1%나 올랐다.
부동산 가격은 결국 해당 지역 경제력을 반영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망국적 수도권 집중의 구조적 문제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게 집값이라는 이야기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초양극화가 진행된 지난 10년간은 인구와 GDP에서 수도권이 비수도권을 추월한 시기와 일치한다. 수도권 집중에 따른 초저출생 누적으로 우리나라 총인구가 내리막길로 접어든 상황을 감안하면 집값 초양극화는 이제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말로만 균형발전을 내세울 뿐 어설픈 부동산 정책으로 수도권 쏠림을 더 부추긴다. 대표적인 게 문재인 정부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다.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 규제는 ‘똘똘한 한 채’ 현상을 낳았고 강남 3구의 아파트값 급등을 불렀다. 지역 부자들까지 한강 변 아파트 매수에 가세했다고 하니 말 다 한 거다. 애초의 부동산 정의는 온데간데없고 일부 고위 관료 소유 강남 부동산 급등이라는 내로남불만 남았다. 정책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이야기한다.
수도권 공급 확대도 마찬가지다. 집이 모자라는 게 아니라 수도권에 수요가 과도하게 쏠리는 게 문제인데 공급 확대는 수도권 쏠림만 더 가속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게 답일 터인데 늘 정책은 변죽만 울린다. 비수도권 부동산에 대한 다주택자 규제 완화 등 차별화된 특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인데 중앙 관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새 정부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최근 내놓은 ‘지방 중심 건설투자 보강방안’에 따르면 소멸에 처한 지방 도시의 집 한 채를 추가로 매입할 경우 1주택자와 같이 세제 감면 혜택을 주는 ‘세컨드 홈’ 제도를 확대한다는 것인데 정작 광역시는 빠졌다. 광역시에 같은 혜택을 줄 경우 집값 상승 등 시장이 불안해질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 지역민들의 체감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새 정부 국정과제로 채택한 국가균형발전 정책도 부동산 초양극화 대책과 함께 가야 한다. 망국적 수도권 집중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초양극화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한국은행은 집값 초양극화가 국가 통화정책마저 왜곡시키는 지경이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높아진 수도권 부동산 가격은 국민 간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회갈등을 초래하며 궁극에는 국가 경제를 파탄으로 이끌 것이라는 경고다. 수도권 집중 완화를 위한 뼈를 깎는 구조개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다. 부동산 정책은 그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당장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면 부동산 정책을 통해 초양극화를 완화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강윤경 논설주간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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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세컨드 홈
고대 로마는 돌의 도시였다. 도시를 보는 시각이 현대와 달랐던 로마인들은 녹지대를 배제하고 석조건물이 가득한 공간으로 '도시 로마'를 만들었다. 네로 황제가 서기 68년 궁전에 해당하는 ‘도무스 아우레아’를 짓고 정원 등 조경에 힘을 쏟으면서 기존 석조건물과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로마인들은 이를 로마답지 못한 건축물로 여길 정도였다. 결국 도무스 아우레아는 네로가 죽은 뒤 파괴됐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서기 70년 그 자리에 콜로세움을 지어 올렸다.
폐허가 된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반짝이는 석조 인테리어로 빛이 났을 테지만 석조건물만 가득한 도시에 산다는 것은 정서적인 측면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거주하는 로마의 석조건물 밀림 속 집과는 달리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별장이 필요했다. 돈이 없는 평민들은 어쩔 수 없었으나 귀족들은 너도나도 로마 이외 지역 녹지대에 별장을 마련하고 수시로 거기서 생활했다. 이런 별장을 ‘빌라 우르바나’라 불렀다. 이탈리아 곳곳에서 녹지가 있는 언덕이면 볼 수 있는 건물들은 빌라 우르바나에서 비롯한 것이 많다. 이 빌라 우르바나가 ‘세컨드 홈’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세컨드 홈이 좀 더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은 100여 년 전부터다. 프랑스와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등에서 귀족들의 가족 유산 형태로 존재해 오던 것이 1950년대 이후 자동차 등 교통수단 발달로 급격히 그 수가 늘어났다.
현대 들어서는 여러 나라들이 지역의 인구 쇠퇴 현상이 심화하자 세컨드 홈 정책으로 쇠퇴 지역 생활인구를 늘리려 노력중이다. 영국은 농촌 지역의 공동화를 막기 위해 일정 기간 농촌 지역의 세컨드 홈을 임대할 경우 세금을 면제해 준다. 일본도 세컨드 홈 법이라 불리는 두 지역 거주 촉진 관련법을 마련해 지난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우리 정부도 지방 소멸 위기 해소를 위한 아이디어 차원에서 지난해 인구감소지역의 세컨드 홈 취득에 대해 세제 특례 제도를 도입했다. 최근엔 인구감소관심지역으로 그 대상도 늘렸다. 하지만 부산은 광역시라는 이유로 한데 뭉뚱그려 특례에서 배제가 됐다. 부산은 동구와 서구, 영도구가 인구감소지역이고 금정구와 중구가 인구감소관심지역에 해당한다. 18개 구·군 중 5곳이 인구소멸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세밀한 분석을 통한 족집게식 세제 적용이 아쉽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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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변화하는 여름, 흔들리는 기후 질서
논문을 쓰며 참고 자료를 찾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98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가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여름 일기였다. 유치하고 서툰 글을 읽는 일은 잠시 오글거림을 불러왔지만, 그 안에는 37년 전 여름의 기후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린 나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지냈고, 8월 한 달은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중순이 되자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알렸다.
당시 8월 중순은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거리가 멀었다. 더위가 찾아와도 나는 밖에서 뛰어놀았고, 땀이 나면 냇가로 달려가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여름은 여러모로 낯설다. 지난주만 해도 8월 말에나 경험할 법한 늦여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며칠 사이 날씨는 급변해 열대야와 폭염이 찾아왔다. 중위도 지역에서는 7월 장마철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이 자리 잡으며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서울과 경기도 곳곳이 큰 피해를 보았다. 단 며칠 만에 초가을 같은 선선함은 사라지고, 극심한 여름이 자리를 대신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하루하루 날씨는 불규칙했지만, 계절의 변화만큼은 약속된 듯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초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장마를 걱정하며 긴 비에 대비했고,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8월 중순이 되면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며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불규칙한 날씨와 질서 있는 계절 변화 사이에는,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준계절적’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계절적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팽창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여름철 대륙과 해양이 태양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면서 형성되는 거대한 공기 덩어리다. 온도가 빠르게 오르는 대륙에는 대륙성 저기압이, 천천히 올라가는 바다 위에는 해양성 고기압이 자리 잡는다. 한반도는 이 두 공기 집단의 경계에 놓여, 여름철 날씨가 두 집단의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7월 장마 역시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움직임은 계절 변화에 따라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북태평양 고기압의 경계에서는 다양한 날씨 현상이 발생한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규칙적인 계절 변화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들 기압계는 중위도 제트기류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발생하고, 북태평양 고기압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달하고 소멸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변화는 중위도 제트기류를 통해 이들의 발달과 이동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철 날씨 예보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면서” 혹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물러나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은 계절 변화의 규칙성과 날씨의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며, 준주기적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후 시스템의 체계적 특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 스케일이 커지면서, 원래 불규칙에서 준주기성, 나아가 주기성으로 이어지던 구조적 체계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날씨의 불규칙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더 극단적이다. 비가 내리면 폭우가 되고, 맑은 날씨는 폭염을 동반한다. 준주기성을 띠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확장도 보다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확장 기간이 길어지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하고, 수축하면 거대한 강우 시스템이 형성되어 홍수를 유발한다. 계절적 순환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8월의 날씨는 기존의 7월, 8월, 9월 초의 특성이 혼합된 듯하며, 계절 구분이 흐려져 일주일 사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현재까지 기후학계와 환경 단체는 기후 온난화를 주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대중 역시 기후 온난화라고 하면 산업화 이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리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기후 적응 단계에 들어서면서, 기후 온난화를 단순한 온도 상승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현상을 상변화라고 한다.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자체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배열과 구조적 안정성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섭씨 0도를 넘으면 얼음은 빠르게 구조를 바꾸며 액체 상태로 변모한다. 기후 온난화를 상변화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상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를 기후 온난화에 적용하면, 현재 발생하는 기후 재난을 온난화와 연결해 이해하는 논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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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숙등역
만덕고개 헐레벌떡 숨 고르다 지나쳤다. 있으면서도 없는 곳, 안개가 사람들만 잡아먹곤 한다는 굴다리 주위에는 흘러 고인 시간이 윤슬 되어 역류의 방식으로만 합류했다지. 나 한 번도 그곳이 있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만덕 지나 덕천 구포로만 고여 들었을 뿐, 어느 한갓진 뒷골목 밤길을 걷는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 신발 뒤축의 경사가 서녘으로 기울어 붉게 문드러지던 8월의 오후,
“인자 쫌만 걸으면 우리집잉께, 쩌그 식당에 들러 칼국수나 먹고 가자.”며 철퍼덕 주저앉아 낙동강 놀을 더듬던 눈길이 정물처럼 붙박힌 미궁 속에서 나 한때 머무른다네, 숙등의 지도는 안개만이 앞장서는 날이 잦았고, 때로는 갈퀴처럼 덜미를 쓰다듬는다네
시집 〈새들반점〉 (2022) 중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숙등이 있고, 숙등역이 있습니다. 지나쳤지만 늘 있었던 곳. 우리에겐 가보지 못한 곳, 벌써 잊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은지요.
낯선 곳에서 밀려오는 기억의 역류, 그리운 어머니를 마술처럼 만납니다. 인간의 기억은 동기나 욕구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는데요. 힘들고 지친 걸음 끝에 문득 만나고 싶은 목소리는 간절함이 아닐런지요.
기억과 상상의 연대, 되돌아오는 시간들. 혼자 걷는 밤의 뒷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노을 속에 서 있는 시인이 내 일처럼 쓸쓸해집니다.
흘러 고인 시간들이 모여있는 곳, 한치앞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안개속에서 아슬아슬한 생의 뒷덜미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낍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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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홀로 사는 어르신에게 꾸준한 관심을
60대 초반 은퇴자로, 퇴직을 하고 한동안 쉬다가 지금은 노인요양 관련 직장에서 일한다. 그래서 요즘은 70대 중반 이상의 어르신들을 주로 상대하고 있다.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집에서 요양보호기관으로 오가는 일이 나의 주된 업무다. 이들은 대부분 자녀의 돌봄을 받기는 하지만 일부 어르신들은 자녀가 있어도 방치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다.
더욱이 몸과 마음이 아파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을 직접 모시러 집에 방문하면 집안이 온통 쓰레기나 재활용품으로 가득찬 경우도 있다. 보호자로 등재된 자녀가 분명히 있는데도 어르신 거주 공간이 쓰레기로 가득찬 모습을 보면 서글프면서도 울화가 치민다. 물론 자녀가 생업에 종사하느라 부모를 세심하게 돌보지 못할 수도 있다지만 가끔이라도 부모가 사는 집을 방문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지저분한 환경에 부모를 방치하는 것은 자식으로서 모든 행위의 근본이라는 효를 다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확대하자면 부모를 학대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초고령 시대를 맞아 노인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덩달아 복지 예산도 엄청나게 증액되다 보니 어르신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세태가 된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도시철도와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때도 노약자석이 있지만 어르신이 타도 거의 자리를 양보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국가적 대비 없이 초고령 시대를 맞았다 해도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를 풍요롭게 만든 주역은 우리 가까이에 있는 어르신들이다. ‘역전의 용사’인 그들이 노후에는 좀 편안하게 살아야 하지 않나. 청년과 중년층 모두 언젠가는 노년이 되고마는 ‘예비 노인’이다. 어르신을 잘 돌봐야 젊은이들도 나중에 노인이 되었을 때, 자손들에게 돌봄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어르신들을 좀 더 챙기고 보살피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박정도· 부산 사하구 다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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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해양수도 부산 백년대계 신산업과 인재 육성에 달렸다
부산은 해양수도로 번영하는 새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도약대 앞에 서 있다. 해양수산부 이전이라는 행정 중심 기능 확보와 더불어 북극항로 개척 목표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반전의 기회다. 한데, 정부 기관과 관련 업계가 집적된다고 해서 저절로 해양강국의 구심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도시 스스로가 뼈를 깎는 혁신에 성공해야만 해양 신산업과 인재의 요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전북 전주로 이전한 국민연금이 구인난을 겪었던 사례를 곱씹어야 한다. 해양 관련 기업과 우수 인력이 자발적으로 몰리는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해양수도에 걸맞게 도시 구조와 기능이 근본적으로 재편돼야 한다.
부산시와 테크노파크 주최로 18일 열린 ‘해양 신산업 제조·서비스 포럼’은 해양도시 미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있어 시의적절한 시사점을 준다. 7회로 계획된 포럼 중 이날 첫 회의 주제는 해양 반도체였다. 지역에 특화된 강점 자산을 십분 활용하자는 전략이다. 글로벌 해운·조선시장이 탈탄소화·자동화·스마트화되면서 급부상한 해양 반도체는 부산이 보유한 전력 반도체 및 해양 장비, 소재·부품·장비 인프라와 결합하면 독보적인 경쟁력 발휘를 기대할 수 있다. 기존 항만·물류 중심에서 데이터와 첨단 기술 중심 도시로 전환하는 노력이 성과를 낼 때 부산의 경제 체질은 첨단화, 고도화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해양 신산업 육성 전략의 성패는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 수도권의 교육·산업·생활 인프라는 그간 지방 청년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거꾸로 기업은 고급 인력 확보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지방을 회피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전문 인력의 안정적 확보와 해양 신산업 유치·육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지역 대학들이 앞다퉈 인재 양성·인프라 구축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다. 부경대는 부산형 과학기술원대학원(BAIST)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울산과학기술원과 공동 연구와 인력 양성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또 한국해양대도 목포해양대와 통합 이후 첨단 인재 양성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해수부와 기관·기업이 오는 것은 물리적 조건이 갖춰지는 것일 뿐, 성과를 내려면 화학적 결합 그 이상이 필요하다. 해양 반도체를 비롯한 해양 신산업은 부산의 DNA를 바꿔 놓을 가능성을 지녔다. 기존 제조(반도체, 에너지, 바이오 등)와 서비스(AI, 블록체인 등) 기반이 시너지 효과가 날 때 수도권과 대등한 양극 체제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다는 의미다. 신산업 육성에 발맞춰 인재 확보를 위한 대학 역량과 산학연 협력도 강화돼야 한다. 더불어 주거·문화·복지 등 삶의 질 향상은 필요조건이다. 부산의 백년대계는 해양 신산업과 인재 육성에 달렸다. 부산은 해양수도 위상에 걸맞은 혁신에 과감히 도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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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위험천만 노후 주택 많은 부산, 안전 관리 발등에 불
낡고 오래된 주택은 세심한 관리를 필요로 한다. 수시로 점검해 붕괴 우려가 있는 부분을 보강하는 등 상시적인 대응 대책이 필요하다. 특히 부산은 전국에서 노후 주택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다. 국토교통부의 ‘2023년 전국 건축물 현황’에 따르면 2023년 기준 부산 지역 주거용 건축물 23만 6696동 중에서 16만 2633동(68.7%)이 사용승인 30년을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10채 중 7채가 준공 후 30년이 지난 노후 건축물이란 의미다. 하지만 지자체 차원의 노후 건축물 안전 점검 지원 사업은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노후 주택 거주자들의 안전을 크게 위협한다는 지적이다.
부산시는 지난 4월 ‘부산광역시 건축물 관리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통해 소규모 노후 건축물의 보수·보강 등 지원 사업에 대해 예산 지원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시와 16개 구·군이 지원하는 ‘소규모 노후 건축물 안전 점검비 지원사업’은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작 시는 조례를 개정했지만 일선 구·군들이 관련 조례 제·개정을 아직까지 하지 많아 노후 주택 소유자가 안전 점검비를 지원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서울시 등은 2018년부터 이 사업을 실시, 건축 전문가가 건축물의 기울기와 균열 등 안전을 위협하는 취약 요소를 직접 점검하고 있다. 부산 노후 주택 사고 예방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부산에서는 그동안 노후 주택 붕괴로 인한 사고가 잇따랐다. 지난 2023년 9월 금정구 2층짜리 주택 일부가 붕괴했다. 2019년에는 부산진구에서 당시 40년 된 노후 주택이 무너지면서 1명이 매몰돼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부산에서는 인구 감소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빈집도 급증하고 있다. 스프링클러 등이 설치되지 않아 화재에 취약한 노후 공동주택도 많다. 더욱이 통계에 잡히지 않는 무허가 노후 건축물도 적지 않다. 노후 주택에 대한 안전 점검은 인명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철저한 현황 조사를 통해 노후 주택에 대한 데이터부터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부산에 노후 주택이 많은 것은 인구 감소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구가 줄고 노인 인구가 늘면서 노후 주택들이 정비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지자체의 소극적 대응은 노후 주택을 도심 속 시한폭탄으로 전락시킨다. 부산 노후 주택 문제는 수도권 일극화를 부추긴 정부 정책의 잘못도 크다. 그렇다고 정부 탓만 하고 있을 순 없다. 부산시와 각 지자체들은 노후 주택 점검단을 직접 꾸려 정기적으로 현장을 확인하고 개선까지 맡는 등 혁신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소규모 자율주택 정비사업 활성화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노후 주택 문제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부산시와 각 구군의 선제적 대응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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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엘롯기 동맹'의 가을야구 도전
역대급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올 시즌 KBO리그가 후반기를 맞아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전반기까지 한화와 LG, 롯데가 3강 체제를 형성하며 선두권 경쟁을 펼쳤으나 후반기 들어 롯데가 8연패의 부진에 빠지면서 LG와 한화가 각각 1~2위를 질주하며 우승 문턱에 한 발짝 더 다가선 형국이다. 3위 롯데와 4위 SSG, 공동 5위에 오른 KIA, KT, NC, 8위 삼성, 9위 두산은 선두권과 8경기 이상 벌어지며 혼돈의 3~5위 싸움을 펼치고 있다. 반면 지난 시즌 꼴찌였던 키움은 올해도 10위로 처지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이 사실상 힘들어 보인다.
시즌 폐막까지 30여 경기를 남겨 놓은 가운데 막판까지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올해 KBO리그의 최대 화두는 ‘엘롯기(LG·롯데·KIA) 동맹’의 사상 최초 가을야구 진출 여부다. 한때 오랜 부진으로 만년 하위팀으로 평가받았던 엘롯기가 올 시즌 동반 포스트시즌 입성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지난해까지 43년째 엘롯기 동맹 세 팀이 가을야구 무대에 나란히 진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엘롯기는 자타공인 국내 최고 인기 구단이어서 프로야구 ‘흥행 보증수표’로 통하는 팀들이다. 각각 서울, 부산, 광주라는 대도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어 그만큼 극성 팬덤을 가진 팀들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허구연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과거 방송 해설위원 시절 ‘엘롯기 동맹을 편애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허 총재는 그럴 때마다 “팬이 많은 구단이 잘해야 야구가 살아난다”고 해명하곤 했다. 실제로 프로야구는 KIA와 LG가 나란히 가을 야구 무대를 밟은 지난해 총 관중 1088만 7705명을 기록하며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중을 넘어섰다.
엘롯기는 2000년대 초반 KBO리그 만년 하위 3개 팀을 일컫는 조롱 섞인 유행어였다. 2001부터 2004년까지는 롯데가, 2005년과 2007년은 KIA가, 2006년과 2008년은 LG가 꼴찌를 차지하면서 엘롯기라는 단어가 야구 팬들에게 점차 각인되기 시작했다. 당시 엘롯기가 모두 가을야구에 진출하면 ‘대한민국이 폭발한다’는 근거없는 속설까지 떠돌았다. 엘롯기는 포스트시즌에 나란히 탈락한 경우도 1982년, 1985년, 2001년, 2005년, 2007년, 2015년으로 총 6번이나 있다.
LG는 1994년 이후 2022년까지 20년이 넘게 우승을 못하다 2023년 통합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롯데는 한술 더 떠 1992년 이후 무려 30년이 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봄에만 반짝해 ‘봄데’라는 오명까지 보유하고 있다. KIA는 그나마 2000년 이후 3차례나 우승을 해 체면치레는 했다.
응원하는 팀이 올해 성적이 너무 좋아 제일 신나는 건 역시 롯데 팬들이다. LG와 KIA는 각각 2023년과 지난해 통합 우승을 차지하는 등 두 팀은 최근 들어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반면 롯데는 프로야구 원년 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정규리그 우승 기록조차 없다.
올해 ‘반전의 드라마’를 쓰고 있는 엘롯기가 나란히 가을야구에 도전할 수 있는 이유로는 안정된 마운드와 뛰어난 타격력을 꼽을 수 있다. LG는 요니 치리노스와 임찬규, 손주영, 송승기가 팀 내 최다승 경쟁을 벌이며 연일 승리를 챙기고 있고, KIA는 지난달 말 NC와 트레이드를 통해 우완 투수 김시훈과 한재승을 영입해 불펜을 보강했다. 롯데는 알렉 감보아와 박세웅이 선발진에서, 홍민기와 윤성빈이 불펜진에서 역투를 펼치고 있다.
특히 롯데는 올 시즌 10승을 거둔 외국인 투수 터커 데이비슨을 최근 방출하고 새 외국인 투수 빈스 벨라스케즈를 영입하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벨라스케즈는 미국 메이저리그(MLB)에서 191경기를 뛴 베테랑 투수로 빅리그 통산 38승 51패, 평균자책점 4.88을 기록했다. 하지만 지난 13일 한화와 KBO리그 데뷔전에서 선발 등판해 3이닝 6피안타 2볼넷 5실점으로 무너졌다. 앞으로 정규시즌 동안 6~7번 정도 더 등판할 것으로 보여 이름값을 해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엘롯기는 또 팀 OPS(출루율+장타율)와 경기당 평균 득점 등 공격력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에서도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이밖에 엘롯기의 또 다른 공통점은 베테랑 선수가 팀 타선의 중심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LG 김현수(37)와 롯데 전준우(39)는 팀 내에서 결승타를 가장 많이 때렸고, 현역 최고령 타자인 KIA 최형우(41)는 리그 OPS 부문에서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김현수는 최근 키움전에서 시즌 10번째 결승타를 때린 뒤 “올해는 노인들이 잘되는 해인가 보다”라며 환하게 웃기도 했다. 엘롯기 동맹의 선전으로 올 시즌 사상 최초로 1200만 관중 돌파도 무난해 보인다. 엘롯기가 과거처럼 조롱이 아닌 영광의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을지 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변현철 문화부 독자여론팀장 byunh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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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경기장 이름값 판매
이름에는 힘이 있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경기장이든 마찬가지다. 201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명문 구단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홈구장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이름을 스포츠 다이렉트 아레나로 바꿨다가 팬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1892년부터 이어온 역사가 하루아침에 자본의 간판으로 덮였다는 분노였다. 팬들은 구단 앞에서 세인트 제임스 파크 장례식까지 치르며 저항했고, 결국 2년 만에 이름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경기장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 소속감을 담은 그릇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처럼 흔히 ‘이름값’이라 불리는 명명권(Naming Rights) 판매는 1970년대 미국에서 본격화했다. 이는 공공시설이나 스포츠 경기장의 명칭을 일정 기간 기업에 내어주는 방식을 말한다. 시설 자체를 파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만으로도 막대한 광고 효과와 재정 보충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일본 지자체들까지 체육관과 미술관, 도서관 등에 기업명을 붙여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올림픽만은 예외였다. 선수들의 땀과 눈물, 인류 평화라는 숭고한 명분이 상업주의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올림픽도 벽을 허물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근 경기장 명명권 판매를 허용했다. 올림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로써 올림픽이 지켜온 비상업적 상징성은 한 꺼풀 벗겨진 셈이다. 조직위는 앞으로 최대 19개의 임시 경기장 명명권을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명명권은 분명 매력적인 재원 조달 수단이다. 부족한 예산을 메우고 시설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상업화가 일반적인 EPL조차 경기장 명명권에 신중한 이유는 그 이름 속에 역사와 문화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 정신은 상업주의와 거리를 둔다.” 이는 그동안 IOC가 고수해 온 원칙이었다. 비록 그 원칙이 무너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비판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만약 명명권 수익이 경기장 건설비나 장애인 선수 지원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스포츠의 새로운 공공성을 열어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 단지 ‘돈이 되니까 팔았다’는 이유라면 올림픽은 세계 최대의 광고판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올림픽 정신과 자본의 경계에서 어디까지 내줄 것인지, 어디서 균형을 잡을지는 앞으로 IOC가 풀어야 할 과제가 될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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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케데헌' 시즌2를 기다리며
한 달 전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일. 처음엔 회사 선배로부터 우스갯소리처럼 듣게 됐다. “만화 영화가 일종의 K무당 이야기인데, 여자애들 3명이 아이돌 그룹인데 악귀를 잡으러 다니고, 근데 그 악귀가 남자 아이돌이고….” 다음엔 친구가 “정말 재미있다”며 호들갑스럽게 한참을 떠들곤 유튜브에서 대표곡까지 찾아 들려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드렁했다. 마지막엔 초등학생 아들이 금요일 저녁에 꼭 같이 봐야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고 강력 주장해 함께 시청하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
이미 예상했겠지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야기다. 줄여서 ‘케데헌’. 올여름 가장 핫한 콘텐츠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넷플릭스 역대 흥행 영화 2위 기록을 만들었고, 스토리보다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영화의 배경인 한국, 서울을 상징하는 각종 굿즈까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현재 10억 달러(약 1조 39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평가받는다고 한다. 놀랍고, 자랑스럽다.
‘케데헌’은 특히 OST 곡들이 하나같이 귀에 꽂히는 듯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영화 속 아이돌 헌터스가 부른 대표곡 ‘골든(Golden)’은 이달 들어 글로벌 음악 차트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11일(현지 시간)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기록했다. 빌보드는 이를 두고 “‘핫 100’ 차트를 정복한 K팝과 관련된 아홉 번째 노래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첫 번째 1위 곡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앞서 이달 1일에는 ‘골든’이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1위에 올랐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2012년 같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이후 13년 만이었다.
‘골든’을 따라 부르는 유명 가수와 연예인들의 ‘커버 챌린지’ 동영상이 쏟아지는가 하면, 북미와 영국 등에서는 오는 23·24일 1100여 개 이상의 영화관에서 ‘싱어롱 상영회’(영화 속 음악을 관객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상영 방식)로 ‘케데헌’을 상영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덕분에 넷플릭스는 속편 제작과 영화 실사화, 뮤지컬 제작까지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하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 관람객들의 대기줄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 때문일까. 넷플릭스는 완구 등을 포함한 상표권도 단독 출원하며 사업 확장까지 예고하고 나섰다. 물론 넷플릭스가 ‘케데헌’의 수익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꽤나 배가 아프지만, K팝을 포함한 K컬처의 세계화를 확장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K팝은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까. 한 대중문화 전문가는 “북미나 영국 등 서구의 대중음악은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져서 폭력, 자살, 성관계, 마약 같은 어둡고 암울한 정신세계를 포함하는 반면, K팝은 BTS의 ‘Love yourself’ 처럼 보편적 사랑과 자기애, 꿈과 미래 등의 밝고 건전한 가치를 다룬다. 여기에 음악성까지 더해져 확산력과 잠재력이 크고 전 세계 많은 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80주년 광복절이 있는 올해 8월이라 그런가. 다소 생뚱맞지만, K컬처가 세계로 한껏 뻗어나간 이 여름, ‘케데헌’ 시즌2 소식을 기다리며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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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연공서열 개혁 없이 '공대 한국' 만들 수 없다
2000년대에도 의대·치대·한의대 등 이른바 ‘메디컬 학과’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요즘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는 정시 배치표(자연계) 최상위권에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 의대와 더불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이 여럿 이름을 올렸다. 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선박 등 우리 대기업의 수출이 나날이 증가하던 시절, 전기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를 의미하는 ‘전화기’ 학과들은 취업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들어 지방대 의대들의 서울대 공대 추월이 시작됐다. 의대라면 대학 브랜드도 상관없다는 신호였다. 변화는 2020년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리공학부나 컴퓨터공학부 등이 자연계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2년부터는 의학 계열 학과들이 상위 20위를 모두 장악했다(종로학원 배치표 기준).
기업 보상, 성과 아닌 근속연수 중심
걸출한 인재에 천편일률적 보수 적용
연구개발에 열심히 몰두할 필요 없어
미국·중국 업체, 글로벌 '스카웃 전쟁'
10년간 연평균 3만 명 국내서 해외로
실적 중심 연봉 책정 등 대책 서둘러야
‘의대에 미친 한국’은 최근 청년층에서도 뜨겁게 논의된 이슈다. KBS가 지난달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은 우리나라 의대 열풍을 ‘공대에 미친 중국’과 비교하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요즘 중국이 1980년대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전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는 의대가 아닌 공대였다. 수재들이 공대로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우리나라 제조업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런 흐름을 꺾은 계기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가 어떤 위기였나. 1997년 1월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들은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우선 삭감했다. 관련 인력들은 불황의 칼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아야 했다. “이공계 일자리는 불안하다”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수능 도입 초기만 해도 반반이었던 인문계와 자연계 응시생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대 3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때의 청소년·청년들이 지금 학부모가 됐다. 이들이 자녀에게 어떤 전공을 권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안정적이면 보상이 작고, 보상이 크면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을 얻는다. 면허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25학년도 신입생을 제외하곤 2006년부터 줄곧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고령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K-뷰티가 각광받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피부과·성형외과 수요도 급증하는 중이다. 의사로선 위험은 적은데 잠재 수익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반면 이공계 일자리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일단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년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화학·정유·디스플레이·배터리 산업이 최근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공한다고 해도 따르는 보상은 제한적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실적이나 성과가 아닌 근속연수를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제는 걸출한 천재에 대한 보상을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 제한한다. 제아무리 특출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받는 보상이 무능한 상사보다 적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개발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의대로 향하거나 회사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6월 공개한 ‘한국의 고급인력 해외 유출 현상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3만 명의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됐다”며 “컴퓨터공학, 바이오공학, 로봇공학 등 첨단분야에서 인재 유출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인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는 단기 실적 중심의 연구평가 체계, 수직적 조직문화와 함께 낮은 보상 체계가 꼽혔다. SGI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 중심 보상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공개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뒤, 샤오미가 딥시크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 뤄푸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5년생인 그녀에게 샤오미가 제안한 연봉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었다. 어디 그런 연봉을 제안하는 기업이 샤오미뿐이며, 그런 제안을 받는 개발자가 뤄푸리뿐이겠나.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세계적으로 ‘인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전 세계 이공계 인재를 싹쓸이해 가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연공서열 문화에 손발이 묶인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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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해수부 부산 이전 관련법 내실화로 해양수도 뒷받침해야
연내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앞두고 관련 법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1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여당이 힘을 싣는 김태선 의원안과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문제는 속도에만 집중한 김태선안이 사실상 유력하게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여당은 연내 해수부 이전을 위해 법안 통과에 있어 속도전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를 담은 김태선안을 해수부 부산 이전에 필요한 지원 근거로 마련할 태세다. 하지만 야당과 지역사회는 이 안이 실질적인 해양수도 육성이나 해양수도 비전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지금은 속도 못지 않게 내실도 중요하다.
부산 시민과 지역사회가 바라는 것은 명확하다. 해수부 이전은 단순한 조직 이동이 아니다. 해수부가 세종으로 이전한 이후 흩어진 조선·해양 산업 기능을 통합하고, 전문 부처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계기여야 한다. 곽규택안은 해양산업 거점 육성은 물론 해양산업특화 혁신지구 조성 등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김태선안은 이러한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법안은 이전 비용, 직원 복지 등 실무적 지원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기능 강화나 관련 기관 이전, 산업 경쟁력 강화와 같은 전략적 내용은 배제됐다. 자칫 이름뿐인 해양수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치권은 두 법안에 대한 병합심사 여부와 처리 속도를 두고 이견을 보인다. 여당은 연내 이전을 이유로 신속한 처리에 무게를 두지만 야당은 해수부 이전이 해양수도 부산의 실질적 첫걸음이 되도록 산업 기반과 정책 기능을 함께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내년 지방선거 등 정치 일정과 맞물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법안 내용 보강은 사실상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이 지역사회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최근 지역사회가 김태선안에 반발하며 비판 성명을 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수부 이전은 해양 산업과 연구, 물류와 국제 협력까지 아우르는 종합 구상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런데도 여당이 일단 이전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접근으로 김태선안을 고집한다면 이는 부산 시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해수부 이전은 단순히 건물과 인력을 부산으로 옮겨오는 행정 절차가 아니다. 이는 부산의 해양 산업 경쟁력을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대한민국 균형발전의 중대한 분수령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해수부 부산 이전 특별법에는 법안 단계에서부터 부산을 진정한 해양수도로 만들 구체적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결국 선택은 명확하다. 특별법은 단순한 이전 지원을 넘어 해양수도 육성과 국가 균형 발전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담아야 한다. 정치적 유불리나 단기적인 속도전에 매몰돼 부산의 장기적인 미래 비전을 담보할 법안을 놓친다면, 이는 두고두고 역사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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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광역시 빠진 '세컨드 홈' 특례 지역 부동산 살릴 수 있나
정부가 지역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 ‘세컨드 홈’ 특례를 늘렸지만, 부산은 광역시라는 이유로 제외됐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4일 ‘지방 중심 건설투자 보강 방안’을 발표하며 ‘세컨드 홈’ 적용 지역을 ‘인구감소지역’에서 ‘인구감소관심지역’까지 확대했다. ‘세컨드 홈’은 지방에 추가 주택 구매 시 1주택자와 같은 재산세,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감면 혜택을 주는 제도로 지난해 도입됐다. 이번 조치로 강원 강릉·동해·속초·인제, 전북 익산, 경북 경주·김천, 경남 사천·통영 등 9곳이 ‘세컨드 홈’ 특례를 받게 됐다. 그러나 부산 등 지방 광역시가 배제돼 비수도권 소멸에 대한 정부 정책이 안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는 이번에 비수도권 인구감소지역에서 양도세·종부세·재산세 관련 ‘1주택 특례’를 받을 수 있는 주택의 공시가격을 4억 원에서 9억 원으로, 취득세 특례를 받는 주택의 취득금액을 3억 원에서 12억 원으로 각각 확대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방 광역시는 제외돼 부산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부산 동구와 서구, 영도구는 인구감소지역이고 금정구와 중구는 인구감소관심지역에 포함돼 있다. “광역시의 인구감소관심지역에 세컨드 홈 혜택을 주면 주택 가격 상승 등 우려가 있다”는 게 기재부의 입장이다. 이번 대책이 몰락하는 지역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그쳐 지역의 상실감과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부동산 초양극화는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수도권은 분양시장 활황세를 보이지만, 비수도권의 건설경기 침체는 심각하다. 6월 말 기준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전국에 2만 6000여 가구인데 83%인 2만 2000여 가구가 지방에 쌓여 있다. 부산의 준공 후 미분양 주택도 2600여 가구에 달한다. 사정이 이런 데도 현행 세제는 서울 1주택자를 지방 다주택자보다 우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집값 상승률이 같다고 가정해도 지방 다주택자가 수천만 원의 양도세를 더 낸다는 분석도 있다. 과거 가격 폭등기에 도입된 다주택자 규제가 결국 서울의 ‘똘똘한 한 채’만 살리고 지방은 모두 죽는 결과를 초래하는 셈이다.
인구 소멸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부산의 부동산 경기 침체는 심각하다. 인구 유출, 산업 기반 약화라는 구조적 요인과 수요 위축이 장기화하면서 부동산 가격 하락과 미분양 아파트 증가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수년간 누적된 지역 부동산 시장의 침체를 반전시킬 정부의 전향적인 대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주택자에 대한 세금 중과를 폐지해 지방에 추가로 주택을 구입하게 하는 ‘세컨드 홈’ 특례를 부산에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생활 인구 유입과 경제 활성화를 가져온다. 서울·수도권 주택 쏠림을 완화하고, 고사 위기에 빠진 지역 부동산 시장을 살리기 위한 파격적인 처방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