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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산불 예방은 선택 아닌 생존 의무
지난해 3월, 우리는 대한민국 산불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장면을 목격했다. 경북 의성과 안동에서 시작된 불길은 강풍을 타고 영덕과 청송까지 확산되며 서울 면적의 1.7배가 넘는 산림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서른 명이 넘는 소중한 이웃이 목숨을 잃었다. 이 비극은 우리에게 분명한 경고를 남겼다. 기후 위기로 인한 극심한 가뭄과 태풍급 강풍이 맞물릴 경우, 인간의 힘만으로는 대형 산불을 막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봄철 산불 조심 기간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제2의 ‘2025년 산불’을 막기 위해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기억하자. 첫째, 산림 인근 모든 소각 행위를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 의성·안동 산불과 김해 산불 모두 작은 불씨에 대한 방심에서 시작됐다. 논·밭두렁 태우기는 병해충 방제 효과도 없을뿐더러 대형 재난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둘째, 입산자의 철저한 화기 관리와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2025년 산불 이후 산행 중 흡연과 취사 행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지만, 일부의 일탈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무심코 켠 라이터 하나가 누군가의 가족과 삶의 터전을 앗아갈 수 있다. 셋째, 지역 공동체의 감시와 신속한 신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산불은 발생 초기 10분이 골든타임이다. 연기 등 이상 징후를 발견하는 즉시 119나 관할 지자체에 신고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검게 그을린 산등성이와 이재민들의 눈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숲을 복원하는 데는 100년이 걸리지만, 무너뜨리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몸소 겪었다. 올해만큼은 잿빛 연기가 아닌 푸른 생명력이 가득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산불 예방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모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자 의무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야 할 때다. 배기수·부산진소방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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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신규 원전 계획대로 건설, 지역별 차등요금제도 속도 내야
이재명 정부가 윤석열 정부 당시 수립된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수정 없이 계속 추진하기로 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6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담긴 신규 원전 건설은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2월 확정된 11차 전기본에는 총 2.8GW(기가와트) 규모 대형 원전 2기를 2037년과 2038년에 준공하고 0.7GW 규모 소형모듈원전(SMR)은 2035년까지 만든다는 계획이 반영됐다. 이재명 정부는 당초 이 계획이 국민 동의를 얻지 못했다며 원점 재검토를 선언하고 공론화를 거쳤다. 그러나 인공지능(AI) 시대에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충을 강조해 온 이재명 정부가 신규 대형 원전과 소형모듈원전 건설을 그대로 추진하는 것은 인공지능, 전기차, 데이터센터 등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실용적인 입장 선회로 보인다. 당장 재생에너지만으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김성환 장관도 이날 “전력 분야의 탄소 감축을 위해 석탄·LNG(액화천연가스) 발전을 줄일 필요가 있어 재생에너지와 원전 중심의 전력 운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기후 대응과 에너지 수급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와 효율성·안전성이 확인된 원전을 결합한 ‘에너지 믹스’가 필요함을 인정한 셈이다.
신규 원전 건설 추진 소식에 원전이 밀집한 부산·울산·경남 주민들은 착잡한 심경이다. 원전 사고,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등에 대한 불안을 늘 안고 살지만, 차등 전기료와 같은 경제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역별 차등전기요금제는 2024년 6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 제정 당시 올 상반기 도입이 예고됐다. 하지만, 어느새 ‘도입 검토’로 후퇴했고, 시행 시기도 올 하반기 이후로 연기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1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에너지 공급과 관련해 지역균형발전과 ‘지산지소’ 대원칙을 강조한 바 있다. 정부는 전력시장 구조 개편에 대한 확실한 의지를 보이고, 지역별 차등요금제도 시행에 속도를 내야 한다.
수도권에는 전기 생산 시설이 부족해 필요한 용량 상당 부분을 비수도권에서 끌어온다.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송전 비용도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함께 부담한다. 원전 밀집 지역은 사용후핵연료 저장에 따른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수도권은 차등 전기료 도입에 딴지를 걸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오죽하면 고통 분담 차원에서 전기를 많이 쓰는 서울과 수도권에 원전을 지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차등전기요금제가 시행된다면 AI 산업과 같은 전력 수요가 많은 첨단 산업의 지방 이전을 촉진할 수 있다. 전력 자급률이 높은 부울경 지역의 산업 생태계를 바꿀 기회가 된다. 정부는 국가균형발전을 고려해 차등전기요금제 도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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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코스닥 지수 1000 돌파, 신산업 생태계 혁신 계기 만들자
코스닥 지수가 4년여 만에 1000선을 돌파하며 이른바 ‘천스닥’ 시대를 다시 열었다. 26일 코스닥 지수는 전일 대비 70.48포인트(7.09%) 급등한 1064.41로 마감하며 4년 5개월여 만에 1000선을 다시 돌파했다. 장중에는 급등세로 약 9개월 만에 사이드카가 발동되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의 코스닥 활성화 정책 기대, 바이오·이차전지 등 성장주 강세, 개인과 기관·외국인의 동반 매수세가 지수를 끌어올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앞서 정부가 ‘코스닥 3000포인트 달성’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코스닥 지수를 달군 영향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지수 1000돌파는 오랜 정체를 겪어온 코스닥 시장에 분명한 전환 신호로 읽힌다.
이번 천스닥은 과거와 결이 좀 다르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정부의 불공정 거래에 대한 강경 대응과 연기금 진입 여건 개선, 부실기업의 신속한 퇴출, 첨단 기술기업 상장 활성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업종 구성도 IT 편중에서 벗어나 바이오·이차전지·소재·게임 등으로 고르게 확장됐다. 거래소가 인공지능(AI)·신재생에너지·에너지저장장치(ESS)·우주산업을 핵심 기술로 지정해 맞춤형 기술심사를 도입한 점 역시 변화를 뒷받침한다. 대형주 조정 국면에서 중소형 성장주로 수급이 이동하는 흐름은 시장 체력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번 상승을 거품이 아닌 회복으로 보는 시각에 힘이 실리는 배경이다.
코스닥 지수가 천스닥 고지를 밟았지만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외국인 투자 유입이 필수적이다. 개인 투자자 중심의 시장 구조로는 성장에 한계가 뚜렷해서다. 외국인 투자를 끌어들이려면 상장사의 실적 가시성이 전제돼야 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코스닥 시가총액 544조 원 중 외국인 보유 비중은 9.87%에 그쳤다. 2020년 이후 줄곧 9%대에 머물며 코스피와 대비된다. 불안 요인은 또 있다. 실적이 불투명한 기업, 테마 쏠림, 개인 중심의 변동성 구조다. 디지털자산이나 모험자본이 해법처럼 거론되지만 자본은 결국 기업의 경쟁력과 수익성으로 향한다.
코스닥은 올해 출범 30주년을 맞았다. 1000선 돌파는 코스닥 역사에서 손에 꼽힐 장면이다. 하지만 숫자만으로 체질 변화를 단정하긴 이르다. 닷컴버블 붕괴 이후 20년간 1000선을 넘지 못했던 기억도 여전하다. 증권업계는 그동안의 코스닥 부진이 위험자산 선호가 대형주에 쏠린 결과라며 모험자본이 유망 산업과 기업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관건이라고 본다. 단기 부양책보다 산업 경쟁력을 키우는 정책 설계가 중장기 반등을 좌우한다는 지적이다. 불공정 거래에 대한 무관용, 상장·퇴출 기준의 엄정함, 혁신기업이 성장할 생태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렇다고 제도 개선만으로 성과를 담보할 순 없다. 바이오와 이차전지에서 실적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천스닥은 다시 신기루로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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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병오년, 인간과 AI의 켄타우루스적 협력
병오년 새해가 밝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병오년은 불과 말의 기운이 겹치는 해다. 불은 변혁과 에너지를, 말은 질주와 도약을 상징한다. 이 상징적 해석은 단순한 운세 풀이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기술·사회적 전환을 설명하는 은유로 읽을 수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의 확산과 인간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병오년의 기운과 맞물려 강렬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 속 켄타우루스는 반인반마의 존재로, 인간의 지혜와 말의 속도를 동시에 지닌 상징이다. 체스 분야에서 ‘켄타우루스적 사고’가 처음 등장했을 때, 인간의 직관과 AI의 계산을 결합한 팀이 단독 인간이나 단독 AI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이 개념은 이제 단순한 게임을 넘어 사회 전반에 적용된다.
여기에 최근 주목받는 개념이 피지컬 AI다. 피지컬 AI는 단순히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넘어, 센서·로봇·자동화 장비와 결합해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하는 AI를 뜻한다. 즉, 데이터 분석과 의사결정이 현실의 물리적 행위로 이어지는 단계다. 제조업의 자동화, 물류의 최적화, 의료 현장의 로봇 보조, 우주 탐사의 위성 제어까지 피지컬 AI는 인간과 기계의 결합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기술이다. 제조업이 주력인 경남도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AI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다. ‘전통 제조’를 ‘AI 제조’로 탈바꿈시킨다는 전략이다.
경남도는 올해를 AI 산업 도약의 원년으로 선언하며 피지컬 AI를 핵심 축으로 삼았다. 제조업 혁신을 위해 ‘경남형 피지컬 AI 기술개발 및 실증’ 예산 666억 원을 투입하고, 자동차 부품 데이터를 활용한 제조 챗-GPT 시범사업으로 국비 197억 원을 확보했다. 또한 ‘AI 이노베이션 아카데미 구축(73억 원)’을 통해 5년간 600명의 전문 인재를 양성하고, 위성개발혁신센터와 우주환경시험시설을 구축해 전국 유일의 첨단위성 글로벌 혁신특구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한 산업 육성 정책을 넘어선다. 피지컬 AI가 확산되면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지만, 동시에 노동의 구조적 전환을 불러온다. 단순 반복 업무는 이미 AI가 대체하고 있으며, 제조·운송·서비스업에서도 인간의 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 따라서 경남도의 전략은 기술 도입과 함께 인간적 삶의 가치 보호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AI 시대의 핵심은 ‘누가 고삐를 쥐고 있느냐’이다. 인간이 주도권을 잃는 순간 AI는 도구가 아니라 지배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제도적 차원에서 인간 주도권을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윤리적 가이드라인과 법적 울타리를 마련해 AI 오남용을 방지하고, 인간이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또한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적 사고와 질문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질문은 방향을 정하고, 해석은 의미를 부여한다. 미래 세대가 AI의 종속적 소비자가 아닌 주체적 활용자가 되도록 질문과 토론 중심의 학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피지컬 AI가 확산되더라도 인간이 빛나는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창의, 돌봄, 공감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 능력이다. 제조업에서는 인간의 직관적 설계와 AI의 데이터 분석이 결합될 수 있고, 의료와 돌봄에서는 인간의 공감 능력과 AI 진단 보조가 함께 작동할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인간의 질문 능력과 AI의 맞춤형 학습 지원이 결합해 새로운 학습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경남도의 투자 방향은 바로 이 영역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확장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산업 혁신과 인간적 삶의 풍요로움, 공동체적 가치가 병행될 때 비로소 AI 전략은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병오년은 변화와 도약의 해다.
경남도의 AI 전략은 켄타우루스적 협력, 즉 인간과 AI가 함께 나아가는 길을 상징한다. 인간은 질문을 던지고, AI는 답을 제시하며, 다시 인간은 그 답을 해석한다. 이 순환 속에서 경남도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풍요로운 인간적 삶과 산업 혁신을 동시에 이끌어낼 수 있다. AI는 인간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확장하는 도구다. 경남도의 선택은 단순한 산업 정책이 아니라 미래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언이다. 병오년의 불과 말의 기운 속에서 인간과 AI, 그리고 피지컬 AI가 함께 달려야 할 길이 이제 경남에서 펼쳐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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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코딩의 계보학
198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이 모 씨는 대학 입학 이후 컴퓨터를 알아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포트란’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과학기술 계산용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을 문과생인 그가 왜 배워야 했는지 의문이지만 그는 그렇게 포트란을 배우면서 코딩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다.
손으로 작성한 포트란 프로그램 소스 코드를 실행해 보려면 펀칭 머신이라는 것을 사용해야 했다. 빳빳한 카드에 구멍을 뚫어 리더기에 집어 넣으면 카드에 뚫린 구멍의 위치에 따라 코딩 내용이 컴퓨터에 입력되는 방식이었다. 수시로 구멍을 잘못 뚫어 에러가 나오는 통에 코딩 숙제 제출을 위해서 일주일을 펀칭 머신과 씨름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대학생들은 ‘파스칼’과 ‘C’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느라 바빴다. 역시나 컴퓨터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인 코딩을 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언어 규칙을 습득해야 했으나 코딩 프로그램 제출을 위해 펀칭 머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플로피 디스크라는 말랑말랑한 디스크에 코딩한 내용을 저장해 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당시로서는 거액인 수백만 원짜리 PC를 구매하려고 아르바이트에 열중하기도 했다.
컴퓨터가 미래를 좌우하는 세상이 오고 그 컴퓨터에 지시를 내리는 방법인 코딩을 할 줄 알아야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는 강박이 낳은 이런 풍경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프로그래밍 언어가 C에서 ‘자바’나 ‘파이선’ 같은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코딩 숙제를 하는 방식도 플로피 디스크를 벗어나 이메일로 보내거나 클라우드에 저장해 올리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코딩은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이 “국가의 미래”라고 외쳤을 정도로 강조됐다. 국내에서도 초등학교부터 코딩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기도 했다. 하지만 AI가 생활로 스며든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코딩은 더 이상 국가의 미래가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AI에게 대화하듯 지시만 하면 알아서 코딩을 해 주는 ‘바이브 코딩’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최근 부산시교육청도 부산형 AI 교육 밑그림에 기존 코딩 대신 바이브 코딩을 포함시킬 기세다. 아직은 바이브 코딩에서도 기존의 코딩 교육처럼 코딩의 기본 원리와 논리 구조를 배우겠지만 그마저도 생략되는 날이 곧 올 듯하다. 단기간에 AI가 만든 변화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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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학폭 낙방!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한다. 학폭(학교 폭력) 피해자가 평생 어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드라마 특성상 다소 과장된 장면도 있었지만, 피해자의 복수심·좌절·체념·분노와 같은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를 얻었다.
미성년기에 입은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성장 과정 자체가 흔들리고, 관계·학업·자존감이 함께 무너진다. 학폭이 단순한 ‘사춘기 일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건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올해 대입 전형에서 나타난 변화는 상징적이다. 학폭 가해자 대다수에게 사실상 철퇴가 내려졌다는 점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이 공개한 ‘2026학년도 수시 전형 학폭 반영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70곳에 학폭 가해 전력이 있는 수험생 3273명이 지원했고 이 가운데 2460명(약 75%)이 불합격했다. 특히 서울 주요 11개 대학으로 범위를 좁히면 지원자 151명 중 단 1명만 합격하고 150명이 탈락했다. “학폭 가해자는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말이 입시에서도 현실적인 위험 요소가 된 셈이다.
이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정부는 2023년 ‘학폭 무관용’ 기조를 내걸고 2026학년도부터 모든 대학 전형에서 학폭 조치 사항을 반영하도록 했다. 대학들은 감점 기준을 마련해 입시에 적용했다. 대입은 1~2점,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점 차이로도 당락이 갈린다. ‘학폭 감점’이 상징적 문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합격 여부를 가르는 변수로 작동했다. 현재 진행 중인 정시 전형에서도 학폭 감점이 적용되는 만큼 불합격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폭 처벌의 강도가 아니라, 사회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몇 대 맞은 것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말로 묻히던 폭력이 이제는 “기록으로 남아 가해자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문제”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학폭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지가 ‘학폭 낙방’ 시스템으로 구현된 셈이다. 물론 진정한 반성·재발 방지 등 실질적 노력이 학폭 근절 대책에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 이뤄져야 하지만, 학폭을 ‘지나가는 일’로 두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변화가 학교 담장 안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는 폭력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학폭 못지않게 심각한 직폭(직장 내 폭행·폭언)은 어떠한가. 현실에서는 직폭 가해자 다수가 여전히 직장을 다니는 반면, 피해자 10명 중 7명은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수치심 탓에 휴직·이직·퇴사를 고민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더욱 선명해진다. 미성년자인 학생에게 ‘학폭 낙방’은 가해자의 몫이 되지만, 성인인 직장인에게 ‘직폭 퇴사’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인이라면 ‘학폭 낙방’과 같은 강제적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학폭 낙방이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의지를 통해 현실이 됐듯이, 이제는 직폭 퇴사 역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이 되도록 사회적 의지가 작동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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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돈로주의'와 한국의 외교안보
2026년 새해 벽두 국제사회를 경악시킨 두 개의 사건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연달아 발생했다. 하나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체포해 미국으로 압송한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북극해에 위치한 덴마크의 자치령 그린란드를 병합하려는 움직임이다.
먼저 1월 3일 발생한 베네수엘라 사태다. 미국은 주권 국가인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마약 밀매 및 국제 범죄 연루 혐의를 들어 베네수엘라 영토 내에서 신병을 확보한 뒤 미국으로 압송했다. 미 법무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마약 테러리즘’ 혐의로 기소해 온 상태였으며, 이번 조치는 이러한 사법 절차를 근거로 단행됐다. 베네수엘라는 남미의 대표적인 반미 국가이자, 2000년대 초 이후 중국이 추진해 온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중남미 주요 거점 국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작전의 핵심은 서반구를 미국의 배타적 세력권으로 설정하고 외부 강대국, 특히 중국이 이 지역의 상업·자원·핵심 자산에 관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데 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그린란드에 대한 병합 의지를 재삼 밝히며 무력 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병합 이유로는 러시아 해군을 차단할 수 있는 교두보, 희토류와 석유 등 풍부한 천연자원, 그리고 북극항로와의 연계를 제시했다.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에 미국의 오랜 동맹국인 덴마크는 강하게 반발했다. 덴마크를 선두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하자, 미국은 이에 대응해 10~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NATO 동맹국 간 긴장은 급격히 고조됐다. 이후 1월 21일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을 계기로 덴마크의 통치권을 형식적으로 존중하는 선에서 그린란드 내 미군 기지 건설과 안보 협력 강화를 포함한 미국 주도의 합의 틀이 마련되며 사태는 조정 국면에 들어갔다.
이렇듯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난 이 두 사건은 미국의 서반구에서의 우선적 권리와 영향력을 주장해 온 전통적 먼로주의(Monroe Doctrine)를 트럼프식으로 재해석한 이른바 ‘돈로주의(Donroe Doctrine)’의 작동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즉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특정 국가의 지도자도 단독 행동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또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지역에서는 주권이나 동맹 관계 역시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통상 새 행정부 출범 시 작성되는 미국의 최상위 외교·안보 전략 문서인 국가안보전략(NSS)과 이를 군사적으로 구체화한 문서인 국가방위전략(NDS) 역시 트럼프의 ‘돈로주의’를 토대로 구성돼 있다. 2025년 12월 4일 발표된 ‘2026 NSS’는 서반구와 인도·태평양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지역은 미국의 핵심 이익과의 연계성에 따라 관여 수준을 조정하겠다는 방향을 분명히 했다. 또한 동맹국도 자동적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방위 능력과 산업·기술 역량, 공급망 안정성 등 실질적 기여 능력을 기준으로 평가하겠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한국에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어 1월 23일에 발표된 ‘2026 NDS’는 북한, 특히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를 포함한 미사일 전력이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 본토에도 위협이 된다고 평가했다. 반면 북한 비핵화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동아시아를 넘어 인도·태평양 차원에서의 역할 분담은 보다 분명히 했다. 즉 한국의 국방 능력을 높게 평가하면서 북한 억지의 주도적 책임자로 설정했고, 일본은 유엔사 후방기지를 포함해 중국 억제의 전방기지로 규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인 지원’으로 조정됐다. 이는 한반도 방어의 기본 구조를 ‘미국 주도’에서 ‘한국 주도·미국 지원’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전략적 방향 전환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의 ‘돈로주의’가 구체화되는 가운데, 한국의 이재명 정부는 한반도 안보의 ‘1차 책임 국가’라는 역할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방위 부담을 전담한다는 차원을 넘어 북핵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위기관리와 억지, 나아가 한반도 평화 추진의 주체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안보 전략 전반을 재설계할 수 있는 한국의 역량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전략적 자율성의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조건들이 한미 간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다면, 트럼프의 ‘돈로주의’가 요구하는 동맹의 현대화는 협력의 심화가 아니라 위험의 일방적 이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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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수도권 부동산 규제 원칙 지키고 얼어붙은 지역에 온기를
정부가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부활을 비롯한 세제 개편을 공식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이 술렁이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3일 SNS에 올린 글에서 5월 9일에 종료되는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유예는 없다고 못 박았다. 지난해 발표된 10·15 대책에도 불구하고 서울 일부 지역은 상승세가 이어져 시장의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부동산 과열을 억제하겠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적절한 대응이다. 다만, 지방은 장기 침체 국면인 점에서 투 트랙 접근법이 필요하다. 과열 지역에는 확실한 규제 메시지를 보내되, 침체 지역에는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일괄 적용이 아닌 수도권과 지방을 구분하는 정책 감각이 절실한 대목이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조정대상지역에 적용된 양도세 중과는 전임 정부 시절인 2022년부터 유예가 반복되면서 정책 신뢰를 떨어뜨렸다.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해친 결과는 매물 잠김, 가격 급등, 투기 심리 확산이라는 악순환이었다. 특히 최근 주식시장 차익 실현 자금이 수도권 부동산으로 유입되는 조짐이 나타나면서 투기적 수요가 시장을 교란할 위험은 어느 때보다 크다. 이 대통령이 ‘부동산 불로소득 공화국 수술’, ‘정부 이기는 시장 없다’ 등 강경한 대응 방침을 밝힌 것은 불합리한 기대 심리를 차단하겠다는 의지일 때 의미를 갖는다. 정부는 투자 목적의 주택 매물이 부작용 없이 시장에 나올 수 있는 유인책을 적극 구사해야 한다.
정부가 강력한 세제 정책을 도입하면 투자처를 찾는 자본이 침체 국면이 장기화되고 있는 부산 등 지방에 몰리는 풍선 효과도 기대된다. 실제 부산의 경우 지난해 11월 미분양 7727호, 준공 후 미분양 2655호로 건설 경기가 저점을 찍었다. 이러한 부진은 건설 수주액과 고용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수도권 자본이 지방 부동산에 유입되면 긍정적 효과도 기대된다. 다만 지역 내 온도 편차까지 포함한 세밀한 정책 수단이 필요하다. 부산에서도 해운대·수영·동래는 과열 조짐이지만 나머지 권역은 냉기만 감돌기 때문이다. 또 투기성 자금이 전월세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소지도 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처방전이 달라야 한다는 의미다.
수도권 과열은 잡고, 지역 침체는 살려야 한다. 이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병행할 수 있는 정책 목표다. 조정대상지역의 양도세 중과는 원칙대로 시행하되, 단기 매매나 갭투자에 추가 가산을 도입해 투기적 수요를 걸러 내야 한다. 반면 지방은 얼어붙은 심리를 녹일 수 있는 정책 수단을 도입해 정상적 거래와 주택 공급을 늘려야 한다. 미분양관리지역이나 준공 후 미분양이 많은 지역에 대한 한시적 세제 혜택을 검토할 수 있다. 실수요 중심 거래나 공공성을 충족한 정비사업에 대한 한시적 인센티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불로소득과 단기 차익에는 칼을 대되, 지방의 건설 경기와 일자리, 실수요는 보호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은 실효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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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의혹 양산 이혜훈 통합 인사 지명 철회로 끝날 일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명을 철회했다. 지명 28일 만이다. 이 기간 동안 아파트 부정 청약부터 보좌진에 대한 섬뜩한 폭언과 갑질, 영종도 땅 투기, 자녀 증여세 대납, 자녀 병역과 취업·입시 특혜 논란 등 숱한 의혹이 제기됐다. 이 대통령이 정치권 통합을 위해 시도한 이번 인사는 국민들에게 피로감만 안긴 채 끝났다. 이 전 후보자의 어설픈 변명은 국민들의 실소와 분노만 유발했다. 이 전 후보자를 지명하기 전에 청와대가 제대로 된 검증조차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는 결국 진영을 가리지 않고 기용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탕평 인사 취지마저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와대 홍익표 정무수석은 25일 “이 대통령은 고심 끝에 이 후보자 지명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홍 수석은 이어 이 전 후보자가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전 후보자에 대한 의혹의 핵심은 2024년 서울 서초구 아파트 청약 과정에서 장남이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속여 당첨됐다는 것이다. 이 전 후보자는 당시 장남이 결혼한 것은 맞지만 부부 관계가 최악이라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등 지난 23일 청문회에서 비상식적 답변으로 일관했다. 정치권과 기득권의 민낯을 드러냈다는 평가다. 이 대통령이 부적절한 인물에 대한 지명을 늦게라도 철회한 것은 결자해지 차원에서 당연한 귀결이다.
이 전 후보자에 대한 지명이 철회됐다고 제기된 의혹들을 덮어서는 안 된다. 장남과 동거하는 것처럼 속여 청약 가점을 부풀렸다는 ‘위장 미혼’ 논란은 명백한 범죄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청약 무효 등의 조치도 필요하다. 장남의 연세대 입학을 두고 제기된 이 전 후보자 남편의 ‘부모 찬스’ 의혹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영종도 토지 매매 관련 양도세 축소 논란도 정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의혹이 남지 않도록 즉시 수사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는 후속 절차를 서둘러야 한다. 특히 청와대는 국민 공분을 부른 이번 지명 사태를 계기로 인사 검증 시스템에 원천적 하자가 없는 지를 제대로 되짚어야 할 것이다.
이 전 후보자는 12·3 비상계엄을 옹호하며 ‘윤어게인’을 외친 인물로 애초부터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인사 파문의 가장 큰 원인은 정략적이면서도 부실한 선택 때문이라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통합과 탕평 인사의 성공 여부는 국민이 납득할 만한 최소한의 도덕성과 자질을 갖춘 적합한 후보자를 선택하는 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엄정한 검증도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전문성을 가진 인물을 폭넓게 발탁해 국가 위기를 하루빨리 극복해야 한다. 이 대통령이 한층 진정성 있는 탕평 인사 방안을 하루빨리 내놓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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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올해는 '천만 영화' 탄생할까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영화 ‘국보’(2025)를 뒤늦게서야 관람한 이유다. 이미 멀티 플렉스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진 뒤라 리클라이너 상영관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175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부키 분장을 한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고, ‘인간 국보’를 향한 이들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 열정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으로 넘어오기 전 영화관을 찾은 것은 역시 잘한 결정이었다. 물론 생소한 발성과 몸짓의 가부키 공연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영화 ‘패왕별희’(1993)의 경극이나 드라마 ‘정년이’(2024)의 여성 국극이 그러했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 장르를 새롭게 접하는 즐거움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할까.
재일 교포 이상일 감독이 만든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지난 18일 기준 관객 1370만 명, 흥행 수입 193억 엔을 넘어섰다. 일본 실사 영화 흥행 수입 1위 기록을 이미 지난해에 갈아 치운 바 있다.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173억 엔)가 세운 기록을 22년 만에 뛰어넘어 화제가 됐다. 일본 현지에선 가부키 공연을 찾는 관객까지 늘고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파급효과가 크다고 한다.
반면 한국 영화의 최근 성적표는 처참하다. 지난해 1000만 관객 영화는 전무했고, 관객 500만 명을 넘긴 작품은 ‘좀비딸’(2025) 단 한 편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이후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가운데서도 ‘범죄도시2·3·4’(2022·2023·2024) ‘서울의 봄’(2023) ‘파묘’(2024) 등 ‘천만 영화’는 꾸준히 나왔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 ‘가능한 사랑’도 영화관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택해 영화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일부에선 이를 ‘극장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있을 정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탈한 관객은 회복될 조짐이 없다. OTT 플랫폼이 급성장한 가운데 젊은 층을 중심으로 관객의 취향은 더욱 더 세분화되고 있다.
그러나 극장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관객 감소에 따른 수익 감소, 투자 위축, 제작 인력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개봉 편수마저 눈에 띄게 줄었다. 관객이 즐길 만한 다양한 콘텐츠 공급 자체가 어려운 구조적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나마 새해엔 구교환·문가영 주연의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2025)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25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만약에 우리’는 전날까지 누적관객수 19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이 영화는 이미 개봉 12일 만에 손익분기점(110만 명)을 넘긴 바 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관객 200만 명은 가뿐히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멜로 영화가 2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19년 ‘가장 보통의 연애’(292만 4000여 명)가 마지막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두 남녀의 연애와 성장 스토리가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정통 멜로 장르의 부활에 대한 희망마저 읽힌다.
영화계에선 특정 장르에 편중된 투자,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국 영화가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과 실험이 이뤄질 수 있는 산업적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된 과감한 시도와 신인 감독들의 성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
높아진 극장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문화가 있는 날’ 제도를 매주 수요일로 확대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OTT처럼 구독료를 내고 극장에서 일정 횟수를 저렴하게 볼 수 있는 ‘구독형 영화 패스’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다행히 올해는 거장 감독의 신작 개봉이 잇따라 기대를 모은다. 먼저 설 연휴를 앞두고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가 관객과 만난다. ‘곡성’(2016) 이후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도 7월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기대작이다. ‘천만 영화’로 상징되는 ‘대박 영화’에 대한 바람은 우리 영화산업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검증된 감독들의 대작을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관객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작품을 만나고 싶은 갈망도 크다. 소위 말하는 ‘대박’ ‘중박’ 영화가 골고루 나오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독립·예술영화도 더 풍성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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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넷플과 K콘텐츠 10년
넷플릭스는 2016년 1월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넷플릭스에 공개된 최신 영화는 1년 전 개봉된 ‘간신’이었다. 최근 드라마나 예능 콘텐츠도 없어서 영향력은 미미했다. 자국 콘텐츠 역량이 높은 한국 시장의 특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후 절치부심한 넷플릭스는 K콘텐츠 지형에 변화를 일으켰다. 2019년 최초의 한국 시리즈인 ‘킹덤’을 선보이며 ‘K좀비’ 글로벌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이었다. 글로벌 톱10 순위에 32주간 머물렀고, 9주간 1위를 차지하며 대박을 터트렸다. 2021년부터 집계한 글로벌 톱10에 지난 5년간 이름을 올린 한국 작품만 210편이 넘는다. K콘텐츠가 넷플릭스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넷플릭스는 코로나 팬데믹 때 ‘TV·극장’에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플랫폼의 무게 중심을 급격히 이동시키며 콘텐츠 산업구조를 바꿔 놓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대중은 극장을 멀리했고 영화 산업은 크게 위축됐다. 2020~2021년 한국 영화 ‘승리호’ ‘사냥의 시간’ 등은 극장 상영을 포기하고 넷플릭스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극장표 1장 값으로 한 달 내내 모든 콘텐츠를 즐기는 넷플릭스는 매력적인 플랫폼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의 보편화로 콘텐츠 시청 행태가 개인화되면서 넷플릭스 영향력은 더 커졌다.
반면, 국내 콘텐츠 업계에 가져온 그림자도 짙다. 자본력과 글로벌 유통망을 갖춘 넷플릭스의 독주로 국내 OTT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다. 또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이 IP(지식재산권)를 독점하는 구조로 인해 한국이 ‘글로벌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방식은 안정적이지만, 대박이 났을 때 제작사의 추가 수익이나 IP 권리 확보는 제한적이다. IP 주권 확보는 K콘텐츠 활성화 차원에서 중요한 축이다. 이를 위해 토종 OTT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IP를 보유해야 꾸준히 수익이 발생하고, 속편 제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가 지난 10년간 K콘텐츠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최적의 창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과 규모에서 열세인 국내 OTT가 동일 조건에서 거대 글로벌 플랫폼과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이 지속한다면 장기적으로 콘텐츠 산업 생태계 약화는 불가피하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지원으로 토종 플랫폼의 체력과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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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의 문화시선] 연대와 숫자의 힘 ‘퐁·반 500’
지난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A 갤러리는 삼삼오오 모여든 작가들로 북적였다. 갤러리에 작가들이 모이는 건 당연하지만, 이날만큼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결기에 찬 듯하면서도 마음 맞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덕분인지 축제 같은 분위기도 전해졌다. 20여 명의 작가는 직접 가져온 한두 점의 작품을 B 작가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다.
A 갤러리를 나와 C 화랑을 찾아갔는데 그곳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C 화랑은 작가 겸 기획자 D가 중심이 돼 쇼윈도에 작품을 걸고, 전시장을 꾸미느라 여념이 없었다. 또 다른 E·F 전시 공간도 사정은 비슷했다. 퐁피두 분관 유치 반대 서명 500명을 기념하는 릴레이 미술 전시 ‘퐁·반 500, 부산 미술인 한마음展’이 이날 오후 부산 전역의 20여 갤러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돼 2월 8일 전후까지 계속된다.
부산미술협회 퐁피두 분관 유치 반대 대책위원회 김성헌 공동대표는 “부산시에서 추진 중인 프랑스 퐁피두센터 분관 유치 사업과 그에 수반된 이기대 천혜 자연 난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뜻을 부산의 미술인과 지역 화랑이 공동으로 표명하는 집단적 예술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김 공동대표는 이날 현재 참여 작가 429명, 반대 서명 미술인은 685명으로, 참여 갤러리(26개)와 작가 수는 증가 중이라고 덧붙였다.
전시 내용은 ‘퐁피두 반대’(퐁·반)라는 강력한 사회적 슬로건과 달리, 작가의 평소 화풍이 담긴 일반적인 작품이 대부분이다. G 작가는 “연대에 방점을 두고 참여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의 내용보다는 ‘500명 이상의 작가가 한목소리를 내며 모였다’는 집단 행위에 큰 무게를 둘 수 있다. 다만, 모 갤러리 대표 H와 J는 “전시장을 구하지 못한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장소를 제공했는데 이를 불편하게 보는 시각이 있어서 곤혹스럽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물론 이번 전시는 세련된 큐레이팅이 가미된 대형 기획전과는 결이 다를 수 있다. 그래도 회화뿐 아니라 사진, 판화, 조각 등 부산 미술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부산 미술의 ‘두께’를 보여준다. 관람객은 “이 작가는 퐁피두 유치를 반대하면서 왜 평화로운 풍경화를 내걸었을까?” “이 추상화가 퐁피두라는 거대 자본 미술관과 부딪혔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까?”로 질문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부산 작가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퐁피두)가 없어도 치열하게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존재로서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퐁피두 부산 분관’ 본계약 체결 시한이 3월 말로 연장된 만큼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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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션 뷰] 인공지능 대전환으로 새로운 150년 열자
1876년 2월 26일, 근대 무역항으로 첫 문을 연 이래 부산항은 대한민국 경제와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다. 지난 150년간 부산항은 대한민국 수출입 관문으로서 국가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왔으며, 개항 150주년을 앞둔 지금 세계 2위의 컨테이너 환적 허브라는 위상을 듬직하게 지키며 앞으로의 150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마주한 대변혁기는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이 가져온 산업혁명의 변화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다. 지난 150년이 물동량이라는 ‘양적 성장’을 통해 부산항의 체급을 끌어올렸다면, 앞으로의 150년은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한 ‘질적 성장’에 기반해야 한다. 이 질적 성장이란 곧 고부가가치 성장을 의미하며,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을 바탕으로 한 지능형 항만으로의 진화를 뜻한다.
1876년 개항 부산항 국가 경제 발전 견인
AX 통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전환 이뤄야
항만물류 전 과정 AI·로봇·자동화 도입
미래형 항만 도약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특히,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계기로 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한 부울경이 해양수도권을 형성하고 부산항이 그 핵심에 있음을 고려할 때 부산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부산항 AI 대전환(AX)’이 핵심 전략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부산항 AI 대전환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할까? 필자는 그 시작점을 2024년 4월 개장한 부산항 신항 7부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 자동화 부두’, ‘부두 내 무인 차량이 다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물론, 개장 초기 몇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이는 미래 지능형 항만으로 거듭나기 위한 학습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습득한 운영 데이터와 노하우는 이제 착공한 부산항 진해신항 자동화 부두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럼, 2030년 완공 예정인 진해신항은 어떤 모습일까? 진해신항에는 국내 최초로 항만 하역 장비의 실시간 제어를 위한 피지컬 AI 기능이 탑재된 ECS(Equipment Control System, 하역 장비 통합 제어 시스템)가 도입될 예정이다.
즉, 기존 컨테이너 부두에서는 터미널 운영 시스템(TOS)이 부두 내 여러 하역과 이송 장비의 개별 작업을 지시하는 수준이었다면, ECS는 부두 내 모든 자동화 장비를 일괄 통제하고, 나아가 작업의 최적 배분까지 수행할 것이다.
AI 대전환을 위한 부산항의 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다. 먼저 디지털에 기반한 부산항 항만물류 통합 플랫폼인 ‘체인 포털(Chain-Portal)’을 통해 실시간으로 해상과 육지 간 화물과 선박, 부두의 운영 정보가 항만 이용자들의 물류 최적화를 위해 제공되고 있다.
특히, 부산항을 이용하는 1만 7000여 화물 차량 모두가 이용하는 모바일 앱인 ‘올컨e’(All Con-e)를 통해 매번 부두를 출입할 때 전자인수도증(E-Slip)이 전면 도입되어 사용 중이다. 화물차 기사들이 직접 수령해야 했던 종이 인수도증을 대신하기 때문에 ‘항만형 하이패스’라고도 불린다.
또 부산항에서 제공되는 디지털 기반 기능 중에는 대량의 화물과 다수의 트럭을 최적으로 연계하여 환적 화물 운송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환적운송시스템(TSS)’ 서비스도 있다. 향후 체인 포털에 AI를 접목하여 부산항을 이용하는 선박과 트럭의 정확한 도착 시간을 예측하여 제공하는 기능 등을 갖추어 플랫폼을 점차 고도화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항만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박과 하역 현장에서는 AI 도입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선박의 컨테이너를 고정하는 고위험 작업인 라싱(Lashing)과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줄잡이 분야에 로봇을 투입하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러한 피지컬 AI 기술에 더해 부두 내에서 컨테이너를 자율주행으로 운송할 항만 모빌리티의 도입은 그간 고위험 작업 구역으로 여겨지던 항만 현장의 위험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피지컬 AI, 로봇·자동화 기술이 영향을 미치게 될 노동 분야와의 사회적 협의는 노사정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지난 150년, 부산항은 숱한 위기를 기적 같은 회복력으로 이겨내며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허브로 우뚝 섰다. 우리가 마주한 AI 대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앞으로 우리의 선택과 실행이 대한민국 항만의 새로운 150년을 이끄는 엔진이 될 것이다.
이 거대 전환기를 맞이하여 부산항만공사는 ‘선도자(First Mover)’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대변혁기, 명확한 목표 아래 수립된 전략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실행해야 한다. 부산항의 미래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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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은색 등불 하나 켜고
커피를 내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빛난다. 아니, 오른손 검지를 덮은 커다란 은색 반지가 번득인다. 도대체 저 투탕카멘 마스크 문양 반지는 어디서 파는 것인가.
“만들었어요.”
마음을 읽었을까. 남자가 커피잔을 건네면서 잠시 두 손을 치켜들어 보여준다. 요즈음은 장신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이 유행이라고 한다.
관심을 가지면 보이는 법. 동네마다 반지 공방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연인과 부부와 동료와 친구들이 저마다의 문양으로 만든 기념 반지를 끼고 손을 포갠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내친김에 전화 예약을 하고 작업장을 찾았다. 나는 편편한 실버 링에다 수필가답게 에세이라는 영문을 새기기로 했다. 그러면 창작의 마음가짐이 단단해질 것만 같았다. 얇은 실버 막대 하나가 앞에 놓여졌다. 이것을 한 시간여 다듬으면 반지가 될 것이다. 좀 더 긴 것을 선택하면 팔찌가 만들어질 터이고 넓은 것을 두드리면 목걸이 펜던트도 가능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비단 이 작은 금속만 그러할까. 자식되기 친구되기 부모되기 어른되기 그리하여 점점 인간이 되어 가기…. 내 삶도 새로운 ‘되기’의 연속 과정이었지만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늘 형태만 일그러졌다. 이 막대도 망치질과 사포질을 하고 불을 가하여 마침내 반지되기에 이를 것이다.
은 막대에 힘을 주니 약간 휘어진다. 이제 영문 펀치에서 단어 ‘ESSAY’를 순서대로 골라 도장 각인을 할 차례다. 망치로 두세 번 때려서 단번에 글자를 새겨야 한다. 그런데 기계 작업이 아니므로 간격과 높이를 맞추기 어렵고 의도대로 찍히지 않으니 쉽지만은 않겠다. 실전에서는 첫머리 글자부터 비뚤배뚤 튀어 오른다. 어찌하겠는가, 핸드메이드의 매력에 의미를 둘 수밖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도 어긋날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당신이 틀렸다고 우긴 것도 모두 틀렸던가. 나도 틀릴 수 있고 당신도 맞을 수 있는데 그것을 깨닫는 데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글자도 새겼으니 둥글게 말아서 이음새를 붙여준다. 은가루를 녹여 틈을 메우고 토치로 용접한다. 파란 불꽃에서 점차 붉은 열꽃을 뿜어내니 끝과 끝이 만나 고리를 이루었다. 뜨거워도 조금만 참으면 연결되는 것. 세상일이 그럴진대 불꽃이 일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과욕을 부려서 시커멓게 그을리기도 했었다. 접합한 상처는 울퉁불퉁해도 사포로 다듬으면 매끈해질 수 있는 법. 천천히 순리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었다.
손가락 사이즈를 재고 기다란 쇠봉에 줄을 긋는다. 한 짝만 끼는 것이 반지(半指)이고, 쌍으로 끼는 것을 가락지라 했던가. 반지의 원형이 둥근 이유는 테두리 밖으로 마음이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라지. 쇠봉을 돌려가면서 나무망치로 두들기고 사포질하니 반드르르해졌다. 뭐든지 깎고 다듬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한눈파는 사이에 상처가 나고 출혈도 생긴다. 그래도 애벌레의 환골탈태처럼 고통 뒤의 환희경도 있지 않은가.
문득, 캐나다의 철근 반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퀘벡의 세인트 로렌스강 다리 붕괴 사고 때 많은 작업자의 희생이 있었다. 이후 토목기술자들은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무너진 구조물에서 뽑아낸 강철로 반지를 만들어 끼게 되었다. 그 의식은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엄청난 피해를 상기하며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라는 무언의 충고였다. 쇠반지가 엔지니어의 소명 의식을 새기듯이 내가 만든 은반지 역시 작가정신을 받들도록 할 것이다. 드디어 반지의 광택 작업이 끝났다. 밋밋하던 손가락에 채워본다. 반짝! 은색 등불 하나, 온몸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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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광장] 나와 가족을 위한 헌혈
겨울철 혈액 수급이 비상이라고 한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가 헌혈에 큰 악영향을 주고, 헌혈을 주로 하던 10대 청소년들의 관심도 줄었기 때문이다. 대신 수혈을 기다리는 혈액 수요는 많아져 혈액 부족 사태가 심각해졌다.
2000년대 헌혈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해마다 200만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인구 감소, 헌혈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그동안 헌혈자의 70%를 차지했던 10∼20대의 헌혈 참여가 크게 줄어 들었다. 또한 예비군 훈련 때 많은 이들이 동참해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최근에는 예비군 훈련 자체도 감소했다. 대한적십자 혈액원은 한때 헌혈자를 늘리기 위해 각종 경품까지 내걸고 중장년층 헌혈 독려에 나선 적도 있었다.
지금도 1분에 3.4명, 1시간에 203명, 하루에 4881명이 애타게 수혈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피는 뽑아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생성되므로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정기적인 헌혈은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동기를 준다. 이웃을 위한 숭고한 인도주의 정신과 인류애까지는 아니라도, 언젠가는 나와 가족을 위해서 필요한 헌혈에 관심을 가져보자. 박옥희·부산 북구 화명신도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