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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유엔기념공원 일대 규제 완화, 경관과 조화 생각해야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일대 건축 규제가 50여 년 만에 풀린다고 한다.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CUNMCK)가 지난 23일 개최한 정기총회에서 부산시가 제안한 ‘유엔기념공원 주변 경관지구 관리 방안’에 조건부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유엔기념공원 일대 26만㎡의 특화경관지구 지정이 해제되며, 유엔묘지 인근 11만 5700㎡의 자연경관지구 일부 해제도 추진된다. 1971년부터 단계적으로 경관지구가 지정돼 그동안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아온 지역 주민 입장에서는 이번 해제 결정으로 인한 기대감이 클 것이다. 그러나 향후 유엔기념공원 일대 난개발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공원 일대에는 아파트 4~5층 높이인 12m로 고도 제한이 걸려 있어 개발에 제약이 따른다. 이러한 규제로 인해 일대 주민을 중심으로 재산권 보호를 위한 건축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장기간 이어졌다. 남구청도 민원 해결을 위해 2015년부터 용도지역 변경과 특화경관지구 완화·해지를 요청해 왔다. 고도 제한 해제에 따라 수익성이 높아지는 만큼 일대에 재개발·재건축도 법적으로 가능해진다. 부산시는 위원회 결정에 따라 공원 일대 건축물 규제가 담긴 경관지구 해제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한다. 이번 결정으로 시와 남구청은 공원 주변 경관과 개발 사이에서 절묘한 조화를 찾아야 하는 만만치 않은 과제를 떠안게 됐다.
유엔기념공원은 대한민국이 유엔에 영구 기증한 ‘세계 유일의 유엔 공식 묘지’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재한 국제연합기념묘지의 설치 및 유지에 관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 간의 협정’에 따라 1959년 설치됐다. 현재 11개국 2300위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유해가 안장돼 있다. 부산시가 2028년을 목표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9곳 중 하나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맞아 참석 국가 일부 정상들도 이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공원이 부산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공간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시의 소중한 자산인 공원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지난 23일 총회에 참석한 재한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위원회 일부 위원은 규제 완화 이후 이뤄지는 개발로 인해 공원의 경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타당한 지적이라고 본다. 시는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통해 건축물 높이·규모·용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며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경관지구 해제로 시와 남구청은 공원 주변 개발과 재산권 행사, 세계유산 등재, 도시 미관 사이에서 최적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해법을 강구해야 한다. 공원의 상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도시 기능 회복과 주거 환경 개선을 모두 이뤄내는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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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도시철도 무임 수송 - 재정 악화 악순환 언제까지
도시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 인프라로 꼽히는 도시철도가 더 이상 정상적인 운영이 힘들 정도로 과중한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도시철도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부산교통공사의 노와 사가 전국 도시철도 노사와 협의회를 만들어 한목소리로 이에 대한 경고를 하고 나설 지경이다. 부산도시철도의 과중한 적자 규모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터이지만 교통공사 노사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가장 큰 요인은 수십 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무임승차제도다. 노인을 위한 대표적 복지 차원에서 도입된 이 제도로 인한 운임 손실이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로 인한 적자 폭만 한 해 1000억 원을 훌쩍 넘길 정도가 됐다는 것이다.
도시철도 무임승차제도는 19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도시철도를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림으로써 탄생했다. 1985년 개통한 부산도시철도도 대통령의 이 지시에 따라 운행 초창기부터 무임승차제도가 적용돼 왔다. 부족한 복지제도를 대신할 방편으로 꼽히는 이 제도 이용객은 부산에서만 2021년 8000만 명을 넘어섰고 급기야 지난해엔 1억 757만 명까지 늘어났다. 무임승차제도 이용객이 이처럼 급증함에 따라 이로 인한 부산교통공사의 직접 손실액은 지난해 1737억 원으로까지 증가했다. 지난해 처음 4000억 원을 넘어선 전체 총 운영적자(4192억 원)의 40%를 넘는 수준이다.
전국의 도시철도 노사가 대표자 공동협의회를 구성해 28일 국회에서 도시철도 무임수송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이 같은 현실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현실이 앞으로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특히나 전국 대도시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인 부산은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이로 인해 해마다 무임승차 인원이 급증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지금도 부산교통공사는 1조 원이 넘게 쌓인 부채로 시름하고 있고 이대로라면 2029년 부채 규모가 2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적자를 방치할 경우 노후 전동차 교체나 인건비 등 기본적인 철도 운영에 들어갈 예산조차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빈약한 국내 복지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된 무임승차제도를 교통공사나 지자체의 재정으로만 감당하라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도시철도 노사가 공통으로 지적하듯이 무임승차로 인한 손실의 80% 가량을 국비로 지원하는 코레일 수준의 보전책은 도입해야 마땅하다. 그게 아니라면 지역에 도입이 검토되고 있는 반값 전기료 제도를 도시철도에 선제적으로 도입해 한 해 1000억 원에 육박하는 도시철도 전기료 부담이라도 경감해 주는 것이 옳다. 누구나 일정 나이가 되면 받을 수 있는 이 혜택을 정부가 재정으로 떠맡는 것은 선별 복지가 아니라 보편 복지를 강조해 온 이재명 정부의 철학에도 가장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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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춤의 기술과 정치 윤리
탱고는 매혹적이다. 검은 수트와 붉은 드레스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 속에 찰나의 눈빛 교환과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는 손길, 그리고 박자에 맞춰 정교하게 교차되는 발짓이 어우러질 때면 숨이 멎을 정도다. 파트너의 몸에 기댄 채 한 발을 내딛고, 순간적으로 무게 중심을 바꾸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신뢰해야만 가능하다. 왈츠의 춤사위는 유려하면서도 흥겹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회전하면서 일으키는 잔상은 물결무늬처럼 퍼진다. 왈츠의 우아함은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일 때 완성된다.
영국 BBC ‘Strictly Come Dancing’은 21년째 장수하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다. 방송 제목은 ‘정통 볼룸·라틴 춤추기’에서 따왔지만 의역하자면 ‘정성을 다해 춤추러 오세요’. 이 춤바람은 가을의 전령사다. 해마다 가을 초입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짝을 이룬 15개 팀이 실력을 겨뤄 매주 주말 꼴찌가 탈락하는데, 크리스마스께 결승전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한국은 물론 세계 많은 나라에 ‘댄스 위드 더 스타’ 등의 제목으로 판권이 수출된 인기 콘텐츠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9월 27일 첫 경연이 시작돼 4주 만에 4팀이 탈락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문 춤꾼은 물론 일반 참가자의 면면은 ‘따로 또 같이’다. 장애인, 성 소수자, 고령자는 물론 중국과 동유럽 출신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용광로처럼 섞인 채 불꽃 경합을 벌이는 게 이 프로그램의 힘이다. 국적·인종·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믿음직한 파트너가 되어 고난도의 춤 동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따르다 보면 저절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 한 커플이 아르헨티나 탱고 종목을 선택해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기술, 음악, 춤의 스타일 측면에서 탱고와 큰 차이가 있다. 즉흥성이 강하고 음악 해석에 따른 감정 표현의 폭이 넓다. 유럽에서 경연 대회용으로 정형화된 탱고에 비해 고난도라고 이해하면 쉽다. 비엔나 왈츠와 왈츠도 원형과 개량형이 다른 종목으로 갈라진 경우. 비엔나 왈츠는 왈츠보다 두 배 빠른 템포로 쉴 새 없이 회전하며 무도장을 종횡무진하는데 그 모습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비전문가가 한 달 만에 아르헨티나 탱고나 비엔나 왈츠를 선보인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처음엔 파트너와의 관계가 어색했을 테고, 어깨가 경직되고 발이 엉키고 박자를 놓쳤을 게 뻔하다. 겨우 안무를 몸에 익혔다 한들 파트너십이라는 난관에 맞닥뜨린다. 상대의 동선과 속도, 다음 스텝을 의심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의 한 코너 ‘It Takes Two’는 ‘짝지가 필요해’, ‘둘이니까 가능해’로 옮길 수 있는데, 결국 예술적 완성도는 두 사람의 호흡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상대를 무시하면 커플 댄스는 성립되지 않는다. 파트너를 믿고 무게 중심을 공유할 때 완성되는 협력의 예술이라서다. 만일 대립하거나 단절되면 그저 허위허위 내지르는 혼자 몸짓에 그친다. 타인의 손을 잡아야 내가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건 비단 무대에서만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상생, 경제적으로 동반 성장, 정치적으로 공화주의에 대입해 보면 그 취지가 통한다.
유튜브를 통해 영국에서 진행되는 댄스 경연 대회를 사실상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가을밤의 정취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는 사이, 생게망게 독무만 난립하는 한국 정치판이 겹치는 장면은 민망하다.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 정치는 관객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막춤을 들이대는 진상들이 서로 이기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꼴이다.
목하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의견이 다른 진영끼리 대화와 설득이 불가능해지고, 혐오와 저주는 점점 크게 울려 퍼진다.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라거나, ‘죽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식의 정치권 막말이 더 이상 금기어 축에도 못 끼는 상황에 사회 통합은 언감생심이다.
관객에 감동을 주는 춤, 유권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는 상대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강제력을 동원해 상대를 춤추게 할 수 없듯이, 민주정은 강요나 무력 대신 설득과 참여를 통해 통합되는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같은 무대에 올라 각자 다른 장단에 제각각 몸을 흔들어 대는 추태를 반복하는 이들은 무대에 오를 자격이 없다. 꼴불견 무대는 더 이상 보기 싫다. 여야 정치권은 국민에 공감과 감동을 주는 정치 무대를 복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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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중앙대로 임란 영웅들
1592년 5월 조선과 일본, 명 등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의 명운을 좌우한 7년 동안의 국제 전쟁이 시작된다. 왜군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 소속 1만 8700명이 대마도를 출발, 5월 24일(음력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면서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야영을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 왜군은 이튿날인 5월 25일 정발 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현재 동구 수정동)과 윤흥신 장군이 주둔하던 다대진성(사하구 다대포)을 공격한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정발 장군은 25일, 윤흥신 장군은 다음날인 26일 결국 목숨을 잃는다. 요즘의 부산시장직을 수행하던 송상현 부사가 항전한 동래성(동래구 동래시장 일원)마저 26일 왜군 수중에 떨어지는 등 조선의 국운은 순식간에 기울어진다.
송상현, 정발, 윤흥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도주나 화의를 거부한 채 장렬하게 순절한 호국 영웅으로 꼽힌다. 송상현 부사를 기리는 동상은 1978년 부산진구 전포동에, 정발 장군 동상은 1977년 동구 초량동 항일거리에, 윤흥신 장군 석상(2023년 12월 동상으로 교체)은 1981년 동구 수정동 메리츠화재 사옥 옆 쌈지공원에 각각 설치됐다. 하지만 동상들이 설치된 장소는 호국 영웅들이 산화한 실제 장소와 다소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이 동상들은 모두 부산 중심가를 관통하는 주도로인 중앙대로 옆에 설치됐다. 무슨 이유일까. 더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세 영웅의 정신을 기릴 수 있도록 가장 잘 보이면서도 접근성이 좋은 곳을 건립 장소로 선택했다는 게 가장 유력한 이유로 거론된다. 특히 중앙대로는 1956년 이순신 장군 동상을 모신 중구 광복동 용두산공원과도 가깝다. 더욱이 예전엔 부산포왜전 승전일이자 부산시민의날인 10월 5일이면 중앙대로 동상들의 궤적을 따라 가장행렬 등을 개최, 영웅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중앙대로를 ‘임진왜란 호국영웅 동상길’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그런데 최근 사하구의회 강현식 의원이 윤흥신 장군 동상을 역사적 관련성이 있는 다대포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사하구 정체성을 높일 수 있는 타당한 주장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부산 임진왜란 영웅들은 시민 모두의 영웅이자 부산 전체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자칫 ‘이전 도미노’ 현상도 우려된다. 현재 동상을 보전하면서 역사 현장에 추가 건립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부산시와 관련 기초자치단체들이 공론화를 거쳐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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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AI는 부산의 기회
인류가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농업혁명 이후 또 한 번의 획기적인 경제적 진보는 우리가 흔히 산업혁명으로 부르는 기술 진보로 18세기 말 영국에서 나타났다. 기계와 증기기관을 결합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를 이룬 산업혁명에 의해 인류는 비로소 수십 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적 발전도 이전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지난 십수 년 동안 회자되었던 4차 산업혁명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산업혁명의 기술 발전을 단계적으로 인식할 때, 이미 우리는 네 번째 단계까지 와 있다는 생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을 입에 올릴 때에도 경제학에서는 굳이 시기 나누기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과 과학의 발달이 엄청나게 그리고 매우 빠르게 진행돼 온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보면 그 발달의 양상이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연장선에 있다는 인식에서였다.
지난 10월 1일 오픈AI CEO 샘 올트먼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재명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연쇄 회동을 하고 협력을 하기로 했다. 그런 얼마 뒤인 지난 14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열린 ‘자이텍스 글로벌 2025’에서 대담을 가졌는데, 그 때 던진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샘 올트먼은 두바이 대담에서 ‘머지않아 로봇이 로봇을 만들고, 데이터센터가 스스로를 복제하고, 기계가 스스로의 세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AI(인공지능)가 단순히 생각하는 존재를 넘어 물리적 창조 활동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AI가 내부의 알고리즘과 코드를 넘어 외부적으로 하드웨어를 조립하고 확장하는 존재로 진화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흐름은 산업화의 진정한 새로운 국면일 수 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18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과는 질을 달리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이 막 시작된 것일 수 있다. 동력과 기계를 결합하여 생산성을 높였던 18세기 말의 산업혁명을 넘어 값싸고 풍부한 지능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는 새로운 산업혁명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AI가 미래 경제를 가를 핵심으로 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구촌 양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이 미래의 패권을 두고 첨예하게 경쟁하는 부문도 AI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재명 정부의 출범과 함께 AI를 핵심 정책과제로 제시하며 추진하고 있는데, AI이야말로 미래 산업의 가장 중요한 생태계라고 보기 때문이다.
AI가 미래 산업의 생태계라면 부산 경제의 미래도 이런 추이에서 비켜갈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전환을 부산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경제구조가 질적으로 달라지는 시기에는 격차를 단번에 따라잡는 점프가 가능하다. 과거 산업혁명에 뒤처진 나라들이 정보시대에 접어들면서 단숨에 도약을 하는 것을 목격했듯이, AI 생태계의 도래는 부산에 위기임과 동시에 기회이다.
이러한 인식은 특히 기존 산업의 침체로 사실상 인구소멸 도시로 분류되고 있는 부산에서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 산업 경쟁에서 뒤처진 부산이 다른 도시와 나라들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답이 없다. 그런 점에서 작금의 기술 패러다임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물론 AI 역시 자본과 인력 등에서 수도권이 주도권을 쥐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전기를 먹는 산업적 특성상 전기를 생산하는 지역 또한 상당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미 전남과 울산이 AI 입지 논의에서 먼저 거론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 전력 문제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 공급이라면 부산도 강점을 갖고 있는 부문이다. 그리고 향후 지역 균형발전 전략은 전력과 결합되어 ‘지역 생산 지역 소비’의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준비하면서 부산도 AI 도시로 한발 앞서 나가야 한다. 또 내년에 예정되어 있는 2단계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준비도 좀 더 기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해양과 금융에 중점을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좁은 전략이 될 수 있다.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에는 산업에서의 비약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기존의 기술 체계에서 뒤처져 지속적인 침체를 겪고 있는 지루한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과감한 시도이다.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으로 재도약의 기회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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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여백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새가 점점 멀어져
맨눈으로 식별되는 거리를 벗어나도
바탕이 여백이라서 저게 새란 걸 안다
갖출 것 갖춘 숲을 박차고서
나뭇가지 하나 없는 여백으로 깃드는 새
햇빛뿐이거나 바람뿐이거나 마음뿐인 거기서
뜨겁거나 떨리거나 외롭거나 한 거기서
점점 점이 되어가는 새
새도 아는 것이다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갖출 것 갖춘 숲이 아니라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여백이 새를 점점 깊숙이 안으면서
큰 점이 되었다가 작은 점이 되었다가
마침내 점이란 것마저 버리고
스스로 여백이 되는 새
시집 〈거기〉 (2024) 중에서
단순히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공백과 달리 여백은 대상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는 공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 비어있어 미완인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여백이 되어가는 새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마음뿐인 거기, 외롭기만 한 거기로 깃드는 새를 바라보며 비어있는 곳이라면 채우려고만 하는 정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새가 생동적인 새로 드러나기 위해 갖출 것 갖춘 숲을 박차고 여백을 향해 날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퇴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충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가능성과 포용성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곳. 빠름보다는 느림,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향한 움직임. 잠시 바쁜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위해 나만의 여백을 찾아보게 하는 시편입니다. 신정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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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눈] 가을 단풍, 내년에도 볼 수 있길
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어느새 10월의 끝자락, 완연한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가을 하면 특히 산을 물들이는 단풍과 억새가 떠오른다. 산마다 붉게 물든 단풍과 드넓게 펼쳐져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밭은 시민들의 발걸음을 산으로 향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가을 자연도 우리가 잠시만 방심하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불과 몇 달 전인 지난 봄, 경북 의성과 경남 산청 등지에서 발생한 역대급 산불을 기억해보자. 당시 산불은 산림 피해 뿐만 아니라 31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1만 9000여 명에 이르는 이재민을 발생시켰다. 지금도 많은 이재민들이 집과 축사 복구에 힘쓰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 산불 원인을 보면, 자연 발화보다는 성묘객 실화, 농산폐기물 소각, 등산객 담뱃불 등 사람의 부주의로 인한 산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 번 불이 나면 산림 피해는 물론, 복구에도 막대한 시간이 걸린다. 사라진 숲이 제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최소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산불은 단순히 나무를 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며 토양의 영양분을 잃게 하고, 산사태나 홍수 발생 등 2차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이번 가을에는 지난 봄의 아픈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의 선제적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거창한 예방 활동이 아니라도, 산을 오를 때 라이터 등 인화물질을 소지하지 않고, 허용된 지역에서만 취사·야영을 하며, 산림 인접 지역에서 논밭·쓰레기 소각을 자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로가 선의의 감시자가 되어 작은 부주의로 큰 재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름다운 단풍과 억새로 물든 가을 산을 내년에도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모두 함께 가을철 산불 예방에 동참하길 당부드린다. 배기수·부산진소방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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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산으로 가는 부동산 논쟁… 시장 혼란만 가중한다
10·15 부동산 대책의 후폭풍이 거세다. 이상경 국토교통부 1차관이 ‘갭투자’ 논란에 휩싸여 사퇴했고, 금융위원장도 주택 보유 문제로 비판을 받고 있다. 청와대와 기재부 고위 관계자까지 논란에 오르며 정부의 정책 신뢰는 추락했다. 여기에 여야 정치권은 부동산 정책의 방향과 철학을 논하기보다 서로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자신의 주택 6채를 “이재명 대통령의 분당 아파트와 맞바꾸겠다”고 하자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의원 전수조사하자”고 맞받아치고 있다. 정책의 실효성을 따져야 할 국회가 ‘누가 더 가졌나’ 식의 유치한 설전이나 벌이고 있는 것이다.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이런 말싸움이 아니다.
부동산 정책의 핵심은 시장 신뢰다. 하지만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은 손바닥 뒤집듯 달라졌다. 노무현 정부의 ‘투기 억제’, 이명박 정부의 ‘공급 확대’,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규제’, 윤석열 정부의 ‘시장 정상화’까지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려 할수록 부작용은 커졌고 정책 신뢰는 무너졌다. 이번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10·15 대책은 규제 일변도에 매몰돼 실수요자와 투자 심리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신규 아파트 공급도 여전히 정체돼 있다. 정부는 부동산 대책을 내놓으며 공급 안정화를 약속했지만, 관련 부처 수장의 사퇴로 그 약속의 신뢰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정책 신뢰를 흔드는 요인은 또 있다. 정부는 재건축 규제 완화를 발표했다가 여론 반발에 주저앉았고, 세제 완화안도 당내 반대로 무산됐다. 장기적 철학이 부재하니 시장은 단기 투기세력의 놀이터로 전락했다. 특히 정부와 여당은 지방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 시장에서는 실수요 중심의 공급 확대 없이는 체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부울경 메가시티 구상과 북항 재개발, 주거 인프라 확충 등 지역 핵심 현안은 부동산 정책의 방향에 따라 직격탄을 맞는다. 중앙정부의 정책 혼선이 지역으로 번지면, 지방 부동산 시장도 불확실성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파적 공방이 아니라, 부동산 시장을 하나의 국민 생활 시스템으로 보는 철학이다. 부동산은 특정 계층의 자산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삶의 기반이다. 그런데도 여야는 상대의 재산 목록을 들추고 “팔아라”, “내놔라”는 식의 유치한 싸움을 벌인다. 그 사이 서민의 내 집 마련 꿈은 더 멀어지고, 전세 사기와 금리 부담, 청년 주거난은 심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냉정히 돌아봐야 한다. 집값을 누르겠다는 강박이나 경기 부양을 위한 공급 경쟁이 아니라 시장의 자율성과 예측 가능성을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정책 철학, 그게 부동산 정책의 출발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공방이 아니라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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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5000 향하는 코스피, 기업 혁신 성장 뒷받침돼야
국내 대표 주가지수인 코스피가 27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하며 한국 자본시장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1.48%(58.20포인트) 오른 3999.79로 출발한 후 단숨에 4000선을 넘었다.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2.57%(101.24포인트) 상승한 4042.83으로 장을 마쳤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협상 타결 기대, 외국인 자금 유입, 뉴욕 증시 강세 등이 맞물린 데 따른 것이다. 삼성전자는 ‘10만 전자’ 고지에 첫발을 디뎠고, SK하이닉스도 53만 원대에 거래되며 ‘쌍끌이 강세’를 이어갔다. 코스피가 ‘만년 박스피’의 오명을 벗고 글로벌 증시 대표 주자로 나섰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코스피가 4000선을 돌파한 것은 국내 상장기업 가치가 글로벌 기준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구조적으로 해소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외국인 투자자가 국내 증시에 대해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바이코리아’ 물결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특히 증시 활황을 주도하는 반도체 대형주들이 인공지능(AI) 시장의 폭발적 성장에 따라 슈퍼사이클에 진입한 만큼, 상승 흐름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날 지수 상승도 반도체를 비롯한 대형주 강세가 견인했다. 반도체 업황 회복 기대가 커지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전력기기, 소재·부품·장비 기업 주가가 동반 상승한 것이다.
코스피가 4000선을 넘어섰지만, 시장에 퍼지는 온기는 제한적이다. 반도체 대형주가 지수를 끌어올리는 동안, 다수 종목은 되레 하락세를 보이며 ‘빈익빈 랠리’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4일 종가 기준으로 6월 20일 이후 주가가 하락한 종목은 1537개로, 같은 기간 상승한 종목 1104개보다 많았다. 지수와 체감 장세의 괴리로 인해 개미 투자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바이오 벤처기업 등이 상장된 코스닥은 20개월 만에 900선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저평가된 상태다. 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규제를 줄이고, 경쟁력을 지닌 혁신 기업들이 코스닥에서 성장하는 생태계를 만들어 증시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시장에서는 ‘오천피’(5000포인트) 달성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다. 그러나 코스피 지수의 상승과는 달리, 지역 기업들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경기는 여전히 어렵다. 이러한 기대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부는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 주주환원 강화 등 구조 개혁을 통해 안정적 투자 환경과 혁신이 활발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도 연구개발 투자 확대, 신성장 동력 발굴 등으로 경쟁력을 높여 주가 상승의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본시장의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 경제 체질을 튼튼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오천피 달성’은 사상누각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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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영화 ‘범죄도시’와 캄보디아 사태
2017년 첫 개봉한 한국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는 폭력과 납치, 조직 범죄의 잔혹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도한 폭력과 거친 언어 등으로 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았지만, 영화는 연속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국내외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영화일 뿐, 현실과 다르다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러나 최근 캄보디아에서 잇따르는 한국인 납치·감금 사건은 그 영화적 긴장감이 더 이상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스크린 속 ‘악당’이 아닌, 현실의 범죄조직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 20일 캄보디아에서 귀국한 20대 A 씨는 경남경찰청에 인신감금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그는 지난 7월 1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캄보디아로 출국했다가 그대로 감금됐다.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조직원들은 A 씨에게 몸값으로 3000만 원을 내라고 협박했다.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일까지 시켰다. 휴대전화와 여권 등 소지품을 뺏긴 채 위치를 알 수 없는 건물 3층에 감금됐다.
그러나 A 씨는 다음 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현지 건물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며 탈출을 강행했다. 찰과상을 입는 등 다리에서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인근 민가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한국 대사관과 연락을 취해 가까스로 귀국했다.
경찰청은 올해 말까지 국외 납치·감금 의심·피싱 범죄 특별자수·신고 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우리 국민을 납치, 감금하는 등 범죄가 잇따른 데 따른 조처다.
경남에서는 27일 기준 캄보디아 실종 관련 신고가 모두 17건 접수됐다. 다행히 이 중 10건이 해제됐다. 나머지 7건 중 4건은 가족·지인 등과 연락이 돼 현지 영사관을 거쳐 대상자 안전 여부를 계속 확인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월 수백·수천만 원 수입, 숙식 제공, 비자 지원 등의 조건으로 사람을 유인한 뒤, 도착 후 여권을 압수하고 콜센터나 온라인 사기 업무를 강요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특히 캄보디아에는 ‘웬치’라는 범죄 단지가 있다. 웬치는 동남아 보이스피싱 조직 사이에서 쓰는 은어다. 이곳에는 유인당한 외국인이 범죄조직 요구를 거절하면 폭행과 감금이 뒤따르고, 일부는 몸값 협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캄보디아 범죄조직의 야만적 행각은 영화 속 상상력을 능가한다는 게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이 범죄 구조는 영화 범죄도시 속 조직범죄의 형태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캄보디아 드림’으로 한국 청년을 유혹하는 모집책, 감시자, 폭력조, 그리고 자금책이 분업화돼 있다.
그 과정에 피해자는 내부에서 철저히 통제된다. 차이점은 영화처럼 일회성이 아니라, 온라인 사기·인신매매·국제 자금 세탁이 복합적으로 얽힌 ‘지속형 범죄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 납치 사건이 아니라, 국제 인권 문제이자 외교적 위기다.
정부는 캄보디아 정부와 합동수사팀을 꾸려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패는 여전히 개인의 경계심이다. 상식을 벗어난 고수익 제의와 특혜는 범죄와 연관된 함정이 있다는 의심을 가져봐야 한다.
일부에선 이번 사태를 ‘청년 실업시대가 낳은 비극’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제안을 받은 당사자부터 범죄 연관성에 대해 근본적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해외에서 고수익 일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공식 채널(외교부 해외안전여행, 대사관 등)을 통해 반드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연락 수단이 메신저뿐이거나 근무지가 불분명하다면 즉시 의심해야 한다. 여권은 절대 타인에게 맡기지 말고, 사본을 따로 보관해야 한다. 또한 출국 전 가족에게 여행 일정과 숙소 정보를 공유하고, 현지 대사관 긴급번호를 저장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영화 속 폭력은 관객에게 일시적 긴장감을 주지만, 현실의 범죄는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캄보디아발 납치 사건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스크린 속 장면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의심하고,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경계심이야말로 지금 이 시대의 가장 현실적인 안전 장비다.
영화와 현실의 가장 큰 차이는 ‘엔딩이 없다’는 것이다. 스크린 속 마석도(마동석 분) 형사는 결국 악을 무너뜨리고 정의를 세운다. 그러나 캄보디아 범죄 단지의 실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범죄는 발생하고 나면 피해가 크고 회복도 더디다. 예방이 최선의 무기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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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얄타, 포츠담… 부산
얄타는 동유럽 크림반도 남부의 흑해 연안 유명 휴양지이다. 국제법상으로는 우크라이나 영토지만,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2월 열린 얄타회담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모여 전후(戰後) 세계 질서를 논의했다.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계기가 마련된 회담이기도 하다.
포츠담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5km 떨어진 소도시이다. 1945년 7월 트루먼 미국 대통령, 애틀리 영국 수상과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한 포츠담회담은 독일 항복 이후 유럽의 재건과 태평양 전쟁 종결 문제를 다뤘다. 연합국은 독일 항복 이후에도 전쟁 의지를 꺾지 않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면서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이라는 최후통첩 포츠담선언(7월 26일)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열흘 가량 버텼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8월 6일, 9일)되자 즉각 포츠담선언을 수용하면서 항복했다.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에서는 1905년 러일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조약이 맺어졌다. 일본 야마구치현의 항구도시 시모노세키는 1895년 청일전쟁 강화회의가 열린 곳으로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 도시는 각 나라의 수도는 아니지만 역사에 남을 회담이 열리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도시 이름은 또렷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경북 경주에서 열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는다. 오는 30일로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 장소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가운데 부산 김해공항 공군기지 내 ‘나래마루’가 유력한 개최지로 떠올랐다.
활주로에서 곧바로 회담장 진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APEC이 열리는 경주나 서울보다 보안에 유리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2019년 한-아세안 정상회의 때 주요국 정상 접견실로 쓰였다는 점도 고려 대상이다.
트럼프 2기 첫 미중 정상회담이자 세계 경제·외교 지형을 흔들 ‘세기의 담판’이 부산에서 열리면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게 된다. 이번 회담에서 세계 무역질서를 재편하는 국제 합의, 이른바 ‘부산 선언’이라도 나오면 부산의 대외 인지도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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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울산 도시철도’ 첫 삽 뜨기 전에…
‘울산의 대치동’ 문수로와 공업탑로터리가 출퇴근길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할 것이라 상상하니 아찔하다. 울산 도시철도 1호선 착공이 당초 계획보다 늦춰졌지만, 예고된 교통 대란에도 뾰족한 대책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도시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현안을 놓고 ‘숙원 사업’이라는 명분과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현실론에 눌려, 문제 제기조차 쉽지 않다.
애초 울산시는 2028년 국제정원박람회에 맞춰 올해 11월 착공을 목표로 사업을 서둘렀다. 하지만 도시철도 건설 사업자 입찰이 두 차례 유찰되는 우여곡절 끝에 최근 한신공영이 사업자로 선정됐고, 착공은 내년으로 미뤄졌다.
분명 친환경 수소트램은 태화강역에서 신복교차로까지 10.9km 구간을 달리며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울산의 고질적인 대중교통 문제를 해결하고 친환경 도시 이미지를 높이려는 트램 도입의 취지를 부정할 시민은 많지 않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트램 도입이 초래할 각종 부작용에 대해선 충분히 숙의했는지 의문이다. 울산시는 자가용 이용을 불편하게 만들어 시민을 대중교통으로 유도한다는 ‘교통 수요 관리’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과연 운전자들이 순순히 자가용을 포기할까? 전국 최하위 수준의 대중교통 분담률(11.6%)을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우려는 울산시가 올해 초 확인한 용역 결과에서 수치로 드러난다. 트램이 차지할 2개 차로로 인해 울산의 핵심 교통축인 삼산로와 문수로는 극심한 교통 혼잡이 예상된다. 가뜩이나 체증이 심한 문수로의 경우 교통량이 도로 수용 능력을 17%나 초과(V/C=1.17)해 사실상 ‘도로 기능을 상실한 수준’이 될 것이라 경고한다. 지역 최대 학원가에서 쏟아지는 수백 대의 통학 차량을 제외한 가장 보수적인 예측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더한다. 울산시는 이런 상황에서도 용역 보고서를 시민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상습 정체 구간인 공업탑로터리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 평면교차로로 개선해도 차량 지체 시간이 지금보다 10초 가량 길어진다. ‘10초 정도야…’ 하고 넘길 사안일까? 위급한 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이 10초의 장벽에 갇힌다면, 그 시간은 생사를 가르는 골든타임이 된다. 우회도로조차 마땅찮은 문수로의 마비는 도시 전체의 혈맥에 지장을 초래하는 진앙이 될 것이다.
지자체 대책은 무엇일까? 최근 울산시는 시공사에 교통 체증 대비책을 강구하라고 ‘주문’했지만, 뚜렷한 해법 제시로 보기 어렵다. 장기적으로 1200억 원을 들여 우회도로를 만든다는 계획 역시 ‘2026~2030년 국가계획’ 반영을 목표로 하는 불확실한 밑그림에 불과하다. 눈앞의 화재를 끄겠다며 5년 뒤에 올지 모를 소방차를 부르는 격이다. 결국 합리적 비판과 대책 없이 공론화의 공백 상태만 지속되는 분위기다.
울산시는 이제라도 최악의 교통 체증을 경고한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업탑과 문수로의 교통량을 분산시킬 단기·장기적 계획을 구체적인 예산과 함께 제시해야 한다. 긴급차량의 비상 통행로 확보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성공적인 트램 도입을 위해서도 지금이 문제를 바로잡을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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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일본의 여성 정치인, 다카이치와 도이
일본 근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세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각각 혁신, 능동, 안정의 리더십을 상징한다. 널리 알려졌듯 각기 ‘새가 울지 않으면 죽인다’, ‘울게 만든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비유는 세 사람의 정치적 성격인 결단력, 유연성, 인내심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이 세 유형의 리더십이 여성 정치가들에 의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와 1993~1996년 일본 최초로 중의원 의장을 지낸 도이 다카코(1928~2014)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61년 나라현에서 태어난 다카이치는 고베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가 양성소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수학하며 “20년 후엔 일본 총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993년 무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뒤 자민당에 합류해 총무대신 등의 요직을 맡으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입지를 굳혔다. 일본회의 등 보수 우익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반복 참배하며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강경한 보수 이미지를 구축했다.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보수 우파인 아소파의 지원을 받아 2세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꺾고 승리했다. 그러나 강한 우익 성향을 우려한 공명당이 연립에서 이탈하자, 그는 오사카 지역 정당인 일본유신회와 ‘각외 연립’을 구성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총리 지명 선거에서 과반 득표(456표 중 237표)에 성공하며 제104대 일본 총리로 취임했다. 30여 년간의 집요한 의지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가족국가론’ 세계관 견지 다카이치
아베 전 총리 ‘힘에 의한 평화’ 계승
여성 참여·돌봄 불평등에 관심 도이
일본 민주주의 지평 확장에 기여
‘새가 울지 않는 시대’ 다른 방식 답해
한 사람은 평가 완료, 다른 한 사람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리더십의 모델로 삼은 다카이치는 지난 24일 시정방침 연설에서 “세계의 중심에서 당당히 피어나는 일본 외교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기조인 ‘힘에 의한 평화’를 계승해 일본을 다시 강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또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명시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후세에 사죄를 강요하는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며 애국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헌법 9조 평화조항의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유리천장을 깬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 리더십은 여성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득권 남성 권력의 연장선에 있다. 다카이치는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거대한 국가를 이루는 토대라고 생각하며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도 반대한다. 이 제도는 결혼 후 부부가 각자의 성(姓)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일본 사회에서 가부장적 질서 완화를 상징한다. 다카이치는 ‘이에(家)’제도와 ‘가족국가론’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정치인이 ‘젠더’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대에 일본 여성 정치의 새 지평을 연 도이 다카코다. 효고현 출신인 그는 헌법학자 다바타 시노부의 강연 ‘평화주의와 헌법 제9조’에 감명받아 헌법학을 전공하고 도시샤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1969년 사회당 후보로 첫 중의원에 당선된 이후 12선을 기록했으며, 1986년 일본 최초의 여성 정당 대표(사회당 위원장)에 이어 1993~1996년에는 첫 여성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 비록 총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1989년에는 참의원에서 총리로 지명된 일본 정치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그는 헌법 제9조 평화조항 수호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고, ‘반전·비핵·평화’의 가치를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남녀 고용차별과 부계 중심 국적법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해 일본 정부의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서명을 이끌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마돈나 선풍’을 일으키며 “산이 움직였다”는 명언으로 여성들의 참여의식을 일깨웠고 주부층을 비롯한 여성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또 “여성은 세 번의 노후를 살아야 한다, 부모·남편·자신의 노후”라는 발언을 통해 돌봄의 불평등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고, 이는 훗날 개호보험제도(介護保險制度) 논의로 이어졌다.
이처럼 도이는 ‘평화와 진보의 정치’를 통해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지평을 확장한 인물이었다면 다카이치는 ‘힘과 보수의 정치’로 그 흐름을 되돌리려는 듯하다. 도이는 남성 중심의 정치 구조 속에서도 결단과 돌파로 상징되는 오다 노부나가형 리더십을 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다카이치의 리더십은 앞으로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평가될 것이다. 과연 도요토미식의 권력집중형인지, 아니면 도쿠가와식의 안정과 조정형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일본 정치사 속 두 여성 정치인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새가 울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노래를 끌어낼 것인가’라는 리더십의 과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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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불붙은 2차 공공기관 이전, 치밀한 전략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가 2차 공공기관 이전에 시동을 걸자 비수도권 지자체들은 전담 조직(TF)을 구성하고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부산은 해양수산부 관련 공공기관과 함께 산업은행 이전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 부산 유치가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는 사이, 2차 이전 대상인 157곳 중 실제로 어떤 기관이 부산에 와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적 논의는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시에 TF 설치가 늦어지면서 자칫 유치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도시 성장과 청년 일자리가 걸린 사활적인 문제다. 부산의 미래상인 해양수도와 국제금융도시 구현에 가장 효과적인 기관 유치에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공공기관 이전은 노무현 정부 초기 국토균형발전 전략의 핵심으로 추진됐다. 2005년 수립된 공공기관 이전 계획에 따라 153개 기관이 전국 10곳의 혁신도시로 옮겼다. 이 정책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 수도권 집중 완화라는 성과를 남겼지만, 지역 산업·대학과의 단절, 정주 여건 미흡뿐만 아니라 간판만 지방에 두고 핵심 인력과 부서는 수도권에 남기는 편법으로 효과가 반감됐다. 게다가 문재인·윤석열 정부가 2차 공공기관 이전에서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한 사이 20년이 훌쩍 지났다. 공공기관과 지방의 상생 효과 실현이 지연된 것은 정부의 무책임 탓이 가장 크지만, 지자체 스스로도 수용 준비 태세를 되새겨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공공기관 이전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시키면서 각 지자체는 산업 시너지 효과를 감안한 유치 홍보전에 돌입했다. 경남은 우주항공청 유치를 바탕으로 기계·항공·방위 관련 기관을 목표로 삼고 있고, 대구는 IBK기업은행,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 등을, 전북은 ‘농생명 수도’를 기치로 농협·수협중앙회 등을 희망 목록에 올려놓고 있다. 지역에서는 부산이 산업은행 이전 원칙을 고수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까지 포함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중요한 건 지역의 산업·교육 생태계에 안착해서 동반 성장할 가능성에 선택과 집중하는 정책을 지역 스스로 주도하는 것이다.
전국의 지자체들은 유치 희망 기관에 홍보 활동, 업무협약(MOU) 체결 추진, 이전 부지 답사 등 유치전을 본격화했다. 이처럼 경쟁이 뜨거워졌는데도 부산시는 TF는 물론이고 유치 희망 리스트조차 확정하지 못한 상태다. 해양수도와 금융 중심지 도약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 아닌가. 정부의 일정에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부산의 강점을 기반으로 사전 전략을 구축하고 전담 조직을 신속히 구성해야 한다. 해양수도와 국제금융도시라는 부산의 정체성을 구체화하는 방향에서 유치 기관을 선별하고, 총력전에 나서야 한다. 2차 공공기관 이전에 해양·금융도시 부산의 명운이 걸렸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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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정상회담 슈퍼위크 국익 위주 실용외교 진가 발휘할 때
세계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은 중국 등 후발 경쟁국 급성장에 따른 위기 타개와 위상 강화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다자주의와 세계화’ 기조를 무시한 채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 관세 정책 등으로 촉발된 지구촌 갈등은 현재 무척 첨예하다. 신냉전 갈등도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 초강대국들의 새로운 질서 구축 경쟁에 휘말린 한국의 입지는 참으로 위태롭다. 이런 가운데 이달 말 경주에서 세계 정상들이 참석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국익을 극대화할 절호의 기회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용외교 진면목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이 대통령이 26일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26일 말레이시아로 출국하면서 한국의 명운을 가를 ‘다자 정상회담 슈퍼위크’의 막이 올랐다. 아세안 정상회의에 이어 29일에는 한미정상회담이 예고됐다. 30일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와 이 대통령의 한일정상회담이 개최된다. 31일부터 이틀간 본 행사인 APEC이 열린다. 이 와중에 30일엔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부산서 정상회담을 갖는다. 그야말로 향후 세계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세기의 외교전쟁이 우리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내달 1일엔 한중 정상회담도 열릴 전망이다. 이 대통령이 다자 외교 리더십을 통해 세계 질서 격변기를 헤쳐갈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관세협상을 유리하게 마무리하는 것과 북한 비핵화에 대한 일관된 의지를 미국과 중국에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공조를 강화하면서 기존 안보 협력 관계를 약화시키지 않도록 하는 동맹 현대화 문제도 서둘러야 할 현안이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일종의 핵보유국이라고 발언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일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도 큰 과제다. 국제사회의 난제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양국의 파트너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특히 미중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우리 경제·외교·안보 환경도 격변할 전망이라서 이에 대한 유연하면서도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중국 관련 과제도 산적하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우리 입장은 무척 복잡해졌다. 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시켜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키는 호혜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이 서해에 무단 설치한 해상구조물의 부당함은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비록 불투명하지만 ‘북미 깜짝 회담’에 대한 철저한 대비도 필요하다. 복잡한 국제관계의 영향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격변하고 있다. 자국 이익을 앞세운 복잡한 역학 관계는 우리를 더 큰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격변기에 한국에서 APEC이 열리는 것은 절호의 기회다. 의장국으로서 외교 지평을 당당하게 넓혀 우리의 존재감을 세계에 널리 알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