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부산을 찾을 BTS의 월드투어 공연으로 부산이 들썩이지만 선거야말로 우리 일상에 가장 흥미롭고 스펙터클한 잔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투표율이 저조해져서 무관심과 냉소를 우려하던 때와 달리,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할 만큼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의 열기는 뜨거웠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저서 ‘정치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에서 정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보다는 희망적 사고와 주관적 열정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고, 그 점에서 인간의 특성을 가장 많이 닮아 있는 영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 선거도 그랬다.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써내려 갔다.
먼저 절망의 기록부터 이야기해 보자. 〈부산일보〉가 짚었듯이 이번 부산 지방선거는 여성·노동·인권 감수성이 ‘증발’한 선거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국민의힘 여성 구청장 후보는 0명을 기록했고, 여야에서 내세운 청년 후보 역시 소수에 불과했다. 노동·장애·인권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후보 역시 드물었다. 개혁신당이 청년 후보를 내세워 부산시장에 도전한 것은 유의미한 성과지만 유세 중 음료 테러를 당해 청년 정치의 현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무관심·냉소 우려했던 이번 지선
투표 용지 부족할 만큼 열기 후끈
여성·노동·인권 감수성 부족 유감
후보·공약·선거운동 모두 퇴행적
그래도 곳곳서 소소한 희망의 싹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남게 되길
한편 부산 북갑 선거운동 과정에서 튀어나온 ‘오빠’ 발언은 거대 양당의 정치 성인지 감수성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지방자치제 시작 이래 30여 년이 됐지만 기초단체장 여성 후보 공천 비율이 여전히 한자릿수에 머물러 있는 현실이 이를 강력히 뒷받침한다.
여성신문이 이번 지방선거를 맞아 제작한 ‘성평등공약.zip’ 사이트에서는 전국 지방선거 후보자의 공약과 공보물 자료를 바탕으로 성평등 공약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는데, 광역단체장 후보 5명 중 1명은 성평등 공약이 하나도 없었으며, 있는 공약마저도 대부분 출산·보육 정책에 쏠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선거의 패인 중 하나라는 분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응원봉 물결로 정치 공간에서 주목받았던 2030 여성 유권자를 집토끼 취급하며 이들에 대한 분석과 고민 없는 정책과 선거운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여성 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환경과 조건을 바꾸려는 노력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투표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란 투표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 어디에 투표할지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체제이다.” 이는 정치사상가 보비오의 말이다. 다른 선택이 배제된 상태의 높은 참여는 민주주의와 관련이 없다. 투표에 대한 참여보다 정치적 대안을 조직할 자유가 먼저이며 그런 대안이 의미 있는 복수로 존재해야 투표 참여가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했던 소수 정당들의 선전이 그 어느 때보다 빛을 발했다.
놀라웠던 성과 중 하나는 서울시장 선거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여성의당이 인적, 물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내정당 후보를 제치고 4위를 기록한 사실이다. 지난번 서울시장 선거에서보다 1만 표를 더 얻어 유권자들의 공감을 산 것은 물론 ‘룸살롱 없는 서울’이라는 슬로건으로 의제 정당으로서의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던 경북 안동에서 녹색당 시의원 후보가 당선된 것 또한 기록해야 할 중요한 성과다. 선거의 역동성과 마을 정치의 가능성을 동시에 실감할 수 있었다. 선거의 결과와 관계없이 연제구의 경우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진보정당 후보로 단일화에 성공하여 소수 정당에도 공정한 기회가 열렸고, 부산진구의 경우 기초의원 선거에서 노동당 김상희 후보가 3%가 넘는 득표율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당 후보이긴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최영아 후보는 수영구에서 지역구 시의원에 도전하여 장애인 의제를 가시화했다.
각자의 삶에서 비롯된 의제를 가진 사람이 정치 공간에 들어올 때, 정치는 비로소 다수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처리하는 장치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담는 그릇이 된다. 여성이 여성 의제를, 청년이 청년 의제를, 장애인이 장애 의제를, 성소수자가 성소수자 의제를 직접 다루는 것이 당연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대안의 폭을 넓힌다는 점에서 정치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을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
BTS의 노래 ‘작은 것들을 위한 시’는 대의와 큰 가치보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일상을 돌보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정치에도 거대 양당의 대의명분과 거대 담론에 의한 정치적 양극화의 싸움보다는 작은 정당과 보다 많은 의제들이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서 우리 곁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방식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