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에 그야말로 ‘최고의 날’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그랑팔레의 꼭대기에 또 한 번 태극기가 휘날렸고, 한국 펜싱의 역사엔 환희와 깊은 감동이 아로새겨졌다.
한국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1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단체전 결승에서 헝가리를 45-41로 제압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오상욱(대전광역시청), 구본길(국민체육진흥공단), 박상원(대전광역시청), 도경동(국군체육부대)으로 구성된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8강에서 캐나다, 준결승에서 프랑스, 결승에서 헝가리를 연파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12년 런던, 2021년 열린 도쿄 대회에 이어 한국이 올림픽 남자 단체전 3회 연속 우승(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는 종목 로테이션으로 제외)을 이룬 순간이었다. 현대 펜싱의 골격을 갖춘 곳인 본고장 격인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태동한 종목의 특성상 올림픽 펜싱 단체전에선 프랑스나 헝가리,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들만 올림픽 단체전에서 3회 이상 연속 우승을 이룬 바 있다. 한국 펜싱의 올림픽 3연패는 유럽의 펜싱 강국들 사이에서 아시아 국가 중 첫 성과다.
지난달 28일 한국 선수단에 파리 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겼던 오상욱은 사브르 단체전도 제패하며 이번 대회 한국 선수 첫 2관왕에 올랐다. 한국 펜싱 사상 첫 올림픽 2관왕이기도 하다. 앞선 올림픽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인 2000년 시드니 대회 남자 플뢰레의 김영호, 런던 대회 여자 사브르의 김지연, 리우 대회 남자 에페의 박상영은 단체전에선 우승하지 못했다.
대표팀의 기둥인 오상욱과 구본길은 각각 개인 3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었으며, 이번 남자 사브르 금메달은 우리나라 하계 올림픽 사상 300번째 메달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이번 남자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로 한국 펜싱은 올림픽 ‘효자 종목’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한국 펜싱은 2000년 시드니에서 금메달과 동메달 하나씩을 획득하며 사상 첫 입상에 성공했다. 한국 펜싱 역사상 최고의 대회로 꼽히는 런던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쓸어 담았고,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선 금메달과 동메달을 하나씩 챙겼다. 2021년 열린 2020 도쿄 대회에선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따냈다.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 펜싱의 간판 종목인 남자 사브르가 금메달 2개를 모두 책임져 자존심을 세웠다.
한국은 준결승전에선 프랑스에 45-39로 승리하며 결승에 올랐다. 홈 팬들의 압도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개최국 프랑스와의 경기는 쉽지 않았다. 팀 세계 랭킹 2위의 한국 여자 에페 대표팀은 프랑스 홈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 단체전 8강에서 프랑스에 31-37로 일격을 당했다. 남자 사브르 대표님에게도 홈 팀과의 경기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경기 초반 점수 차를 크게 벌리며 순항했다. 양 팀 에이스 맞대결이 펼쳐진 마지막 9라운드에서 오상욱이 경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해 5점 차까지 추격을 허용하는 등 긴장된 순간도 있었지만, 승리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지난 대회 단체전 동메달을 딴 전통의 강호 헝가리와의 결승도 쉽지 않았다. 개인전 첫 경기 충격패로 4회 연속 금메달이 불발된 헝가리의 간판 아론 실라지를 상대로 박상원이 1라운드 5-4 우위를 점하며 기선을 제압한 한국은 구본길과 언드라시 서트마리의 3라운드에서 15-11로 격차를 다소 벌렸다. 이후 시소 세임이 이어졌고, 한국은 7라운드에서 구본길을 도경동으로 교체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개인전에 출전하지 않고 앞서 단체전 8강, 준결승에도 뛰지 않아 이번 대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 기회를 얻은 도경동은 빠른 공격을 앞세워 러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고 5점을 내리 뽑아내 35-29로 벌리며 승기를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오상욱이 백전노장 실라지의 추격을 뿌리치고 마지막 45번째 득점을 완성하는 순간 선수들은 얼싸안고 환호했다.
한국 펜싱의 간판 종목이 된 남자 사브르는 역경도 있었다. 도쿄 올림픽과 항저우 아시안게임 우승을 합작한 ‘어펜저스’(어벤져스+펜싱) 멤버들 중 절반이 이탈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베테랑 김정환과 김준호가 국가대표 은퇴 의사를 밝히고 파리 올림픽에 불참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들과 올림픽 금메달을 합작했던 오상욱과 구본길은 신예인 박상원, 도경동과 새로 호흡을 맞추며 성공적인 팀 정비와 세대교체라는 무거운 임무를 부여 받았다. 1989년생 구본길은 가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답게 ‘맏형 리더십’을 발휘해 서로 익숙하지 않은 팀원들을 ‘원팀’으로 잘 이끌었고, 오상욱은 ‘뉴 어펜저스’가 첫 출항에 항로를 잃지 않도록 새로운 팀의 든든한 구심점 역할을 했다. ‘뉴 어펜저스’는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며 첫 장의 막을 성공적으로 올렸다.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