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점점 이상한 나라가 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 실패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부추겨 국회 의사당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2021년 1월 유혈 사태 가담자 1200명 이상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헌정 유린을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에 재도전해 중임에 성공하자 폭동 가담자를 애국자로 부르며 대규모 사면을 예고해 논란이 거세다.
트럼프 2기는 고율 관세로 ‘퍼펙트 스톰’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중국산에 60%, 나머지는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한다는 공약이 논란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합병한다며 군대 투입까지 경고하는 대목에 전 세계는 경악한다. 트럼프 재선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조종을 울린 것이다.
미국은 기술 강대국이지만 제조 약소국이다. 생산력이 몰락했다. 미국 스스로도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을 잘 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미국 제조업, 방위산업 기반과 공급망 회복력 평가’를 수행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2017년 제출된 보고서는 암울하다. ‘2000년 이후 6만 곳 이상의 공장과 기업이 문을 닫았고, 제조업에서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20년 미국 제조업 부문의 GDP(국내총생산)는 2조 1580억 달러였는데 서비스 부문은 6배 많은 13조 1000억 달러였다. 미국 중산층은 FIRE(Finance, Insurance, Real Estate), 즉 금융과 부동산에서 부를 창출한다. 땀 흘려 돈을 버는 일자리는 사라졌다.
원인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이 유통되는 기축 통화 달러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껏 찍어 값싸게 상품을 수입하고 과소비 시대를 구가했다.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사들여 미국의 파티 비용을 대납하는 꼴이었다. 이 구조가 미국의 발등을 찍었다.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고 탈제조업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쥐락펴락하는 힘이 압도적인 군사력에 뒷받침된 건 맞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장에 파병하지 않는 것처럼, 트럼프 1기 때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주장해 관철한 것처럼 미국은 피를 흘리는 전쟁에 지쳤다. 그 대신 효과적인 대체 수단을 찾았다. 달러가 ‘종이 군대’가 된 것이다. 달러 흐름을 차단하면 지구 반대편 눈엣가시들이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걸 깨닫게 된 계기는 북한 비자금이었다. 2006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은 ‘신의 한 수’였다. 북한이 강력 반발하면서도 돈을 찾기 위해 읍소하는 걸 보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편의 무릎을 꿇리는 달러 제재의 위력을 발견했다.
결정적인 전기는 2022년 경제 규모 세계 11위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이다. ‘달러 무기화’로 명명된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무수히 많은 러시아 기업과 개인을 금융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러시아가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지 못하면 경제는 망가지고 국민은 고통을 겪는다. 이란, 북한, 베네수엘라도 달러 제국에서 쫓겨난 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작성한 수천 건의 제재 리스트는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 세계에 적용된다. 동맹국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경남 김해의 한 기업이 미국산 기계와 부품을 러시아에 수출했다가 된통 혼났다. 미국은 은행을 경유하는 모든 거래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위반 때는 가차없이 징벌한다. ‘달러 무기화’의 배경에 유엔(UN)의 무력화도 있다. 유엔 상임이사국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한 유엔 제재가 불가능해졌으니 미국이 독자적인 ‘제재 전쟁’에 나선 것이다.
물론 달러 제국에 대한 도전도 끊임 없다. 영국·독일·프랑스가 미국의 이란 제재를 우회하는 유럽연합 내 은행 거래를 시도했다가 거액의 벌금에 좌절한 게 대표적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결제 수단 ‘페트로’도 쓴맛을 봐야 했다. 하지만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협력이 ‘페트로 달러’에 파열구를 낼 지 주목되고, 러시아, 중국, 브라질, 인도가 참가하는 브릭스도 달러 타도에 절치부심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의 제조업·일자리 붕괴는 소위 ‘킹 달러’의 부작용이고, 고율 관세는 이를 타개하려는 극약 처방이다. 강한 달러는 미국에 골병을 안겼지만 밖으로는 무자비한 제재를 휘두를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이 모순적인 구조는 달러가 안전 자산으로 여겨질 때만 지속 가능하다.
오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다. 전 세계는 더 이상해진 미국을 목도하고 점점 더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했던 이념과 가치를 스스로가 허물고 일방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다. ‘전능한 달러’에 대한 의구심과 도전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달러 제국의 아성은 지켜질 수 있을까. 트럼프 2.0 시대가 던지는 질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