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사랑이 끝나고 남은 빚… 법정으로 간 연인들

입력 : 2025-06-18 18: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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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법무법인 예주 대표변호사

“그땐 정말 결혼할 줄 알았어요.” 사랑이 끝난 자리에 돈 문제가 남는 것만큼 씁쓸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이별 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법정에서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최근 SNS에는 젊은 연인 사이에 고가 명품을 선물하거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통 큰 사랑’을 과시하는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 파탄 후 금전 문제로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수많은 약속과 금전적 지원이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연인 사이에서 금전 거래를 할 때 명확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구체적 증거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연인 사이에 오간 돈이 ‘차용’인지 ‘증여’인지를 구별하는 건 사건의 핵심이다. 차용이라면 반환 의무가 있지만, 증여는 그렇지 않은데, 법적 분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입증책임’이다. 계좌이체 내역이 있으면, 대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체 내역은 돈이 건네졌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 돈이 증여나 호의로 준 돈이라고 주장할 때 반박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법원은 ‘다른 사람의 예금계좌에 금전을 이체하는 등으로 송금하는 경우 그 송금은 소비대차, 증여, 변제 등 다양한 원인에 기하여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송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대차에 관한 당사자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에 있는 남녀 간이라고 하여 금전 수수의 원인을 곧바로 증여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그 원인이 대여인지 증여인지는 돈을 주고받은 경위와 용도, 당사자들의 경제 사정 및 구체적 생활 관계, 액수, 반환 의사 유무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관계 파탄 뒤 법정 공방 사례 많아

금전 거래 물증 남기는 경우 적고

차용·증여 가릴 증거 제시 쉽지 않아

로맨스 스캠 사기까지 기승 피해 늘어

법원은 송금 메모 등 정황 통해 판단

금품 오고간 기록 남기는 성숙함 필요

필자가 맡았던 사건이 떠오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선물과 용돈을 줬고, 어느 날 남자는 돈을 불려 결혼 자금으로 사용하자며 여자에게 투자를 권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대출까지 받아 돈을 건넸지만, 수익금을 주겠다는 남자는 소식이 깜깜했고, 알고 보니 투자금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되어 결국 그 관계는 파탄이 났다. 여자는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남자는 그동안 줬던 용돈으로 퉁치자고 응수하면서 법정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돈 액수는 비슷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가 준 돈은 증여였고, 여자가 준 돈은 투자금이었다. 게다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된 그 투자금은 사기 편취금이 되어 형사사건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법원은 문자, 송금 메모, 통화 녹취 등 주변 정황을 통해 실제 의사를 판단한다. “나중에 꼭 갚아줘”, “이건 빌려주는 거야” 같은 표현이 있었다면 반환의 가능성이 더 높게 인정된다. 반대로 기념일, 생일, 이벤트 등 특별한 날에 보내진 금전이나 선물은 증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교제 기간, 금전의 규모, 경제력 차이 등도 고려 대상이다. 명의신탁 문제도 복잡한 쟁점이다. 차량을 연인 명의로 등록하거나, 공동 창업을 하며 한 사람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두는 경우, 관계가 틀어진 뒤엔 실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진다. 단순히 “돈은 내가 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래 내역, 명의자와의 문자, 사용 권한 등이 모두 입증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연애 감정을 악용하는 ‘로맨스 스캠’ 사기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순수한 마음을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 더욱 늘고 있다. 사랑과 사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씁쓸한 세태다. 법정에서 만난 전 연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땐 서로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법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법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래서 연인 사이에도 ‘기록’이 필요하다. 반드시 차용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나 이체 메모 같은 작은 흔적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서 메모를 남긴다는 건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뢰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다. ‘혹시 헤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차용증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성숙한 배려의 표현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사랑이 끝나면, 감정은 사라지지만 돈거래는 남는다. 남은 돈을 두고 다시 법정에서 마주하게 되지 않으려면, 감정과 거래는 분리되어야 한다.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돈이 오간다면 그 순간부터는 기록이 필요하고, 그 끝이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법정에선 감정보다 증거가, 믿음보다 문서가 더 큰 힘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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