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참혹한 전쟁이라지만 75년 전 일이다. 휴전 중이라 해도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우리 머리가 망각에 드는 것은 어쩌면 보통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아니 잠깐이라도 머리에 되새겨 놔야 우리가 누리는 안녕과 평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6·25전쟁에 종군한 작가는 많지만 긴박하고 위험한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도, 전쟁이 주는 파괴와 폭력과 잔인함으로 얼룩진 인간의 어둠을 담은 작품도 거의 없는 듯하다. 변영원의 ‘반공여혼’은 긴박감이나 잔인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전쟁의 폭력성 느낌 때문인지 머릿속에 남는다. 이 작품은 1952년 전쟁 중에 그렸던 것을 1957년 제1회 ‘신조형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아한 것은 당시 주간지 기사는 ‘멸공의 혼’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멸공의 혼’, ‘멸공의 여혼’으로 2000년대까지 혼동돼 쓰다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부터는 ‘반공여혼’으로 바뀐 것 같다. 그 연유가 궁금하다. 참, 이 작품은 2021년 10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린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에 초청받아 출품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배경이 검정과 붉은색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경계는 파상형으로 비스듬한 사선이다. 한 무리가 배경에서 앞으로 빠르게 뛰어나온다. 무리라고 한 것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눈으로 추측되는 형태 때문에 인체를 비구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리는 저마다 총부리나 대포알을 품고 눈을 부라리며 한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원근법으로 처리했다. 최대한 발걸음을 넓혀 급박하게 뛰어나가며 총을 쐈는지 동그란 총부리에서는 연기, 아니면 어두운 하늘을 나는 새인지 모를 도형이 검정 배경 위에 그려졌다. 입체주의 혹은 초현실주의 아니 두 가지가 보인다고 설명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으면 그만이지.
변영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49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곧이어 터진 전쟁 탓에 그림에 열중하지 못하다가 겨우 휴전이 되어서야 다시 화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때는 민족 전통을 계승해 한국성을 찾는 것이 미술계 당면과제로 여겼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가 활동한 신조형파의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라는 선언은 지금 생각해도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우리 역사에서 문화예술은 모두 현실을 반영한 창조적 정신이 깃든 것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를 계승해야 한국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시 처절한 현실인 6·25전쟁을 ‘반공여혼’으로 창작한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은 한국성을 어떻게 찾으려는지….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