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고봉수다! 아니, 조금은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고봉수 랜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할까? ‘빚가리’에 이어 1년 만에 신작을 낸 고봉수 감독은 전작보다 더 깊어지고 한층 안정적인 영화로 돌아왔다. 이 말은 고봉수 영화가 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작 기간 15일, 제작비 250만 원,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델타 보이즈’나 고교생 레슬러들의 고군분투기를 다룬 ‘튼튼이의 모험’에서 보여준 독특한 유머와 재기발랄함은 여전하다.
고봉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짠내 나는 인생을 살거나 찌질한데도 정이 간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피식거린다. “이 영화는 대체 뭐야”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빠져든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작지만 강하고, 허술해 보이는데 빈틈이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씨네필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상영관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서 관객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이 점은 대부분의 독립예술영화가 처한 현실이라 씁쓸하다.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
이국에서 조우한 첫사랑 상처
웃으며 안녕 고할 수 있을까?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다른 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서사와 유머는 일관적이지만, 아련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섬세해졌다. 물론 감독은 퀵서비스 기사의 짝사랑을 다룬 ‘다영씨’에서도 로맨스를 그렸지만, 무성흑백영화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귤레귤레’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사랑과 상처, 이별의 감정을 다루고 있기에 보편적이다. 또한 한국을 벗어나 튀르키예라는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낭만과 몽환을 오간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대식은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로 출장을 왔다가 상사 ‘원창’의 강요와 억지로 3일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함께하는 멤버는 대식과 팀장, 여행 유튜버와 그녀의 두 딸, 이혼 후 재결합을 위해 여행에 나선 정화와 병선, 현지 가이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대식은 정화를 보자마자 흠칫 놀란다. 대학 동창이자 공대 여신으로 불렸던 정화는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대식은 정화에게 고백했지만 대차게 차였고,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중 그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대식은 정화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정화는 전남편과의 불화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 척한다. 게다가 눈치 없는 원창과 막말을 퍼붓는 병선,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가이드로 인해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벌룬(열기구) 투어 장면이다. 수많은 벌룬이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이 영화는 풍광이 아니라 사람에 집중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대식은 ‘귤레귤레’를 몇 번이고 외쳐본다 ‘웃으며 안녕’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상처받은 과거, 불행한 현재와 이별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마법의 말이다. 과거의 감정에 안녕을 고하는 인사다. 저 멀리서 정화도 대식이 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식과 정화는 처음 튀르키예에 왔을 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무언가 후련해 보인다.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인 영화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신민재, 김충길, 백승환 배우의 개성적인 연기는 과한 듯 선을 넘지 않으면서 현실감을 부여한다. 소심하고 어리숙한 대식을 연기한 이희준 배우의 섬세하고 귀여운 멜로는 그를 다시 보게 만든다. 나아가 여행이 주는 낯선 감각, 첫사랑과의 재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메말랐던 감정을 건드린다. 그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선가 만날 것만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