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채소를 구독하고 있다. ‘채소 구독’이라니 어쩐지 비문 같지만, 업체에서 실제로 그 단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일단 요즘은 뭐든 다 구독하는 시대 아닌가. 언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이제 ‘구독’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문이나 잡지 등의 간행물을 정기적으로 구매해서 읽는다는 뜻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유튜브, 음원, OTT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부터 쇼핑, 배달, 생활 가전 대여에도 ‘구독’이라는 말을 쓰고, 심지어 최근에는 차량까지도 월간 구독 서비스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다간 집도 구독하고 인간관계도 구독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채소 구독 서비스는 꽤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관련 업체의 홈페이지 배너를 무심코 클릭했다가 정기 결제까지 누르게 되었다. 품질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생김새 때문에 버려져야 할 위기에 처한 농산물들을 구출하자는 것이 이 업체의 모토였는데, ‘채소 구출하기’라는 배너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 작은 의협심이 샘솟았다. 그 아래쪽에는 특이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버려져야 하는 채소들의 사진이 있었다. 갓이 두 개인 버섯, 쭉 뻗지 않고 휘어진 오이, 우람하고 통통한 청경채, 다리가 세 개인 당근…. ‘조금만 기다려, 얘들아. 내가 너희들을 구해줄게.’ 주황색 배너의 ‘구출’이라는 단어와 채소 사진들은 내 감정을 제대로 건드렸다. 비록 구출해서 바로 먹어버린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사랑의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먹어서 내 몸 안에 ‘저장’하는 것 또한 사랑의 한 형태라고 한다면 너무 그로테스크한가.
채소 구독에 작은 의협심 샘솟아
디지털 시대 간편한 애정 표현
우리의 진심은 얼마나 들어 있나
구독을 시작하자 매주 다양한 채소들이 박스에 담겨 배달되었다. 박스 안에는 채소들의 이름과 사연이 적힌 종이도 함께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농약을 치지 않아서 잎에 벌레 먹은 구멍이 많다든지, 타고난 모양이 개성 있다든지, 크기가 아주 우람하거나 아담하다든지 그런 내용이었다. 사연 있는 채소라니. 너무 감성에 호소하는 마케팅이다 싶으면서도, 그런 사연 때문에 버려질 뻔했던 존재들이 사라지지 않고 내게로 왔다고 생각하니 단 하나라도 시들어 버리게 하지 말고 열심히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생으로 먹고, 데쳐먹고, 볶아먹고, 갈아먹고.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식탁이 풍성해지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의구심도 들었다. 이것이 과연 지구 환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인가. 혹여 자기만족과 일시적 위안에 불과한 건 아닌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미식 철학자 브리야 사바랭의 그 말은 여러 버전으로 변형되어 쓰이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당신이 무엇을 구독하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구독은 실시간 취향의 반영이다. 소유와는 또 다르다. 일단 한 번 소유한 것들은 버리는 데 큰 결심이 필요하기에 애정이 식었더라도 계속 곁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구독은 단기적인 계약과 만족도에 따른 연장의 관계이기에 맺고 끊기가 훨씬 간단하다. 옛날처럼 ‘○○일보 사절’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써서 대문 앞에 붙여놓을 필요도, 몰래 신문을 넣고 가는 배달원과 오랜 기간 실랑이를 벌일 필요도 없다.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저 구독 취소를 한 번 클릭하면 되고, 처음엔 좋았더라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좋아요’ 눌렀던 것을 취소하면 그뿐이다. 일견 합리적이고 편리한 것 같은 이 시대의 시스템, ‘구독과 좋아요는 사랑입니다’라고 외치는 디지털 시대의 간편한 애정 표현에 우리의 진심은 과연 얼마나 들어있을까. 손쉽게 ‘채소 구출하기’ 배너를 누른 내 마음은 정말 사랑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