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을 선보이는 건 처음입니다. 감개무량하고 설렙니다.”
박찬욱 감독이 신작 ‘어쩔수가없다’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의 문을 열었다. 박 감독은 17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린 개막작 기자회견에서 “새 작품을 BIFF 개막식에서 아시아 프리미어로 공개한다”며 “영화제 30주년이라는 상징적인 순간에 개막작으로 선보이게 돼 떨린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박 감독을 비롯해 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등이 함께 했다.
이 영화는 미국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The Axe)’를 원작으로 한다.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된 한 남자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감독은 이 남자가 벌이는 비극적 소동을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산업 구조의 변화, 현대사회의 균열을 두루 비춘다. 영화 속 AI(인공지능) 발달로 인한 정리해고와 실업, 고용 불안정이 일상화된 사회의 모습은 동시대 현실과 맞닿아 있다. 여기에 박 감독 특유의 정교하고 선명한 미장센은 평범한 인간이 타락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드러낸다.
박 감독은 이 과정에서 ‘생존의 조건’이라는 보편적 질문을 던져 위기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감독은 “개인적 이야기와 사회적 이야기가 완전히 결합된 서사”라며 “내가 사랑하는 일에 종사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비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역설을 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공간적 장치에 주목했다. 감독은 “주인공 만수가 ‘애정’하는 집은 하나의 캐릭터로 기능해야 했다”면서 “알맞은 공간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결 같은 콘크리트 구조와 온실, 정원을 새롭게 개조해 그 의미를 강화했다”고 전했다.
영화는 노동 환경의 변화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를 투영한다. 한때 ‘펄프맨’ 상까지 받았던 한 남자가 디지털화로 인해 제지 업계 환경이 악화하면서 처하는 상황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기에 있는 영화·극장 업계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박 감독은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주인공 만수의 모습에서 각각 자신의 삶을 떠올릴 것”이라며 “누군가는 영화를 2시간짜리 오락거리라고 할 수 있지만, 저에게 영화는 모든 걸 다 쏟아부어서 하는 인생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영화계가 어렵지만 이 상태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우리 영화가 영화계를 이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손예진은 “7년 만에 영화 복귀작인데 앞으로 얼마나 오래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고 했고, 박희순은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이젠 영화만 고집하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산업이 어려워진 것 같다. 영화인들이 힘을 좀 더 내서 좋은 영화를 만들면 산업이 나아지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이날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 도시’ 부산을 찾은 데 기분 좋은 설렘도 전했다. 박 감독은 이번 작품의 곳곳에 부산 동구 수정동과 영도구, 금정구 부산대 등의 모습을 담았다.
감독은 “부산은 바다와 도시, 골목이 공존해 영화에 필요한 모든 풍경을 갖춘 곳”이라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영화를 부산에서 일부 장면이라도 촬영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은 시나리오를 쓰기에도, 머물기에도, 영화를 찍기에도 좋은 도시”라고 힘줘 말했다.
이병헌은 “부산에서 여러 작품을 촬영했는데, 색다른 곳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며 “이번에도 부산의 풍경을 보면서 마치 지중해의 어떤 섬에 있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이국적이고 참 예쁜 곳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촬영했다”고 털어놨다. 손예진은 “부산은 영화와 밀접한 도시다. 부산에 오면 꼭 들르는 떡볶이 맛집도 있다”며 웃었다. 박희순은 “이성민 선배가 (프랑스)칸을 작은 해운대라 표현했을 만큼 촬영하기도 머물기도 좋은 도시”라고 했고, 이성민은 “부산은 늘 설레는 곳이고, 외국보다 더 매력적인 도시”라고 강조했다. 염혜란은 “자연과 도심을 함께 품은 부산은 내게 상징적이고 꿈 같은 곳”이라고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