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여백

입력 : 2025-10-28 17: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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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길산 (1960~)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새가 점점 멀어져

맨눈으로 식별되는 거리를 벗어나도

바탕이 여백이라서 저게 새란 걸 안다

갖출 것 갖춘 숲을 박차고서

나뭇가지 하나 없는 여백으로 깃드는 새

햇빛뿐이거나 바람뿐이거나 마음뿐인 거기서

뜨겁거나 떨리거나 외롭거나 한 거기서

점점 점이 되어가는 새

새도 아는 것이다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갖출 것 갖춘 숲이 아니라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여백이 새를 점점 깊숙이 안으면서

큰 점이 되었다가 작은 점이 되었다가

마침내 점이란 것마저 버리고

스스로 여백이 되는 새

시집 〈거기〉 (2024) 중에서

단순히 비어있음을 의미하는 공백과 달리 여백은 대상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는 공간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 비어있어 미완인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멀어지다가 마침내 여백이 되어가는 새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마음뿐인 거기, 외롭기만 한 거기로 깃드는 새를 바라보며 비어있는 곳이라면 채우려고만 하는 정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새가 생동적인 새로 드러나기 위해 갖출 것 갖춘 숲을 박차고 여백을 향해 날아가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퇴보하는 듯 보일 수도 있겠지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충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가능성과 포용성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곳. 빠름보다는 느림,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향한 움직임. 잠시 바쁜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위해 나만의 여백을 찾아보게 하는 시편입니다. 신정민 시인

금정산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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