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는 매혹적이다. 검은 수트와 붉은 드레스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 속에 찰나의 눈빛 교환과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는 손길, 그리고 박자에 맞춰 정교하게 교차되는 발짓이 어우러질 때면 숨이 멎을 정도다. 파트너의 몸에 기댄 채 한 발을 내딛고, 순간적으로 무게 중심을 바꾸는 것은 상대를 완전히 신뢰해야만 가능하다. 왈츠의 춤사위는 유려하면서도 흥겹다. 풍성한 치맛자락이 회전하면서 일으키는 잔상은 물결무늬처럼 퍼진다. 왈츠의 우아함은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일 때 완성된다.
영국 BBC ‘Strictly Come Dancing’은 21년째 장수하는 댄스 경연 프로그램이다. 방송 제목은 ‘정통 볼룸·라틴 춤추기’에서 따왔지만 의역하자면 ‘정성을 다해 춤추러 오세요’. 이 춤바람은 가을의 전령사다. 해마다 가을 초입에 아마추어와 프로가 짝을 이룬 15개 팀이 실력을 겨뤄 매주 주말 꼴찌가 탈락하는데, 크리스마스께 결승전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한국은 물론 세계 많은 나라에 ‘댄스 위드 더 스타’ 등의 제목으로 판권이 수출된 인기 콘텐츠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9월 27일 첫 경연이 시작돼 4주 만에 4팀이 탈락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문 춤꾼은 물론 일반 참가자의 면면은 ‘따로 또 같이’다. 장애인, 성 소수자, 고령자는 물론 중국과 동유럽 출신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용광로처럼 섞인 채 불꽃 경합을 벌이는 게 이 프로그램의 힘이다. 국적·인종·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믿음직한 파트너가 되어 고난도의 춤 동작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따르다 보면 저절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주 한 커플이 아르헨티나 탱고 종목을 선택해 멋진 무대를 선사했다. 아르헨티나 탱고는 기술, 음악, 춤의 스타일 측면에서 탱고와 큰 차이가 있다. 즉흥성이 강하고 음악 해석에 따른 감정 표현의 폭이 넓다. 유럽에서 경연 대회용으로 정형화된 탱고에 비해 고난도라고 이해하면 쉽다. 비엔나 왈츠와 왈츠도 원형과 개량형이 다른 종목으로 갈라진 경우. 비엔나 왈츠는 왈츠보다 두 배 빠른 템포로 쉴 새 없이 회전하며 무도장을 종횡무진하는데 그 모습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비전문가가 한 달 만에 아르헨티나 탱고나 비엔나 왈츠를 선보인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도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처음엔 파트너와의 관계가 어색했을 테고, 어깨가 경직되고 발이 엉키고 박자를 놓쳤을 게 뻔하다. 겨우 안무를 몸에 익혔다 한들 파트너십이라는 난관에 맞닥뜨린다. 상대의 동선과 속도, 다음 스텝을 의심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의 한 코너 ‘It Takes Two’는 ‘짝지가 필요해’, ‘둘이니까 가능해’로 옮길 수 있는데, 결국 예술적 완성도는 두 사람의 호흡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상대를 무시하면 커플 댄스는 성립되지 않는다. 파트너를 믿고 무게 중심을 공유할 때 완성되는 협력의 예술이라서다. 만일 대립하거나 단절되면 그저 허위허위 내지르는 혼자 몸짓에 그친다. 타인의 손을 잡아야 내가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건 비단 무대에서만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상생, 경제적으로 동반 성장, 정치적으로 공화주의에 대입해 보면 그 취지가 통한다.
유튜브를 통해 영국에서 진행되는 댄스 경연 대회를 사실상 실시간으로 시청하면서 가을밤의 정취를 즐기는 호사를 누리는 사이, 생게망게 독무만 난립하는 한국 정치판이 겹치는 장면은 민망하다. 비유하자면, 지금 우리 정치는 관객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막춤을 들이대는 진상들이 서로 이기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꼴이다.
목하 한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악화일로로 치달아 상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의견이 다른 진영끼리 대화와 설득이 불가능해지고, 혐오와 저주는 점점 크게 울려 퍼진다.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라거나, ‘죽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식의 정치권 막말이 더 이상 금기어 축에도 못 끼는 상황에 사회 통합은 언감생심이다.
관객에 감동을 주는 춤, 유권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정치는 상대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강제력을 동원해 상대를 춤추게 할 수 없듯이, 민주정은 강요나 무력 대신 설득과 참여를 통해 통합되는 질서를 추구해야 한다. 같은 무대에 올라 각자 다른 장단에 제각각 몸을 흔들어 대는 추태를 반복하는 이들은 무대에 오를 자격이 없다. 꼴불견 무대는 더 이상 보기 싫다. 여야 정치권은 국민에 공감과 감동을 주는 정치 무대를 복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