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입력 : 2025-12-17 18: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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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책임감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덕목이지만 내게 주어진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책임(責任)이라는 단어를 1.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또는 2. 어떤 일과 관련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으로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정의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성실히 임한다는 뜻에서 보통 ‘책임을 다하다’고 표현한다. 후자의 정의는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한 것으로서 ‘책임을 진다’고 표현한다. 국어에서는 이렇게 책임이라는 한 단어가 과정에 대한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포괄하고 있지만 영어는 다르다. 책임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인 ‘Responsibility’ (이하 R)는 엄밀히 말하면 국어사전의 첫 번째 정의에 가깝다. 두 번째 정의에 해당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은 ‘Accountability’ (이하 A)라는 단어가 적절해 보인다. 직역하자면 ‘설명할 책임’을 뜻하는 A는 책임질 결과에 대해 주관을 기여한 당사자가 자신의 판단을 해명할 책임이다.

책임감,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

과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나뉘어

기업, 법인격으로 주인 없는 듯 보여

도덕적 해이·책임 회피의 주요 원인

인간, 주체적 판단·행위 결과에 반성

모든 종류의 책임을 부여받은 존재

과정에 대한 책임(R)과 결과에 대한 책임(A)의 차이를 살펴보면 R은 여러 명일 수 있지만 A는 보통 한 사람이다. 예컨대 이벤트팀에서 세모 행사를 열었다고 가정해 보자. 팀원들은 모두 세모 행사에 R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하지만 행사결과에 대해서는, 즉 A는 궁극적으로 팀장에게 귀속된다. R은 복수에게 분배되고 위임될 수도 있지만 A는 단수이고 분배되거나 위임될 수 없다. 이유는 소유 개념과 관련한다. 소유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최종 주인을 전제한다. 설령 팀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졌더라도 업무를 주관한 팀장이 지배적 주인으로 간주되어 A를 갖는다. 그런데 만약 업무가 상세한 규칙과 절차들로 정해져 있어 이를 따르기만 했다면, 업무에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면 어떨까. 책임자는 “매뉴얼을 따랐을 뿐이다” 외에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 A의 귀속주체가 사라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대규모 분업 체제의 조직 형태인 관료제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현대 전쟁에서 투입되기 시작한 자율형 전투로봇 사례도 유사할 수 있다. 인간의 승인 없이도 살상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들에 대해 책임자는 “AI 알고리즘을 따랐다” 외에 설명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람이 아닌 비인간주체의 사례도 생각해보자. 경비견 한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다. 경비견에게는 집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과정에 대한 책임이다. 만약 경비견이 집을 못 지켜 집에 도둑이 들었더라도 경비견에게 도난당한 결과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사태의 결과는 경비견의 주인에게 귀속된다. 한편 최근 벌어진 쿠팡 정보 유출 사태로 본 기업의 책임은 어떤가. 정보보안 업무에 대한 행위의 책임은 쿠팡 담당자들에게 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쿠팡의 대표이사도, 이사회 의장, 직원들도 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이는 쿠팡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기업의 주인이 주주라면 주주들이 지분율에 따라 배상을 분담하게 될까. 나의 주인이 나라는 것과 동일한 논리로 법적 인간인 쿠팡의 주인은 쿠팡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쿠팡에 귀속되어 배상금도 쿠팡의 법인 잔고에서 지출된다. 과정에서의 책임은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위임하고 분배할 수 있지만 결과적인 책임은 기업 자신이 갖는데 법인격이기에 마치 주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업활동에서 도덕적 해이와 책임 회피를 유인하는 주요 원인이다. 우리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말할 때 CSR은 과정에 대한 책임이고 CSA가 아닌 이유도 유관하다.

서양사상의 이원론적 사고관은 책임을 과정과 결과로 나눈 것처럼 책임의 속성 역시 도덕적 책임과 법적 책임을 구분한다. 법적 인간은 법적 책임을 갖는다. 법인격이 부담하는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Liability)은 대부분 금전배상이다. 따라서 법인격에 재산권은 핵심적이다. 앞서 경비견에게도 재산권이 있었다면 경비견은 결과에 법적보상을 물을 수도 있다. 이는 미래에 인공지능에게 법인격이 부여된다면 인공지능 역시 지금의 기업과 유사한 법리로 법적 책임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은 도덕적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의 결합이다. 이는 사람만이 법적 강제성을 떠나 자발적으로 내면에 양심적 가책을 느낄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도덕적인 존재임을 의미한다. 또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에(법인격도 과정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사람에게 위임해 CSR처럼 책임을 요구할 수 있다) 자신의 자율적인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적인 책임을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고 스스로 짊어져야 함을 뜻한다. 결국 주체적으로 자신의 판단과 행위가 불러온 결과를 반성하는 일은 인간만이 가능하며 역으로 인간은 모든 종류의 책임을 부여받은 책임적인 존재다.

금정산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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