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가 보이는 광안리 해변. 공공 벤치가 부족한 탓에 백사장에서 시민들이 플라스틱 의자를 찾아 이용하고 있다. 부산의 해안가가 머물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진화하기 위한 공공 벤치 등 다양한 휴게 시설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변은샘 기자
부산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는 매년 1억 50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대표 ‘보행로’다. 하지만 이곳에서 잠시 숨 돌릴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걷다 지친 관광객들이 발길을 멈추는 곳은 공공 벤치가 아닌, 해변을 따라 늘어선 대형 카페나 식당이다. 이른바 ‘물멍’(바다를 보며 멍하니 쉬는 것)을 즐기기 위해 7000~8000원의 커피값을 지불해야 하는 ‘유료 휴식’이 부산 관광의 현주소다.
■조망권 가로막는 ‘의자 부재’ 역설
부산은 바다와 산, 도심이 어우러진 천혜의 조망권을 갖췄지만, 이를 온전히 누릴 공공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부산의 대표 관광지들을 살펴보면, 시민과 관광객이 잠시 다리를 쉴 수 있는 벤치는 노후화되었거나 특정 구간에만 편중되어 있다. 특히 해안산책로는 걷기에는 좋으나, 앉아서 바다를 감상하려면 인근 상업 시설에 들어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원도심 산복도로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부산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는 많지만, 대부분 가파른 계단이나 좁은 인도뿐이다. 관광객들은 사진 한 장만 남긴 채 서둘러 자리를 뜬다. ‘스쳐 가는 관광’이 반복되는 이유다. 편히 머물 벤치가 없으니 체류 시간이 짧아지고, 결국 지역 경제가 관광객 수 증가를 체감하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인 북항재개발 구역은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개방된 북항 친수공원은 광활한 부지와 부산항대교의 조망을 자랑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쉴 수 있는 벤치나 그늘막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행로가 단순한 ‘통로’로만 기능할 뿐, 시민들이 머무르며 문화를 향유하는 ‘광장’의 역할은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발간된 부산시의 ‘부산 관광산업 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외지인 방문객은 전년(1억 4804만 명) 대비 1.5% 증가한 1억 5024만 명을 기록했다. 서면과 해운대·광안리 해수욕장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은 것으로 나왔으나, 정작 체류 시간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외지인 평균 체류 시간은 6.5시간으로 전년(6.9시간) 대비 약 7% 감소했다. 반면, 보행 환경이 잘 조성된 오륙도·이기대 갈맷길은 5.4시간으로 비교적 긴 체류 시간을 기록했다. 방문객이 압도적인 해운대·광안리의 체류 시간이 3~4시간에 그친 것은, 비용 지불 없는 휴게 시설이 체류 시간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에 전문가들은 부산의 지형적 특성을 살린 ‘전망형 벤치’ 도입을 제안한다. 단순히 기성품 의자를 배치하는 수준을 넘어, 지형을 활용한 특화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가령 해운대와 광안리에는 모래사장과 보행로 사이의 단차를 활용한 ‘계단식 해변 테라스’를 조성할 수 있다. 수백 명의 시민이 자유롭게 앉아 바다를 보거나 공연을 관람하는 광장형 공간이다. 산복도로에는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스탠드형 벤치’를 통해 입체적인 야경을 즐기는 방식이 거론된다. 이는 단순한 가구 확충을 넘어, 도시의 경관을 시민에게 돌려주는 ‘경관 주권’의 회복이다.
■‘15분 도시’ 부산, 벤치가 마침표
부산시는 현재 집 가까운 곳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한 ‘15분 도시’ 정책을 추진 중이다. 보행로를 넓히고 공원을 조성해 ‘걷는 즐거움’을 주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길의 완성은 결국 멈춤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걷는 즐거움이 ‘머무는 즐거움’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도시에 생명력이 돌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15분 도시’의 핵심인 보행의 연속성을 완성하는 마침표는 ‘벤치’가 되어야 한다. 시민의 보행권을 완성하고 사회적 소통을 유도하는 필수 인프라로 벤치를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공 벤치 확충은 단순한 편의 제공 이상의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베트남 하노이 호안끼엠의 벤치가 시민의 거실이 되고, 일본 롯폰기 힐즈의 의자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된 사례처럼, 누구나 무료로 머무는 ‘결제 없는 휴식’ 공간은 유동 인구를 늘리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한다. 부산이 진정한 ‘15분 보행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풍경의 끝자락마다 시민의 자리를 마련하는 벤치 정책이 시급하다. -끝-
이은철·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 이 기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이은철 기자 euncheol@busan.com ,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