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학폭 낙방!

입력 : 2026-01-26 18: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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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 편집부 차장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본 사람이라면 기억한다. 학폭(학교 폭력) 피해자가 평생 어떤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드라마 특성상 다소 과장된 장면도 있었지만, 피해자의 복수심·좌절·체념·분노와 같은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공감대를 얻었다.

미성년기에 입은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로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성장 과정 자체가 흔들리고, 관계·학업·자존감이 함께 무너진다. 학폭이 단순한 ‘사춘기 일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궤도를 바꾸는 사건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확산된 이유다.

그런 점에서 올해 대입 전형에서 나타난 변화는 상징적이다. 학폭 가해자 대다수에게 사실상 철퇴가 내려졌다는 점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이 공개한 ‘2026학년도 수시 전형 학폭 반영 현황’ 자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대학 170곳에 학폭 가해 전력이 있는 수험생 3273명이 지원했고 이 가운데 2460명(약 75%)이 불합격했다. 특히 서울 주요 11개 대학으로 범위를 좁히면 지원자 151명 중 단 1명만 합격하고 150명이 탈락했다. “학폭 가해자는 대학 진학이 어렵다”는 말이 입시에서도 현실적인 위험 요소가 된 셈이다.

이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정부는 2023년 ‘학폭 무관용’ 기조를 내걸고 2026학년도부터 모든 대학 전형에서 학폭 조치 사항을 반영하도록 했다. 대학들은 감점 기준을 마련해 입시에 적용했다. 대입은 1~2점,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점 차이로도 당락이 갈린다. ‘학폭 감점’이 상징적 문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합격 여부를 가르는 변수로 작동했다. 현재 진행 중인 정시 전형에서도 학폭 감점이 적용되는 만큼 불합격 사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학폭 처벌의 강도가 아니라, 사회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몇 대 맞은 것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말로 묻히던 폭력이 이제는 “기록으로 남아 가해자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문제”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학폭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사회적 의지가 ‘학폭 낙방’ 시스템으로 구현된 셈이다. 물론 진정한 반성·재발 방지 등 실질적 노력이 학폭 근절 대책에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한 논의도 계속 이뤄져야 하지만, 학폭을 ‘지나가는 일’로 두지 않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변화가 학교 담장 안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는 폭력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학폭 못지않게 심각한 직폭(직장 내 폭행·폭언)은 어떠한가. 현실에서는 직폭 가해자 다수가 여전히 직장을 다니는 반면, 피해자 10명 중 7명은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고통과 수치심 탓에 휴직·이직·퇴사를 고민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더욱 선명해진다. 미성년자인 학생에게 ‘학폭 낙방’은 가해자의 몫이 되지만, 성인인 직장인에게 ‘직폭 퇴사’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몫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인이라면 ‘학폭 낙방’과 같은 강제적 조치가 이뤄지기 전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학폭 낙방이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의지를 통해 현실이 됐듯이, 이제는 직폭 퇴사 역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이 되도록 사회적 의지가 작동해야 할 시점이다.

김형 기자 moo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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