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바라본 미국 연방대법원. 미국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작성한 6대 3 판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의 적법성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렸다. AFP 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20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별 상호관세에 대해 위법 판결을 내렸지만, 우리 정부가 약속한 3500억 달러(약 505조 원) 규모의 대미투자 합의를 뒤집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상호관세는 무효가 됐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쓸 수 있는 통상 카드가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미국이 곧바로 '대체관세' 카드를 꺼내 들어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자동차 등 핵심산업에 고율의 품목별 관세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해 4월 2일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전 세계 무역 상대국에 국가별 상호관세를 발표하면서 한국에 25%의 관세를 매겼다. 이어 그해 4월 3일부터 자동차에 25%, 5월 3일부터 자동차부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했다.
한국이 지난해 7월 3500억 달러(약 505조 원) 규모의 대미투자를 약속하자 미국은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했다. 이에 따라 상호관세는 25%에서 15%로 인하됐지만, 대미투자 중 현금 투자 비율 등을 둘러싼 이견으로 자동차 관세 인하는 지연됐다.
이후 양국은 지난해 11월 '한미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MOU 이행을 위한 법안이 한국 국회에 제출되는 달의 1일 자로 관세 인하 조치를 소급 적용하기로 했다. 한국 국회에 대미투자특별법안이 제출되자 미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1일 자로 한국산 자동차 등 관세를 15%로 소급 인하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지난해 관세 협상에서 상호관세 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같은 품목별 관세 압박이 실제로 더 크게 작용했다"며 "우리나라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것도 상호관세와 품목별 관세가 엮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상호관세의 법적 근거에 제동을 건 것이지 트럼프 행정부의 다른 관세 부과 권한까지 제한한 것은 아니다. 자동차나 반도체 같은 핵심산업에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지난해 관세 협상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평가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4월 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관세에 관해 서명된 행정명령을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플랜 B'를 통한 관세 정책의 연속성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는 최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대법원이 행정부에 불리하게 판결해도 다른 법적 수단을 활용해 관세를 계속 부과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대체 수단으로는 이미 사용 중인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 확대를 비롯해 무역법 301조와 122조, 관세법 338조 등이 거론된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연구실장은 "이미 조사가 사실상 거의 완료된 품목관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며 "미국 정부가 상호관세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더 강력한 대체 관세를 도입할 수 있어 새로운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인상을 무기로 한국에 신속한 대미투자를 요구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는 점도 기존 합의를 되돌리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특히 일본이 예상보다 빠르게 첫 대미투자 프로젝트를 확정하면서 한국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졌다는 분석이다.
장 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과 전반적인 한미 간 협상 분위기를 보면, 이번 대법원 판결로 미국 정부의 압박 수위가 다소 완화되더라도 이미 합의된 투자에 대해 재논의가 이뤄지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 이후 이어질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로 끝이 아니다. 대법원 판결만으로는 부족하고, 미국 정부가 내놓을 상응 조치를 종합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며 "현재 시나리오별로 다양한 대응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로 국내 수출 기업들은 그간 납부한 관세에 대해 환급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은 긍정적 요소로 꼽힌다. 다만, 우리 기업들이 즉각 관세를 환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는 지적이다.
조 실장은 "관세 환급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며 "최종적으로 (수출자와 수입자) 누가 관세를 부담했는지를 입증해야 하고 절차도 까다롭다. 단순히 '우리가 낸 돈이니 다 돌려받는다'는 식의 일반화는 착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 실장은 관세 주무 부처인 세관국경보호국(CBP)이 구체적인 환급 절차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실제 환급이 이뤄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양주영 산업연구원 경제안보·통상연구실장은 “이미 수많은 기업이 환급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CBP를 상대로 선제적 소송을 제기했다”며 기업별 소송을 통한 환급 가능성을 언급했다.
관세 환급 소송은 미국 대형 유통업체 코스트코가 지난해 12월 가장 먼저 제기했고, 이후 줄소송이 잇따르면서 지금까지 세계 1000여 개 기업이 소송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