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이 지난 9일 ‘절윤(윤석열 절연)’을 선언했다. 그간 ‘윤(석열) 어게인’ 차단 요구에 선을 그었던 장동혁 당 대표에겐 어떤 의미일까. 지도자가 자신이 고수한 노선을 꺾는다는 것, 혹은 꺾인다는 것은 권위와 리더십의 추락을 의미한다. 자신이 내건 어젠다를 내려놓는 순간 내리막이 시작된다는 것을 야당 대표가 모를 리 없다. 그가 풍찬노숙과 24시간 필리버스터 등 강경책과 반대파 징계·축출 같은 무리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윤 어게인’의 손을 놓지 않았던 이유다.
당장 ‘절윤’ 선언을 행동으로 보이라는 반대파의 압박 수위는 높아지고 있다. 인적 쇄신과 징계 철회에 이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혁신 선대위에 권한을 넘기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선거 패배 후 불명예 퇴진하느냐, 아니면 선거 전부터 식물 대표가 되는 수모를 받아들이느냐. 대한민국 보수의 적통을 계승한 정당은 또다시 리더십 혼란에 빠졌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9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눈가를 만지고 있다. 장 대표 오른쪽은 서울시당위원장인 배현진 의원. 연합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 요구에 반대한다.” 국힘 의원 106명 전원이 ‘윤 어게인’ 반대를 결의한 것은 뒤늦었지만 다행이라는 반응이 다수다. 하지만 결의문에 이름을 올린 장동혁 대표는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하는 실천 행보에 나서지 않으면서 ‘지방선거용 정치 쇼’라는 비아냥이 이어지고 있다.
‘절윤’ 결의의 후속 조치가 없으면 ‘꼼수’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장동혁 대표는 이틀 만에 침묵 모드를 깨고 “선언을 존중한다”면서도 인적 쇄신 요구를 일축했다. 후보 등록을 거부하는 승부수를 띄워 노선 전환을 끌어낸 오세훈 서울시장은 ‘가시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12일 추가 공모마저 불참했다. 오세훈 시장까지 공개적으로 혁신 선대위를 요구했는데 이는 사실상 장동혁 대표의 2선 후퇴를 압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 대표가 주요 선거를 앞두고 그림자 취급받는 걸 수용할 리가 없다. 강 대 강 충돌의 전운이 고조되는 와중에서 이정현 공천관리위원장이 돌연 사퇴하면서 당 상황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여기에 총선 패배 책임 등을 이유로 ‘절한(한동훈 절연)도 해야 한다’는 반격이 나오면서 여진이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마지막 입장… 더 이상의 논란은 선거 승리에 도움이 안 된다”는 장동혁 대표의 바람과는 반대로 당내 혼란은 위기일발이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9∼1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더불어민주당은 43%, 국힘은 17% 지지율을 기록했다. 제1야당이 12·3 계엄 때(26%) 밑으로 떨어진 것은 중도층 민심 이반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국회 다수당을 내세운 민주당의 입법 독주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들은 야당을 견제 세력으로 여기지 않은 탓이다. 대통령 임기 중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집권 여당이 불리하기 마련인데, 올 6·3 지선은 되레 야당 심판론으로 흘러갈 조짐마저 보인다. 장동혁 대표가 법원의 내란 판결에 ‘무죄 추정’ 운운하며 국민적 상식을 비껴가면서 자초한 곤경이다. 성난 민심 앞에서 제1야당 대표의 리더십의 붕괴는 초읽기에 몰려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9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윤 어게인’ 반대 당 노선 채택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근대화를 이끈 보수 정당의 추락은 정체성과 리더십의 분열에서 비롯됐다. 당의 노선과 지도 체제의 흐름으로 보자면 ‘당 대표 잔혹사’의 악순환으로 설명된다.
국힘 대표는 임기를 채우기는커녕 1년 미만 단명이 반복되는 불안정이 일상인 정당이 됐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당명이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으로 바뀌는 동안 대표는 ‘소모’되고 마는 존재가 됐다.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퇴진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징계위 회부나 대통령의 압박으로 당의 얼굴이 쫓겨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되풀이된 것이다.
장동혁 대표의 전임인 김기현, 한동훈, 이준석 모두 대통령실의 ‘찍어 내기’와 징계 및 퇴진 연판장 압박 끝에 내쳐졌다. 황교안 전 대표는 탈당한 뒤 부정 선거론을 전파하는 극우의 최전선에 서 있다. 역시 탈당한 홍준표 전 대구시장도 유사 종교와 결탁한 당내 세력 탓에 자신이 대선 후보 경선에 패배했다고 믿고 국힘에 ‘해산되어야 할 정당’이라는 저주를 퍼붓고 있다. 역대 대표들의 정치 캐릭터를 지금 시각에서 들여다보면 공통분모를 찾기조차 어렵다. 그들을 보고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국힘의 본질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오늘날 국힘이 겪고 있는 정체성 분열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누적된 결과다.
자중지란의 뿌리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20대 총선 공천권을 둘러싸고 ‘친박(근혜)’과 충돌했다. 대통령 권력은 ‘친박 감별’을 내세워 미래 권력의 부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옥새 들고 나르샤’ 사건으로 비화한 공천 파동으로 집권당은 죽다 살았다. 한국 정당사에서 청와대와 당 대표 사이에 계파 갈등이 폭발한 것은 유례없던 일이다. 그러다 대통령 탄핵의 쓰나미가 덮쳤다. 보수 세력은 분당과 합당을 거치는 동안에도 정치적 셈법에 매몰돼 과감한 쇄신 대신 미봉책을 선택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소위 탄핵의 강을 넘지 못한 것이다. 정체성 분열과 내분의 씨앗이 이때 뿌려졌다.
내부의 혁신 동력을 잃다 보니 종교 등 외부 세력 지원이나 명망가 ‘업둥이’에 의존하는 병폐가 고착화된 게 화근이다. 그 결과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국힘에 씻지 못할 생채기를 남겼다. 문제는 내란 정당이라는 가해자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모자랄 판에 역주행을 거듭한 것이다. ‘절윤’을 주장하는 반대파를 징계로 축출하는 ‘데스노트 정치’ 행태에 중도는 물론 보수층마저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당명 개정을 준비 중인 국민의힘 중앙당사에 기존 당명을 지운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당 대표는 당원 개개인의 자유 의지의 총합… 자연인 인격체가 아니다.” 지난 1월 국힘 중앙윤리위원회가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게 내린 ‘탈당 권유’ 징계 결정문은 신박한 논리로 화제를 뿌렸다. 당 대표를 비판했으니 내쫓겠다는 식이다. 이른바 ‘당 대표 모독죄’다. 이는 민주 정당의 운영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정치 결사체는 구성원 사이에 공동의 이념과 노선 공유로 결속한다. 구심력을 발휘해 조직이 한 방향으로 전진하게끔 이끄는 것이 리더십이다. 대표직을 유지한다고 해서 정치적 권위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국힘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 눈높이에 맞춘 상식적인 리더십이다.
당의 지도 체제가 흔들리는 국힘이 무게 중심을 되찾는 것은 단지 제1야당의 과제에 그치지 않는다. 보수 정당이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지면 한국 정치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헌법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 나아가 지방 정부까지 하나의 정당에 쏠리는 상황은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권력이 폭주하지 못하도록 우리 국민은 항상 견제 구도를 선택하는 집단 지성을 발휘했다. 역대 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표심은 여야 모두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되, 딴마음을 품거나 딴짓하면 매섭게 내쳐 왔다.
보수가 재건된다면 기회는 다시 온다. 결의문 한 장으로 얼렁뚱땅 넘기려는 야바위는 통할 리가 없다. 10년 전 혁신을 외면한 대가가 내란 가해자 프레임이라는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로 되돌아왔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국힘 스스로 당 대표가 ‘당원 의지의 총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중요한 당 대표가 왜 지금까지 헌신짝 취급을 당하면서 소모품이 되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보수 정당의 정체성을 정립하면서 리더십을 착실히 세우는 것이 정도다. 당 대표 잔혹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힘은 갈 길이 멀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