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계 8위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이어 한국 해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민간 기업까지 부산에 둥지를 트는 셈이다. 정부 부처와 대형 민간 기업이 차례로 내려오면서,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금융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이 발판이 진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항만과 해운이라는 실물 자산을 ‘디지털 금융의 언어’로 다시 짜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본 지면을 통해 부산이 가진 해운·물류 인프라가 RWA(실물자산 토큰화)와 결합할 때 만들어 낼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선박의 소유권과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일반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선박 RWA’, 가덕신공항의 운영권 일부를 시민 참여형 디지털 펀드로 조달하는 ‘인프라 RWA’가 그 골자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이라는 거대한 모멘텀이 만들어지면서, 그 제안은 더 이상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 의제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책 시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부동산·교통·복지 등 전통적인 의제는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청사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수년이 지났고, 디지털 자산 시장은 이미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은 여전히 이 변화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차원의 입법 또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와 지분율을 둘러싼 이견 속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고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그 우선순위는 더욱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송금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중앙의 입법이 늦어진다고 해서 지방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부산이 ‘제도의 실험장’을 자처하며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미 글로벌 해양·금융 도시들은 디지털 자산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삼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채권·펀드·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정부 보증 아래 진행 중이고, 두바이는 별도의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해 토큰화 자산의 발행과 유통을 일원화된 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홍콩 또한 디지털 자산 ETF와 스테이블코인 라이선스 제도를 정비하며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도시 단위에서 명확한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부산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검토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째, 부산 차원의 ‘디지털 자산 규제 샌드박스 2.0’이다. 기존 블록체인 특구가 기술 실증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단계는 금융과 자산의 실증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박·항만·물류 자산을 기초로 한 RWA 발행과 유통,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인프라 구축이 부산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빠르게 검증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앙 부처와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해야 한다. 둘째, ‘부산형 시민 참여 인프라 펀드’의 제도화다. 가덕신공항, 북항 재개발, 항만 배후 단지와 같은 대형 사업의 일부 지분을 토큰화해 부산 시민이 소액으로 보유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자본 조달과 시민 참여,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부산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금융 인재 생태계의 본격적인 구축이다. 디지털 금융 혹은 블록체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금융권을 잇는 상설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도시에 자본은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은 부산이 오래 짊어져 온 구조적 과제, 즉 수도권 자본 의존, 청년 인구 유출, 산업 고도화 지연 등을 정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항만과 조선이 20세기 부산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 얹히는 디지털 금융이 21세기 부산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시장과 의회가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끌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는 후보, 그리고 그 청사진을 끝까지 검증하는 시민. 이 두 주체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부산의 다음 10년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