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시장의 법칙이 바뀌고 있다. 공급 과잉과 가격 폭락을 반복하던 메모리 산업이 이제는 인공지능(AI)이라는 거대한 수요를 바탕으로 새로운 장기 호황 국면에 진입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연이어 기록적인 실적을 내는 것은 단순한 경기 반등을 넘어, 반도체가 빅테크 기업의 경쟁력과 국가 산업 패권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 구조 역시 범용 제품 중심에서 고객 맞춤형 수주 산업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과거 반도체 사이클은 공급자 중심의 과잉 투자와 수요 둔화가 반복되며 형성됐다. PC와 스마트폰 시장이 주도하던 시절 기업들은 수요를 예측해 미리 제품을 생산했고, 재고가 쌓이면 가격이 급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고객이 먼저 주문하고 생산자가 맞춤형으로 공급하는 구조로 산업 체질이 바뀌고 있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있다.
■AI 시대 핵심 자원 된 HBM
HBM은 이번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떠받치는 핵심 축이다. 기존 D램이 범용 제품으로 가격 경쟁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HBM은 첨단 패키징 기술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제품이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통로를 수천 개 수준으로 확장해 병목 현상을 줄이는 기술로 AI 연산의 핵심 부품으로 자리 잡았다.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협력을 기반으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고 삼성전자가 HBM3E와 HBM4 공급 확대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HBM은 일반 D램보다 가격이 훨씬 높지만 공정 난도가 높아 안정적인 수율 확보가 쉽지 않다. 결국 먼저 양산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 시장 주도권과 가격 결정력을 동시에 쥐는 구조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HBM 물량 선점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선주문 구조는 과거 메모리 산업을 흔들었던 급격한 가격 폭락 가능성을 낮추고 사이클 변동성을 완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는 장기 계약과 선급금, 가격 상·하한 설정 등이 협상의 주요 조건으로 등장하며 메모리 산업이 철저한 공급자 우위 체제로 탈바꿈하고 있다.
■범용 D램까지 번진 공급 부족
최근에는 HBM 열풍이 범용 D램 가격 상승까지 이끌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HBM은 동일 용량 기준 일반 D램보다 훨씬 많은 웨이퍼를 필요로 한다. 기업들이 전체 웨이퍼 투입량을 늘리더라도 HBM 비중이 높아질수록 범용 메모리 공급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에 AI 서버 한 대당 탑재되는 D램 용량이 기존 서버보다 급증하면서 수요 자체도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향후 공급 부족을 우려한 글로벌 세트업체들의 선제적 재고 확보 움직임까지 겹치며 범용 D램 가격도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난 3월 “(메모리)공급 부족 문제는 웨이퍼 부족에서 비롯되는데 더 많은 웨이퍼를 확보하려면 최소 4~5년이 걸린다”며 “2030년까지 공급 부족이 20%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성·SK, 상상 뛰어넘는 실적
이러한 메모리 슈퍼사이클에 힘입어 국내 반도체 양사의 실적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 57조 2328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시장에 충격을 안겼다. 석 달 만에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43조 6010억 원)을 뛰어넘은 것이다. 증권가의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340조 원에 달한다. SK하이닉스 역시 1분기 37조 6103억 원의 영업이익과 72%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은 AI칩 세계 1위 기업인 엔비디아와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조차 밟지 못한 경이로운 수치로 평가된다. 올해 컨센서스 역시 250조 원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실적 행진이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향후 몇 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AI 인프라 구축이 본격화하는 2027년 삼성전자의 연간 영업이익은 435조 원, SK하이닉스는 340조 원에 달해 양사 합산 이익이 800조 원에 육박할 것이란 전망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증권가에선 삼성전자가 내년 엔비디아와 아람코,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등을 제치고 전 세계에서 영업이익이 가장 높은 기업이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반도체 산업의 구조 변화도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인공지능 반도체는 단순히 연산 속도가 빠른 것을 넘어 두뇌 역할을 하는 장치와 기억을 담당하는 메모리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느냐가 성패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연산 장치인 그래픽처리장치(GPU)나 주문형 반도체(ASIC)를 HBM과 하나의 칩처럼 묶어주는 첨단 패키징 기술이 핵심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SK하이닉스는 TSMC와 손을 잡고 메모리와 패키징 기술의 결합력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반면 삼성전자는 칩 설계부터 위탁 생산, 메모리 제조까지 모든 공정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업이라는 점을 내세워 고객의 요구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턴키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공급 과잉·중국 추격 변수
물론 장밋빛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반도체 호황의 끝에는 공급 과잉이 있었다. 현재 주요 기업들은 유례없는 규모의 설비 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AI 수요 증가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가격 조정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국의 추격 역시 변수다. 미국의 규제 속에서도 중국은 범용 메모리 시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자급률을 높이고 있다. 향후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가 본격화할 경우 한국 기업들의 수익성 압박은 불가피할 수 있다. 또한 빅테크 기업들의 AI 투자가 실제 수익으로 연결되지 못할 경우 이른바 ‘AI 거품론’이 다시 대두되면서 시장을 흔들 가능성도 존재한다.
지정학적 리스크 역시 기술 경쟁만큼이나 강력한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와 중국과 대만 간 긴장 고조 시 벌어질 수 있는 TSMC발 공급망 충격, 각국의 보조금 경쟁은 기업들의 경영 전략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고 생산 거점과 공급망 전략에서도 정치적 변수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결국 AI 시대 반도체 패권의 승부는 누가 더 많은 칩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차세대 기술과 공급망 주도권을 선점하느냐에 달려있을 가능성이 크다. AI가 산업과 일상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는 한, 반도체 시장의 팽창은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2~3년 주기로 반복되던 반도체 사이클은 AI 연산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과거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HBM 경쟁처럼 누가 더 압도적인 성능의 자원을 적기에 공급하느냐가 산업의 성패를 가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상현 기자 songs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