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시장이 커지면서 로봇의 동력이 되는 배터리 제조사들도 시장 선점에 나섰다. 지난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2회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운동회에서 100m 경주를 벌이고 있는 로봇. EPA연합뉴스
100m 기록 9초39. 우사인 볼트가 세운 세계 기록을 0.19초 앞당긴 주자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 기록은 공식 세계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휴머노이드가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중국 베이징 국가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제2회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 운동회에서는 인간의 기록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지난해 1회 대회 100m 최고 기록은 21초 50이었다. 1년 만에 절반 이하로 줄어들며 기술 발전을 입증한 셈이다. 휴머노이드 기술의 빠른 성장에 대중의 이목이 다시 쏠렸다. 그리고 로봇을 향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 로봇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옮겨간다. 휴머노이드 시장이 커질수록 배터리 수요도 늘 것이기에 배터리 제조사들도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배터리 산업 전문 전시회 ‘인터배터리 2026’에 전시된 삼성SDI의 전고체 배터리. 연합뉴스
■10년 뒤 1000배로 늘어날 시장
지금까지 휴머노이드용 배터리는 제조사들에게 매력적인 시장이 아니었다. 전기차에는 배터리가 수백에서 수천 개씩 들어가는 데 비해 휴머노이드는 제품 전체에서 배터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 수요가 크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생산량도 미미했다. 시장조사업체 인터랙트애널리시스에 따르면 지난해 휴머노이드에 들어간 배터리는 20MWh에 그쳤다. 셀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업체 입장에서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규모다.
하지만 올해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생산 현장 등에서 휴머노이드 도입이 본격화된 데다, 수시로 배터리를 충전하고 교체하며 일해야 하는 특성상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다.
또 다른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올해 세계 휴머노이드 출하량이 5만 대를 넘어 지난해보다 700% 이상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마켓츠앤드마켓츠는 지난 19일 보고서에서 휴머노이드 배터리 시장 규모가 지난해 1400만 달러에서 2032년 6억 2200만 달러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연평균 72% 성장이다.
국내 업체가 가져갈 몫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골드만삭스는 지난 6월 한국 기업이 2035년 세계 휴머노이드 생산의 30%를 직간접으로 차지하고, 한국 공급망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량이 2030년 7만 4000대에서 2035년 41만 2000대로 늘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휴머노이드 겨냥한 K배터리
국내 배터리 3사도 이 흐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아직 매출로 잡히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로봇을 전기차 다음 수요처로 보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공급처 확보와 기술 개발에 나섰다.
삼성SDI는 지난 14일 제출한 반기보고서에 “중장기적으로 고성장이 예상되는 로봇, 휴머노이드, 우주항공용 등으로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고 적었다. 공시 서류에 로봇과 휴머노이드를 사업 방향으로 써넣은 것은 처음이다. 앞서 2분기 실적발표에서는 “휴머노이드용 전고체 배터리 고객사와 구체적으로 협력을 논의하고 있는 단계”라고 밝혔다.
로봇 업체와 손을 잡은 것은 그보다 앞선다. 삼성SDI는 지난해 2월 현대차·기아와 로봇 전용 배터리를 함께 개발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 인연으로 현대차그룹의 로봇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양산을 준비 중인 아틀라스에도 삼성SDI 배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미 현대차·기아 로보틱스랩이 만든 서비스 로봇 달이와 이동형 플랫폼 모베드에는 삼성SDI의 배터리가 들어간다.
LG에너지솔루션은 2024년 미국 베어로보틱스와 계약을 맺고 서빙로봇과 물류용 자율주행로봇에 배터리를 대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네이버랩스가 만든 자율주행 서비스 로봇 루키에도 이 회사 배터리가 실렸다. LG전자가 올해 초 선보인 홈로봇 클로이드에도 같은 배터리가 탑재됐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옵티머스 2세대와 아틀라스의 개발 단계 모델에도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가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 차원의 움직임도 있다. LG는 엔비디아와 손잡고 내년 1분기 공개를 목표로 두 발로 걷는 휴머노이드를 개발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LG에너지솔루션 제품이 들어갈 전망이다.
SK온은 산업용 로봇 쪽에 집중하고 있다. 현대위아가 만드는 물류로봇과 주차로봇, 현대로템의 다목적 무인 로봇 HR-셰르파에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전기차는 한 대 들어가는 게 수천 셀이라면 로봇은 기껏해야 수십 개 정도”라며 “현재로서는 기존 에너지저장장치나 전기차를 대체할 만큼의 물량이 나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고부가가치 배터리가 많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고 전혀 없던 새로운 시장”이라며 업계가 이 시장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 숙제는 전고체 배터리
전기차에서는 값싼 LFP(리튬인산철)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이 점유율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로봇은 사정이 다르다. 몸통이라는 좁은 공간에 배터리를 넣어야 해서, 같은 부피에 담기는 에너지 밀도가 낮은 LFP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렇기에 휴머노이드에는 한국 업체들이 비교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하이니켈 삼원계 배터리가 주로 쓰인다. 니켈 함량을 높인 만큼 같은 부피에 더 많은 전기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 열릴 차세대 전고체 배터리 경쟁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다. 업계에서는 에너지 밀도와 안전성이 높은 전고체가 하이니켈 삼원계를 넘어 휴머노이드에 가장 알맞은 배터리라고 본다. 사람 옆에서 움직이는 기계인 만큼 불이 붙을 액체가 없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게 꼽힌다.
중국 배터리 업체들도 뛰어들었다. EVE에너지는 지난해 9월 청두에 전고체 생산 기지를 열면서 휴머노이드와 드론용 전고체 배터리를 내놨다. CALB는 지난 3월 공개한 전고체 배터리를 올해 4분기 휴머노이드와 전기 수직이착륙기에 먼저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배터리 업체인 CATL도 전기차와 휴머노이드를 겨냥해 내년 소량 시범생산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지난달 내놨다.
국내 기업 중에는 삼성SDI가 2027년 양산을 목표로 가장 앞서 있고 SK온과 LG에너지솔루션은 2029년을 잡았다. 삼성SDI는 지난 3월 인터배터리 2026에서 휴머노이드용 파우치형 시제품을 처음 공개했고, 올 하반기 로봇 업체에 시제품을 공급할 계획이다.
관건은 가격이다. 양산 공정이 자리를 잡지 못한 데다 핵심 소재인 고체전해질이 비싸 고체전해질만으로도 리튬이온 배터리 한 개 값을 웃돈다. 원료인 황화리튬이 1kg에 500달러에 이르는 탓인데, 업계에서는 고체전해질 값이 1kg당 30달러까지 떨어져야 리튬이온과 겨룰 수 있다고 본다.
넘어야 할 기술 문제도 남았다. 안전성은 전해질을 고체로 바꾸는 것만으로 좋아지지만, 에너지 밀도를 더 끌어올리려면 다른 소재까지 함께 손봐야 한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내는 성능도 과제다. 고체 안에서 이온이 더 잘 흐르게 만들고, 고체끼리 맞닿는 면에서 이온 이동이 막히는 문제도 풀어야 한다.
박동해 기자 eastse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