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마음을 아프게 한 값"

입력 : 2026-09-21 17: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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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懈怠), 앙등(昻騰), 도과(徒過), 경락(競落)….

판결문에 자주 나오는 단어들이지만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인지 전부 다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학창 시절 한자를 제법 배운 세대라면 그나마 대충의 뜻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터이지만 아예 한자를 배우지 않은 한글 세대에게 저 단어들은 외계어나 마찬가지다.

판결문 사이사이 나오는 단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흔히 판결을 시작할 때 법관이 외치는 “주문(主文)”이라는 용어도 한글 세대에게는 마법을 거는 주문인지 음식을 시키는 주문인지조차 헷갈릴 판이다. 형사사건의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다투는 과정에서 자주 나오는 ‘소명(疏明)이 부족하다’는 뜻은 또 어떠한가. 그 표현 그대로 신문기사에까지 읊어지는 단어들을 한글 세대가 다 이해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법원의 견고한 분위기를 비집고 이처럼 법률을 전공한 전문가나 한자를 공부한 세대만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법률 용어나 판결문을 새로 쓰려는 움직임이 나오는 장면은 희소하지만 그래서 더욱 반갑다.

2020년 4월 23일 대전고등법원의 한 민사 판결문은 모든 문장을 존댓말로 써 화제를 모았다. 강제 집행 관련 판결이었기에 강제력의 명확성이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판결을 한 판사는 판결문을 보는 이가 국민이므로 존댓말로 쓰여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 6월 25일 서울행정법원에서는 판결문에서 ‘판결의 결론(주문)’을 설명하면서 “원고가 재판에서 이겼습니다. 소송에 들어간 돈은 구청이 냅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행정소송의 원고가 지적장애인임을 감안해 사건 내용을 요약한 그림까지 포함한 판결문을 송달함으로써 눈길을 끌었다.

창원지방법원에서도 지난 17일 이혼과 위자료 사건에서 베트남인인 부인을 위해 위자료를 ‘마음을 아프게 한 값으로 주는 돈’이라는 표현으로 풀어쓰고 삽화를 삽입한 판결문을 제공하는 살뜰함을 보였다.

현재는 법원 예규에 따라 필요한 때에 재판장이 이해하기 쉬운 판결서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한글 세대가 늘어나는 만큼 앞으로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은 점점 늘어나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해태는 게을리하다, 앙등은 오르다, 도과는 기간이 지나가다, 경락은 경매낙찰을 뜻한다. ‘소명이 부족하다’는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