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 스틸컷. (주)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경력은 쌓일수록 단단해진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경력이 통째로 무효가 되는 자리가 있다. 인턴은 흔히 사회초년생의 이름표다. 그런데 노년에게 일자리를 권하는 나라는 그 앞에 ‘실버’를 붙여,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를 지워버린다. 실버 인턴. 조직에서 가장 낮은 칸. 김도영 감독의 ‘인턴’은 서른일곱 해를 일한 사람을 그 칸으로 돌려보내며 시작한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딸마저 먼 곳에 살고 있는 ‘기호’(최민식 분)에게 실버 인턴 자리는 소일거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마지막 카드에 가깝다. 그가 지원한 곳은 창업 3년 만에 매출 100억을 이룬 패션 회사이다. 다시 시작하는 기호는 열정이 넘치지만 가장 어린 직원보다도 더 낮은 자리에서, 평생 옳다고 믿어온 자신의 방식이 그저 낡은 것임을 매일 확인할 뿐이다. 이곳에서 기호의 37년 경력은 힘이 없다.
그런데 영화가 기호를 보여줄 땐 은근한 고집이 담겨있다. 그는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길 대신 자신이 아는 길로 차를 돌린다. 사소해 보이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의 태도를 압축한다. 경험이란 검색해서 찾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라는 것. 다만 그 감각이 정말로 이 회사에, 이 시대에 여전히 쓸모가 있는지는 영화도 쉽게 답하지 않는다.
이 물음이 2015년에 개봉한 원작 ‘인턴’과 이 영화를 가른다. 원작의 ‘벤’이 이미 완성된 어른으로 회사에 들어섰다면, 기호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사람으로 들어선다. 달라진 것은 기호가 들어선 자리만이 아니다. 젊은 CEO ‘선우’(한소희 분)의 사정도 바뀌었다. 원작이 여성 대표로서 일과 육아 사이의 고민을 담았다면, 영화는 그 축을 덜어내고 남편의 불륜과 이혼이라는 사적인 파열을 세운다. 일하는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무게가 결혼 생활이라는 문제로 옮겨간 셈이다. 그 선택이 지금 한국에서 더 절실한 이야기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루기에 더 수월한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다.
갈등의 무게가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오자 선우의 불안도 안으로 향한다. 업계의 다크호스로 불리면서도 선우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성공이 불안을 지워주지 않는다는 것, 성취가 클수록 부족하다는 감각만 더 또렷해진다. 이때 기호는 불안을 없애 주는 대신 같이 견뎌준다. 해결하려 들지 않고 곁을 지키는 태도가 오히려 신뢰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지혜로운 어른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믿어줄 누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기호와 선우의 작은 술자리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선우에게 기호는 네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답한다. 특별할 것 없는 말이지만, 성과와 효율로만 서로를 증명해야 하는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라 무게를 얹는다. 그러나 이 훈훈함은 영화의 약점과 맞닿아 있다. 두 사람을 잇는 신뢰가 따뜻하게 그려질수록, 그 신뢰가 서 있는 바닥은 시야에서 멀어진다.
즉 영화가 세대 사이의 온도차를 풀어내는 방식은 경쾌하지만, 정작 ‘실버 인턴’이라는 제도가 품은 불안-나이 든 노동이 얼마나 쉽게 임시적인 것이 되는지, 그 자리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갈등의 재료로 잠깐 스칠 뿐 파고들지 않는다. 기호와 선우의 우정이 훈훈할수록, 우정을 가능하게 한 구조의 불균형은 한발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턴’이 남기는 건 통쾌한 성장담이나 해답이 아니라, 모든 걸 이룬 뒤에도 다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해야 했던 한 사람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