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강강술래를 하자

입력 : 2026-09-23 17: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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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TV방송국 총괄부장

존중 사라지고 혐오만 남은 정치판
승자·패자 ‘리스펙’하는 격투기만 못해
기차역 앞 정당별 추석 인사 무의미
김민석·장동혁 손잡은 모습 보고 싶어

격투기를 좋아한다. 지금은 사라진 입식타격 K1으로 입문해 요즘은 세계 최대 종합격투기 단체인 UFC 경기를 즐겨 본다. 처음엔 링 위의 피 튀기는 혈전, 시원한 KO 장면에 눈길이 갔다. 주먹질이라곤 해본 적 없는 범생이 눈에 UFC 옥타곤(팔각형 링)은 완전 새로운 세계였다. 그러다 링 밖의 룰을 알게 되면서 더욱 빠져들었다.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승자는 패자를 ‘리스펙’(존중)하는, 이른바 무도(武道)의 매력이다.

UFC 페더급에서 뛴 ‘코리안 좀비’ 정찬성의 3년 전 은퇴 경기는 리스펙 그 자체였다. 이 체급 챔피언을 지낸 맥스 할러웨이와 경기에서 정찬성은 3라운드 큰 거 한 방에 쓰러졌다. 가끔 이 경기를 다시 돌려보는 이유는 그다음에 벌어진 장면 때문이다. KO 승리의 기쁨을 ‘아주 잠깐’ 만끽한 할러웨이는 곧장 패자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누운 정찬성을 직접 부축해 의자에 앉힌 뒤 포옹을 건넸다. 더 압권은 판정 순간이다. 심판이 승자의 손을 치켜들자 정작 할러웨이는 정찬성의 손을 치켜올렸다. 그러곤 “코리안 좀비는 레전드(전설)다”를 외치며 관중의 환호를 끌어냈다. 할러웨이의 진한 리스펙을 받으며 이날 정찬성은 은퇴를 선언했다. 승패는 링 안에서의 일일 뿐이다. 옥타곤에서 내려오면 승자도 패자도 없고 동료를 존중하는 태도, 격투기를 사랑하는 마음만 남는다.

요즘 정치권을 보며 링 위의 낭만을 생각한다. 카운터펀치, 난타전, 2라운드 등 격투기에 빗댄 정치 기사는 예나 지금이나 흔한데, 승자가 패자에게 손을 내미는 훈훈한 소식은 찾아볼 수 없다. 상대를 향한 혐오와 악마화를 넘어 같은 진영에서도 배제와 편 가르기가 난무한다. 실제로 피를 튀기며 싸우는 옥타곤 선수들이 신사처럼 보일 정도다. 정치의 수준이 곧 유권자의 수준이라지만, 너도나도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나도 맞지만 당신도 옳다는 양시론으로 상대를 품을 때, 퇴행을 멈출 여지가 생긴다.

정가의 도(道)를 다시 세우는 작업은 어디서부터, 누가 먼저 시작해야 할까.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물꼬를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포용을 강조한 이 대통령은 한 지지자의 X(옛 트위터) 게시물을 인용했다가 과거 비하 글이 알려지자 곧바로 삭제했다. 유감의 뜻과 함께 지지자들을 향해 “여러분이 바로 이재명이고 대통령이라 생각하고 행동해 달라”며 건전한 논쟁을 당부했다. 지도자의 말과 솔선수범은 범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녔다. 이 대통령의 메시지에 여야 지도자들이 잠시 링 아래로 내려와 품격있게 호응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마침 추석 연휴다. 한 경기를 끝내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즈음 정치 뉴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진이 있다. 기차역에서 정당별로 갈라져 귀성객에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다. 올 추석에도 똑같은 계획이라면 글쎄다, 예년을 떠올려 보자. 아무리 90도로 허리를 숙인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는 이들이 있었던가.

시민 호응을 바란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폴더인사 말고 ‘강강술래’는 어떤가. 좀 더 큰 광장이 있는 부산역 앞이 좋겠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대표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앞장서 광장 한가운데서 손을 맞잡으시라. 그러고 왼쪽으로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다. 양당 지도부가 하나둘 합세하면서 서서히 원이 커진다. 역을 오가는 시민들도 모여들 것이다. 강강술래에 노래가 빠질 수 없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선창) “강강술래~”(후창) “사이좋게 지내보세~”(선창) “강강술래~”(후창) 명절 소원을 빌고 싶은 시민이 있다면 기회를 주자. “우리가족 건강하게~”(선창) “강강술래~”(후창) “주식시장 떡상해라~”(선창) “강강술래~”(후창) 광장의 강강술래는 외국인들에게도 큰 볼거리를 선사할 테다.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에, 세계인에게 자랑할 K-컬처로 손색없다.

롯데 자이언츠가 잘해야 집구석이 조용하듯, 정치권이 싸울수록 명절 밥상 분위기도 험악해진다. 올 추석에 친인척과 대화가 정치 얘기로 흘러간다면 강강술래가 빛을 발할 때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는 5촌 당숙을 향해 “강강술래~”, 민주당을 싸잡아 욕하는 큰아버지 앞에서 “강강술래~”, 국힘은 국짐이라 핏대를 세우는 이모 눈을 바라보며 “강강술래~”를 외치자. 그래도 안 통하면 손을 맞잡고 일어나 왼쪽으로 돌자. 왜 하필 왼쪽이냐 버티면 오른쪽으로 돌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강강술래”를 노래하다 보면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바람,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만 남을 것이다. 이 글에 혹시 댓글이 달린다면 미리 답글을 드린다. “강~강~술~래~!”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