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큰 산짐승들이 내려와 인간의 살림을 뒤질 것이다
기꺼이 마음을 잃겠다는 각서라도 써야 할 것이다 이 사랑
은 무모하고 무용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들엔 이유가 없다 밤의 검은 창문을 두드리는
이 무국적 바람은 어딘지 기시감이 있다 그날 습한 바람은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 낮고 느리게 울며 발목을 감았지
그것은 지표면의 것이 아닌 지구 내부 맨틀로부터 뛰쳐나온
거대한 짐승의 미친 열정이 내뱉는 신음 같은 것 지독한
번민의 날들을 부러 게으르게 지나고 있다 나의 사랑 더,
더, 더 쓸모없어질 테다 여름이 응집된 열매들은 만추의 빛
을 입고 자정 너머에서 부스럭거리고
-시집 〈청색에 흘린 청색〉(2026) 중에서
마음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듣고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볼륨을 조금 더 내려봅니다. 사랑이야말로 무모하고 무용해서 아름다운 것. G단조의 선율에 실려가며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고받는 상처에 대해 묻고 또 묻게 됩니다. 세상을 떠도는 바람이 있어 인간의 본성을 다룬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지나기도 합니다. 존재의 근원적인 상처, 깨지기 쉬운 영혼의 현실을 떠돌게 됩니다. 그래서 비련의 히스클리프를 목놓아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달려오는 나만의 기억, 그 호명 앞에서 잠시 숨을 멈추어봅니다. 사랑도 지독한 번민도 더 쓸모없어져 보겠다는 다짐은 마치 가을이 주는 이상한 선물 같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인간의 살림을 뒤져야하는 산짐승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