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입력 : 2026-10-27 17:5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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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1926~2008)

이제 내게는 흥분하고 소리칠 힘이 없어졌다

세상 밖으로 나가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늙은 탓이 아니다

공것이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옛말

오늘 세상에서는 참 소박한 비유다

사람의 간도 꺼내어 먹으려 드는

자본주의의 말기

바스락 소리만 나도 나는 불안해진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울부짖는 내 거위들처럼

사방에서 칼날이 희번덕이고

지폐들은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시집 〈산다는 슬픔〉 (2026) 중에서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께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와 〈산다는 슬픔〉이라는 두 권의 유고시집이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 대한 담담한 소회와 삶의 고통,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시집 〈산다는 슬픔〉에는 작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토지문화재단이 소장해온 미공개 시들이 실려있습니다. 시대와 역사, 노화와 질병, 인간과 생명에 대한 진솔한 시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노년의 시골살이와 소소한 감정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전쟁과 비극 그리고 짓밟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칼날과 핏빛 같은 강렬한 시어들은 물질만능주의로 얼룩진 시대를 향한 서늘하고 정직한 비판입니다. 일제 강점기,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비극과 추악함과 슬픔을 목도한 작가의 운명적 고백이기도 합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