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비장소와 무인숍

입력 : 2026-11-03 18: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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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꽤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일상적으로 이용하던 공간의 인문학적 의미를 풀어낸 부분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시작되며 타인과의 관계 등이 무의미해지는 장소가 늘고 있다는 게 마르크 오제의 설명이었다.

그가 예시로 든 전통적인 장소는 고향 집, 마을광장, 전통시장, 교회 등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깃들어 있고, 사람들과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개인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곳이다.

반면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잠시 거쳐 가는 공간이 늘고 있다. 공항, 고속도로, 각종 터미널, 대형마트, 극장 등은 현대인에게 스쳐 가는 장소다. 타인과의 관계는 최소화하면서 효율성 위주로 짜인 공간이다. 마르크 오제는 이런 곳을 ‘비장소’라고 분류했다.

비장소 개념이 등장하자 타인과의 소통, 공동체 소속감 등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비판도 있었다. 너무 이분법적인 접근이라는 거다. 오히려 비장소가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해방감을 준다는 긍정론도 나왔다.

지금은 비장소가 너무 일상적인 공간이 돼, 30여 년 전 비장소 개념이 논란이 됐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마을광장, 전통시장 등 전통적인 장소가 특별한 곳이 됐고 일상은 스쳐가는 공간으로 가득하다. 마르크 오제의 진단과 비슷한 세상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더 고도화됐고, 전통적인 타인과의 관계는 옅어졌고, 세상은 더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선호한다. 다만 사람들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 아등바등 살아가다 보니, 여전히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비장소를 넘어선 공간도 늘고 있다. 무인숍이다. 2010년대 중반 코인 빨래방이 많이 늘더니 인형뽑기방, 코인노래방,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 무인 커피숍 등이 크게 늘었다. 키오스크 등의 기술력 향상과 인건비 절약 등의 경제적 요인이 결합돼, 대인 접촉 자체가 필요 없는 아주 효율적인 공간이다.

최근 부산 광안리 등 주요 관광지에 무인 오락실 등이 급증하고 있다. 기존 매장이 버티지 못한 곳을 운영비가 저렴한 무인숍이 차지하는 형태이다. 관광지로서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점포이며, 형태도 모두 비슷비슷하다. 마르크 오제가 관광지의 천편일률적인 무인숍 거리를 보았다면 분명 비장소만큼이나 흥미로운 이론을 만들었을 것 같다.

김백상 기자 k1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