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억 건물 굴린 임대 사업 법인, 밑천은 전세사기 보증금 [전세사기, 끝나지 않은 고통]

입력 : 2026-11-03 18:16:10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 프린트
  • 가

2회> 전세사기의 설계자들

개발법인·공인중개사 등 한통속
여러 법인이 인적 관계로 연결돼
전세사기 보증금으로 또 신축
개발 네트워크가 전세사기 키워
임대 법인 조직적 감시 두려워
피해자들 공동 대응도 은밀하게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부산 수영구의 한 오피스텔 우편함에 피해자들 앞으로 나온 전기요금 고지서 등 각종 우편물이 방치돼 있고 전기요금 체납으로 인한 단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부산 수영구의 한 오피스텔 우편함에 피해자들 앞으로 나온 전기요금 고지서 등 각종 우편물이 방치돼 있고 전기요금 체납으로 인한 단전 안내문이 붙어 있다. 정종회 기자 jjh@

부산 수영구 A오피스텔의 임대 사업자는 2024년 2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임차인 20명의 보증금 23억 7800만 원을 돌려주지 않았다. 50억 원이 넘는 건물로 임대사업을 벌인 이 법인이 투입한 자기자본은 고작 2억 원이었다. 이 법인 운영자 2명은 구속기소돼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이 사건은 부산에서 개발형 법인 임대사업자가 어떻게 건물을 공급하고, 어떤 조직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세사기를 벌였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감시당하는 세입자들

부산 수영구의 A오피스텔 임차인 김주영(가명) 씨가 첩보작전을 하듯 다른 임차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5월 하순부터였다. 그는 현관문 사이에 끼워진 법원의 임의경매 개시 통지서를 받아 들고 확신을 굳혔다. 전세사기였다.

다른 임차인들과 피해 상황을 공유한 뒤 공동 대응에 나서는 것이 급선무였다. 김 씨는 이웃과 만날 때 먼저 채팅으로 접촉 시간과 장소를 은밀히 정했다. 이들은 건물 CCTV가 비추지 않는 곳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유가 있었다. 김 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모으기 위해 안내문을 엘리베이터에 붙인 적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피스텔 임대 업체의 이 모 대표가 CCTV로 이를 파악하고 김 씨에게 안내문 부착에 항의하는 문자를 보냈다. CCTV뿐만 아니라 32개 호실로 구성된 이 건물의 일부 호실에는 임대 업체 직원들이 거주 중이었다. 김 씨에게 이 오피스텔은 보금자리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감시의 공간이었다.

■수상했던 계약의 실체

돌이켜보면 계약 때부터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2021년 9월, 김 씨가 전세보증금 1억 3000만 원에 계약한 곳은 중개사무소가 아닌 오피스텔의 모델하우스였다. A오피스텔 임대 법인의 이 모 실장은 빈 호실이 모두 월세로 계약됐다며 김 씨를 설득했고, 대표이사 최 모 씨의 주민등록증까지 보여줘 안심시켰다. 최 씨는 오피스텔 건물에 부동산중개사사무소를 차려 세입자를 모으는 공인중개사이기도 했다.

입주 2개월 뒤 이 실장이 해당 임대 법인의 새 대표가 됐고, 이듬해 7월에는 건물 이름마저 바뀌었다. 2024년 추석 무렵 아래층 세입자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며 찾아왔고, 이듬해 초에는 관리비를 냈는데도 요금 미납으로 TV까지 끊겼다. 전세사기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발생한 이상 징후들이었다.

피해자들이 파악한 개발법인과 중개업소, 건물 관리인들은 사실상 한 무리였다. 실질적인 법인 운영자는 따로 있었다.

■이름 뒤에 숨은 연결고리

김 씨가 살던 오피스텔의 옛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건물이 수영구의 다른 동에도 있었다. 동 이름 뒤에 뜻을 알기 어려운 외래어를 붙인 형태였다. 단순히 이름만 닮은 줄 알았던 두 건물의 건축과 소유 관계를 추적하자 같은 법인과 인물이 등장했다.

두 건물의 토지등기부등본 건축물대장, 건축주의 법인등기부등본을 보면 김 씨가 거주한 오피스텔은 B사가 건축주로 등재돼 있었지만, 공사는 2019년 11월 이미 시작됐다. 이 회사는 공사 중이던 부지를 2021년 5월 C사로부터 51억 원에 매입해 한 달 뒤 사용승인을 받았다.

C사의 대표이사 안 모 씨는 수영구에서 유사한 이름의 오피스텔을 신축한 D사의 실질적 운영자였다. 그 건물에서도 임차인 17명이 보증금 17억여 원을 떼이는 전세사기가 발생했고, 안 씨는 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수영구의 두 건물 피해 사례는 동일한 ‘개발 네트워크’ 안에서 발생한 경우였다.

■전세사기 키운 ‘법인 공급망’

전문가들은 법인들의 이같은 주택 개발 현상이 부동산 호황기에 흔한 현상이었다고 진단했다. 개발업자가 첫 번째 건물에서 벌어들일 돈을 예상하고 두 번째 건물에 투자하고, 다시 세 번째 건물로 사업을 확장하는 구조라는 것. 특히 토지 확보와 인허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미 공사가 진행 중인 사업장을 통째로 매수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임차인의 보증금은 개발업자들의 사업 자금으로 활용됐다. 부산형 전세사기는 단순히 집값 하락으로 발생한 사고가 아니었다. 전세금 반환 장치 없이 임차인의 보증금을 지랫대로 삼아 법인들이 신축 오피스텔과 다세대주택을 잇달아 공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라는 분석이다.

실제 2020년 부산의 민간임대주택 공급 실적에서 법인의 오피스텔 공급 비중은 22.3%였으나 2024년에는 61%로 급증해 서울(29.8%)의 두 배를 넘었다. 동아대 강정규 부동산학과 교수는 “아파트 개발은 땅값이 비싸고 사업 규모도 커 초기 투자비용과 위험 부담이 큰 반면, 다세대주택이나 오피스텔은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서도 “여러 사업장을 확장하다 한 곳에서 분양이 막히면 다른 사업장까지 자금난에 빠져 연쇄 부도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도 컸다”고 말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