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생성형 AI ‘챗GPT’로 제작한 이미지.
국내 디지털금융 산업은 새해에도 제도 지연과 정책 불확실성에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원화와 1 대 1로 연동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의 경우 발행 주체·규제 이견으로 법안 논의가 여전히 지연되고 있다. 조각투자 시장 역시 장외거래소(유통 플랫폼) 예비인가가 뒤늦게 이뤄지면서 플랫폼 개발과 시스템 구축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금융업계에서는 기술과 서비스는 앞서가지만 제도 정비가 뒤따르지 못하며 국내 디지털금융 산업의 국제 경쟁력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현장 앞서 나가도 법은 ‘공회전’
보험연수원이 지난 9일 개설한 ‘크립토 리터러시’ 과정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USDT·USDC)으로 수강료를 결제할 수 있다. 수강생이 업비트 지갑으로 연수원 지갑에 직접 코인을 송금해 납부하는 방식이다.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 10% 할인 혜택도 제공된다.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제도화될 경우 이를 결제 수단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앞서 연세대 총동문회가 지난해 해외 동문을 위해 ‘코인 납부’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보험연수원의 시도는 상업적 성격의 교육 서비스까지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하태경 보험연수원장은 “인공지능(AI)과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한 시대 흐름에 따라 코인을 직접 써보는 경험이 필요해 이 시범사업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지만 입법 움직임은 제자리걸음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기 위해 지난해 6월 최초 발의된 ‘디지털자산기본법’(가상자산 2단계법)을 둘러싼 이해관계자 간 충돌이 여전하다. 정부안은 아직 국회에 제출되지 않았고, 여당도 당론안을 정리 중이지만 내부 조율이 매끄럽지 않다. 핵심 쟁점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지다.
법안은 원화 연동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지위와 준비 자산 범위, 1 대 1 상환 의무, 공시·감사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발행 구조를 둘러싸고 한국은행과 금융당국, 업계의 입장이 엇갈린다. 한국은행은 통화 주권과 금융 안정을 이유로 은행 또는 은행 지분 51% 이상을 보유한 컨소시엄만 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금융위원회와 여당 태스크포스(TF)는 자본금 50억 원 이상을 전제로 은행 중심 컨소시엄을 우선 허용하되, 비은행 참여를 단계적으로 열어 두는 절충안을 검토해 왔다.
핀테크 업계는 ‘51% 룰’이 확정될 경우 사실상 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기술과 인프라를 준비해 온 기업들이 발행 주체가 아닌 단순 기술 제공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출시한 한 업체 관계자는 “자본금 요건 기준을 두면 되는데 참여 자체를 막는 것은 과도하다”며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막히면 그동안 준비해 온 사업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테이블코인을 비롯한 블록체인 산업을 둘러싼 규제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에서도 가상자산 현금자동입출금기(MTM)를 운영해 온 다윈KS다. 이 회사는 지난해 금융정보분석원(FIU)이 미신고 가상자산사업자(VASP)로 판단해 거래 중단을 요청하면서 국내 사업을 사실상 접고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다윈KS 이종명 대표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겠다고 하면서도 현장의 기술을 기존 잣대로만 재단하면 누가 새로운 모델에 도전하겠느냐”며 “법적 판단 이전에, 디지털금융을 키우기 위한 정책 결단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뒤늦은 인가에 개발도 차질
금융위원회는 지난 13일 정례회의를 열고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사업자로 한국거래소·코스콤의 ‘KDX 컨소시엄’과 넥스트레이드 중심의 ‘NXT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예비인가를 받은 컨소시엄은 향후 6개월 이내 인가 조건을 이행한 뒤 본인가를 신청할 수 있다. 최종 승인을 받으면 공인된 유통 플랫폼으로 정식 영업에 돌입하게 된다.
하지만 당초 계획보다 한 달 이상 발표가 늦어져 플랫폼 개발 등 시장 준비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KDX 컨소시엄의 경우 토큰증권발행(STO) 시스템을 코스콤 기반으로 구축할 계획이었으나 예비인가 지연으로 전산 개발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컨소시엄에 참가 중인 A업체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플랫폼 구축과 테스트를 통해 사업을 추진하도록 안내했지만 인가 지연으로 계획이 틀어졌다”며 “발행 시스템을 개발을 해야 되는데 내부적으로 어떻게 전산 개발을 완료할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B업체 관계자는 “예비인가 발표가 났기 때문에 플랫폼 구축을 위한 제안요청서(RFP)를 띄울 것 같다”면서도 “보통 플랫폼을 만드는 데 6개월에서 8개월 정도 걸리는데 예비인가가 제때 이뤄졌다면 더 빨리 진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제도적 기반 마련을 위한 ‘토큰증권 협의체’ 구성도 아직 미정이다. 협의체는 법 시행과 동시에 토큰증권 생태계를 가동하기 위한 준비 기구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한국예탁결제원, 금융투자협회, 증권사 그리고 핀테크 기업 등이 참여하는 구조로 추진된다. 그러나 당초 이달 출범이 예상됐던 협의체는 아직 일정이나 구성 윤곽이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B업체 관계자는 “금융위에서 협의체를 구성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구성됐는지 확인되지 않았다”며 “발행 계좌 관리 기관을 준비하는 사업자들은 구체적인 지침이 없어 시스템을 어떻게 준비해야할지 몰라 답답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