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속에서 터지는 봄 무얼 함께 씹어도, 결국 봄

입력 : 2013-02-14 07:54:03 수정 : 2018-03-16 15: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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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미나리

미나리와 함께 차려낸 봄마중 음식상. 언양미나리(오른쪽) 생채를 초고추장에 찍어 한 입 베어물면 맹렬한 봄기운이 몸속으로 쳐들어 온다. 왼쪽 위로부터 삼천포산 주꾸미 숙회, 강원도에서 공수한 못난이 생선 '도치' 알탕과 수육.

봄마중 나선 길에 찾은 언양미나리 재배단지. 선연한 풀빛, 통통하게 살진 본새! 겨우내 모진 한파를 견뎌낸 걸 뽐내기라도 하듯 미나리는 강렬한 연둣빛을 발하며 물 찬 제비처럼 물이 올라 있었다. 풋내가 그리운 겨울 끝무렵이라 그런지 풋풋한 향채(香菜) 미나리의 유혹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한 입 씹었을 때 사박거리는 식감, 입안 가득히 고이는 싸한 육즙, 그리고 코를 자극하는 향! 육류는 물론, 주꾸미와 생선 수육 등 제철 요리들과 궁합이 척척 맞았다. 출하를 앞두고 부산으로 긴급 공수한 봄의 전령사, 미나리를 만나 보자.

주꾸미·삼겹살과 궁합 좋아
도치 수육에 돌돌 말아 먹기도
남으면 나중에 볶음밥 재료로

■성기지 않고, 싸한 맛이 일품인 언양미나리


한때 언양미나리는 전국 으뜸이었다. 지금은 청도한재미나리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언양미나리의 맛과 향을 못 잊는 이들은 여전히 언양산을 찾는다고 한다. 3대째 언양미나리의 전통을 잇고 있는 '언양총각미나리' 최현기(35) 대표의 설명이다. 기장의 물미나리, 의령의 밭미나리와 달리 언양과 청도는 논미나리로 분류된다.

'언양총각미나리'를 찾은 건 설 대목 한파가 몰아친 지난 8일 오전. KTX울산역 인근에 하우스와 노지가 이어져 있는데, 노지 미나리는 흑갈색으로 변해 흡사 낙엽 더미처럼 땅바닥에 누워 있다. 반면 하우스 안은 파릇한 연둣빛 미나리 잎사귀들이 군무를 추고 있다. 이런 걸 두고 별천지라고 할 수밖에! 일주일 뒤 출하를 앞두고 있어서인지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때깔이 곱다.

최 대표는 "언양산 미나리는 가늘고 부드러우며 특유의 싸한 향이 강하다"며 "아삭거림이 살아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덧붙인다. 아삭거리는 식감은 물주기에 비법이 있다. 밤 사이에 공급한 지하수를 아침에 빼 버리면 물에 잠겨 쓰러져 있던 미나리 줄기가 물 빠짐과 동시에 빳빳하게 서는데, 이 과정을 반복하면 아삭거림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맛은 노지가 훨씬 좋지만 하우스는 부드럽고 지하수로 재배하니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있어 많이 나간다"고 설명했다. 다만 옛 명성과 맛을 기억해 찾는 사람이 많아도 공급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게 문제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는 것처럼, 희한하게도 자리를 옮겨 심어도 그 맛이 안 나오기 때문에 옮길 수도, 생산량을 늘릴 수도 없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출하 직전의 미나리를 건네면서 최 대표는 신신당부했다. "생채로 먹는 게 가장 맛이 있습니다. 위생 문제를 걱정해 데쳐서 나물로 먹는 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지하수로 재배하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부산으로 가져 온 미나리를 만덕 계절 요리점으로 가져갔다. 요리를 하기 전 우선 생채로 질겅질겅 씹어 보았다. 과연! 그의 말이 옳았다.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몸속으로 쳐들어오는 봄기운에 무장해제당하고 말았다.

※언양총각미나리=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어음리. 010-2866-2569. 미나리 1단(800g) 도매가 7천 원 전화주문 판매. 5단 이상.


■계절요리점에서 맛 보는 미나리

만덕에 독특한 계절요리 주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들러볼 참이었다. 상호가 '홍탁석화구이'라 홍어와 생굴을 다루는 것으로 짐작했는데, 듣자 하니 실제로는 '주인장 마음대로' 계절 메뉴를 내놓는다는 데 마음이 끌렸다.

목포에서 숙성한 홍어 회와 전은 항상 차림표에 올라 있고, 요즘 철에는 계절 별미인 고흥산 생굴과 삼천포산 주꾸미를 내놓는단다. 이색 메뉴로는 강원도에서 직송한 '도치'(궁금하겠지만 설명은 뒤에!)로 수육과 알탕을 만들어 내놓고 여기에 미나리를 곁들인다. 5, 6월에는 여수산 서대회를 차려낸다니 이 집에 가면 계절별로 별미는 다 맛보겠다 싶었다.

대폿집 분위기의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장 박귀자(61) 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대포 상 네댓 개 놓고 종업원 없이 혼자 장 보고, 요리하고, 나르니 '착한 가격'이 맞춰진단다. 예약하고 찾아오는 단골이 꽤 있다고 은근히 자랑이다.

"언양산 미나리로 봄마중을 할 수 있을까요?" 주인장이 미소로 화답한다. 

제법 살이 오른 삼천포산 주꾸미 숙회.
■아삭아삭한 미나리에 살진 주꾸미 한 입

미나리는 해독 작용이나 숙취해소 효과 때문에 복국 같은 해장국에 빠져서는 안 되는 부재료로 쓰인다.

구운 고기에 곁들이는 쌈채소로는 조연이나 주연 모두 자연스럽다. 미나리 재배 현장에서 막 구운 고기에 미나리로 쌈을 싸서 먹는 청도한재미나리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비결이 여기에 있다. 개인적 차이가 있겠지만 미나리의 궁합에는 삼겹살이 가장 어울린다는 게 중론이다.

초무침이나 전 요리에도 미나리는 제격인데, 하여간 나른한 봄 입맛을 당기는 데 미나리만 한 채소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탁석화구이'의 주인장이 주꾸미를 데쳐 미나리와 함께 한 접시 가져왔다. 이만큼 살진 주꾸미는 좀체 보기 어렵다. 어린이 주먹만 한 몸통을 열었더니 영락없이 쌀알처럼 생긴 알이 수북하다. 절로 군침이 돌았다. 참기름장을 발라 한 입 넣으니 쫄깃한 식감이 제법이다. 미나리 숙회에 초고추장을 찍어 번갈아 먹으니 질리질 않는다.

■몰골은 흉측하나 맛은 기특한 '도치'

"처음 봤을 때는 끔찍했어요. 그런데 한 번 맛을 들인 뒤로는 자꾸 끌리네요."

'홍탁석화구이' 주점 단골이 한마디 거들었다. 오늘의 못난이 생선 '도치' 수육이 상위에 올랐을 때였다.

도치(사진)는 겉만 보고 섣불리 속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생선이었다. 타원형 몸통에 입을 삐쭉 내민 채 납작 엎드리고 있는 생김새만을 놓고 보자면 영락없이 뭔가 못마땅해서 화가 난 듯하다. 몸 색깔도 갈색 계열이어서 뾰로통한 느낌이 강해진다. 같은 못난이 계열인 꼼치(물메기)나 아귀는 유선형이거나 윤기라도 있지, 도치 피부에는 돌기와 잔가시까지 있어 흉측함을 더한다.

심통이 사나운 듯한 생김새 때문에'심퉁이' '심퉁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데, 정작 육질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담백하고 비리지도 않아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도치가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못생긴 생선 '도치'를 살짝 데쳐낸 수육.

끓는 물에 살짝 데치기만 한 수육은, 굳이 따지자면 아귀와 비교할 수 있겠는데, 물렁뼈가 더 많은데도 부드러우면서 쫄깃해 씹기가 편하니 술술 들어간다. 삼겹살 쌈으로 먹듯이 미나리를 돌돌 말아 초고추장에 찍어 수육을 싸 먹었더니 맛의 궁합이 기가 막힌다. 입에 착착 감기는 게 이제까지 느껴 보지 못한 별미다.

도치 알에다 묵은 김치를 넣고 끓여내는 알탕은 또 어떤가. 쫀득쫀득 씹히는 알을 부재료로 넣은 미나리와 함께 씹으니 얼큰하면서도 향긋해서 식감과 맛, 향이 절묘하게 잘 어우러진다.

조금 남은 미나리를 집으로 가져와 볶음밥 재료로 써 봤다. 기름진 음식 위주의 명절에 단연 돋보이는 산뜻함이었다. 생소해 꺼리던 아이들도 순식간에 뚝딱 그릇을 비웠다. 비빔밥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미나리의 싸한 육즙과 함께 그렇게 봄은 성큼 다가왔다.
미나리를 쫑쫑 썰어넣어 만든 미나리볶음밥.
※홍탁석화구이=부산 북구 만덕2동 303의 4. 051-332-9902. 도시철도 만덕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신만덕 삼성아파트 앞 쪽 도로변. 오후 4시∼오전 2시. 도치 수육과 알탕 세트 3만 5천 원, 주꾸미 3만 원, 굴 구이 2만 원.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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