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투스’의 어원은 10세기 전후 스칸디나비아를 통일한 국왕 하랄드 블로탄의 별명이다. 1997년 당시 난립하던 무선 통신 규격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염원을 담아 제안한 이름이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무선 시장을 통일한 블루투스는 무서운 기세로 유선 시장까지 침공했다. 특히 이어폰과 헤드폰 업계는 사실상 무선에 정복당한 모양새다. 그러나 유서 깊은 브랜드들은 아직 무릎을 꿇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업체가 유선 이어폰과 헤드폰을 만들고 있고, 음질의 가치를 아는 ‘음향 꼰대’들은 이들 유선 제품을 선호한다.
음향 꼰대는 소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이효리, 한소희 등 유명 연예인이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모습이 종종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고품격 음질을 중시하는 이들의 ‘오디오 라이프’를 위해 하이파이 유선 이어폰 3종을 비교한 청음기를 남긴다.
슈어 SE846, 젠하이저 IE900 그리고 64Audio U6t
가수들은 공연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히 모니터링하기 위해 인이어 이어폰을 사용한다. 안무나 댄스 등 퍼포먼스를 펼쳐도 잘 고정되도록 귀 전체를 감싸는 오버이어 착용 방식을 채택한다. 이런 인이어 이어폰의 대표 주자가 바로 미국 브랜드인 ‘슈어(SHURE)’다. 그중에서도 ‘SE846’은 음향 마니아 사이에서 유명한 플래그십 제품이다. 음색을 개선해 출시한 Gen2 버전은 정가가 130만 원을 넘는다.
‘젠하이저’의 최상급 이어폰인 ‘IE900’도 빠질 수 없다. 독일 오디오 공학의 집합체인 IE900은 1년에 800대만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179만 원에 달하는 고가임에도 2021년 출시 당시 불티나게 팔렸다.
둘만의 대결은 심심할 것 같아 비슷한 가격대의 경쟁자를 라인업에 추가했다. 고품격을 표방하는 미국 브랜드 ‘64Audio’의 180만 원짜리 이어폰 ‘U6t’까지 참전한 3파전이 부산대 인근 청음숍 ‘더사운드랩’에서 펼쳐졌다.
‘범 내려온다’로 살펴본 기본기…펀사운드는 확실히 U6t
첫 번째 대결 곡은 그룹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로 선정했다. 판소리 ‘수궁가(별주부전)’의 한 대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히트곡이다. 슈어 SE846으로 들어본 ‘범 내려온다’는 전체적으로 무난했다. 슈어 제품답게 여성 메인 보컬과 코러스의 발성이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전체적인 해상도가 훌륭하고 밸런스도 잘 잡혔다. 여러 악기와 보컬, 전자음까지 한데 뒤섞이는 4분대 클라이맥스 구간에서도 소리가 뭉개지거나 뭉치지 않고 선명하게 들린다.
다만 보컬에 비해 악기가 아쉽다. 베이스 기타 두 대로 내는 저음이 제법 탄탄하게 들리긴 하는데 펀치감은 부족하다. 박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타악기 소리도 다소 둔탁하게 들린다. 드럼의 하이햇을 쳤을 때 찰랑거림이 그리 경쾌하게 들리지 않았다. 역시 악기보단 보컬에 중점을 뒀다는 인상이다.
IE900은 조금 더 나았다. 도입부 베이스 소리가 아주 깔끔하고, 전체적으로 공간감이 살아났다. SE846은 좁은 스튜디오에서 모여 공연했다면, IE900은 조금 더 넓은 무대에서 공연한 느낌이다. 저역의 양감과 깊이가 훌륭하고 하이햇의 경쾌함과 보컬의 선명함까지 놓치지 않아 흠잡을 데 없는 밸런스를 자랑한다. 인위적이거나 과장된 튜닝 없이 자연스러운 소리다. 클라이맥스에서도 뛰어난 분리도를 선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둘의 태생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SE846은 금속 진동판을 사용하는 발음체인 밸런스드 아마추어(BA) 4대가 들어갔고, IE900은 일반적인 진동판인 다이내믹 드라이버(DD) 하나로 승부를 본다. BA는 DD에 비해 고역에서 유리하지만, 저역과 공간감 표현은 DD가 낫다.
64Audio의 U6t는 BA 6개가 들어간 제품이다. 역시 ‘범 내려온다’로 테스트 해봤는데, 앞선 두 제품과는 확연히 다르다. 도입부 사운드부터 훨씬 직관적이다. 한 꺼풀 덮여있던 얇은 막을 벗긴 듯 깔끔한 선예도를 자랑한다. 남성 보컬의 존재감도 좀 더 분명해졌다. IE900과 SE846이 모니터링 용도라면 U6t는 펀사운드(특정 음역대가 강조되는 소리)용에 가깝다.
사중창에서 돋보인 IE900의 공간감
더욱 확실한 구분을 위해 남성 사중창 곡을 골랐다. JTBC 크로스오버 성악 예능 ‘팬텀싱어’에서 시청자들에게 큰 임팩트를 남겼던 ‘흥타령’이다.
U6t는 해상도가 워낙 좋아 소리들이 귀에 팍팍 꽂힌다. 미세한 들숨과 날숨까지 잡는 디테일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피아노와 해금 연주에서 고역의 선명도가 좋고, 베이스인 김바울의 저음이 깊고 풍부하게 들린다. 개성 강한 보컬들에 묻히지 않고 건반과 북, 북채 소리가 계속 존재감을 드러낸다. 4명의 보컬에 꽹과리와 해금 등 국악 악기들이 동원되는 6분대 클라이맥스에서도 말끔한 해상력을 자랑한다.
IE900은 개방감이 강점이다. 소리꾼 고영열의 창으로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울림이 느껴진다. 저음이 좀 더 자연스럽고, 해금과 건반 연주에서 잔향감이 느껴져 무대감을 더한다. 김바울의 저음 표현은 IE900도 U6t에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양감은 IE900이 나은 듯하다. 북채로 북의 모서리를 칠 때 나는 타격음도 IE900이 조금 더 또렷하다. 고영열이 창을 하는 파트마다 IE900 특유의 스테이징 덕에 압도적인 성량이 느껴진다. 또 6분 8초께부터 나오는 큰북 소리를 들어보면 IE900은 확실히 북소리가 뒤쪽에서 울린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U6t는 북이 보컬과 비슷한 선상에 놓였다는 느낌이다.
SE846은 아주 깔끔했다. 도입부부터 곡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깨끗하고 정제된 음색을 유지한다. 김바울의 저음도 탄탄하고, 테너인 존 노와 황건하의 목소리도 앞선 두 기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살아난다. 다만 초고역에선 좀 부족한 모습이다. 클라이맥스 구간에서 꽹과리의 귀를 쏘는 고음이 조금 거슬린다.
“소리가 이븐하게 익었어요” 본격 저음 대결 승자는
이번엔 대놓고 저역을 중심으로 비교했다. 먼저 영화 ‘다크나이트’(2008) OST인 ‘와이 소 시리어스(Why so serious)’를 들어봤다. 이 곡의 핵심은 3분 27초 구간 이후 1분가량 지속되는 극저음 구간이다. SE846으로 들어보니 저음 표현이 나쁘지 않다.
IE900은 역시 좀 더 울림이 있다. 플랫한 성향의 저역이 두드러지고, SE846에서 느끼지 못했던 음압이 느껴진다. 밀도가 높아 사운드가 단단하다. U6t도 저음에 강했지만 IE900만큼의 음압이나 밀도가 느껴지진 않았다.
승부는 랙 앤 본 맨(Rag’n’Bone Man)의 명곡 ‘휴먼(Human)’에서 갈렸다. SE846은 보컬은 매우 선명하게 들렸지만 배경음으로 내내 깔리는 탬버린 소리가 명쾌하지 않아 다소 답답했고 저음에서도 압도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U6t는 저역에서 좀 더 강력한 타격감이 있었고, 탬버린 소리도 좀 더 선명히 들렸다. 전체적으로 사운드가 풍부해지긴 했다. 그런데 저역 위주의 사운드가 너무 많아서인지 여전히 약간의 답답함이 느껴졌다.
‘휴먼’과 가장 궁합이 좋았던 것은 IE900이다. 내내 거슬렸던 탁한 탬버린 소리가 선명해졌고, 전체적인 베이스의 양감도 뛰어났다. 다른 이어폰들의 저음이 살짝 건조했다면, IE900의 저음은 촉촉하고 ‘이븐하게(골고루)’ 잘 익었다. 2분 20초부터 살짝 들리는 콩가 소리까지 잡는 섬세한 해상력이 인상적이다. 저역이 과하지 않아 답답한 느낌이 없어지고 코러스도 살아났다.
보컬은 SE846, 밸런스는 IE900, 펀사운드는 U6t
총평을 위해 마지막으로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2017)의 OST인 ‘더 그레이티스트 쇼(The Greatest Show)’를 감상했다.
IE900은 왜곡 없는 정교한 소리를 자랑한다. 도입부의 발 구르는 소리부터 베이스 연주, 현악기의 줄을 튕기는 소리, 코러스, 휴 잭맨의 노래 등 다양한 사운드의 앙상블이 조화롭다. 저음은 탄탄하고 드럼 심벌과 트럼펫의 고음이 귀를 쏘지 않는 밸런스가 인상적이다.
SE846은 역시 저음의 밀도와 음압이 살짝 아쉽다. 그러나 깔끔하고 시원시원한 음색만큼은 셋 중 최고다. 보컬이 귀에 쏙쏙 박혀 듣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여러 보컬과 악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뮤지컬 음악에선 공간감의 부족이 확실히 아쉽다.
전 음역대가 강조된 듯한 음색의 U6t는 뮤지컬에 아주 잘 어울렸다. 무대감은 아쉽지만 탄탄한 저음과 쭉쭉 올라가는 안정적인 고음 덕에 가장 시원하고 깔끔했다. 잭 프론이 등장해 젠데이아와 호흡을 맞추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에선 어느 음역대도 놓치지 않는 해상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 기기는 ‘하이엔드’급이라 부르기엔 살짝 부족하지만, 해상력과 분리도가 뛰어나고 넓은 음역대를 표현할 수 있는 훌륭한 이어폰인 것은 분명하다. 이 정도 음질에서 호오를 가르는 건 음색에 대한 취향일 것이다. 무선 이어폰이 범람하는 시대, 레트로 감성과 음질을 모두 챙길 수 있는 하이파이 유선 이어폰 하나쯤 소장하고 싶다면 평소 선호하는 음색에 따라 세 제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