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조난자’인 동시에, 통일의 소원을 내던진 한반도의 ‘마지막 생존자’인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필자가 출판한 책에 대한 한 잡지사의 서평 일부분이다. 고향을 떠나온 탈북인으로, 남북의 분단체제를 모두 살아 낸 경험자로, 한반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난자 중 한 명으로, 통일을 미래 출구로 상정한 MZ세대의 연구자로서 통일을 열망한다는 구구절절하고도 광의적 내용의 책이었다. 하지만 저 한 문장의 서평에 나는 비로소 오랜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는 통일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며 북한과 연고가 있거나 분단과 인연을 가진 이들의 개별적 소원으로 터부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용기를 가져야 살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북에서 어렸을 때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던 강대한 고구려의 역사를 듣지 않았다면 영토 분단에 관한 관심이 훨씬 적었을 것이다. 군에 계셨던 부모님이 병사들에게서 회수해 온 남쪽 관련 책자와 노래 테이프를 집에 두지 않으셨다면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면 민족 분단을 확인하고 한국을 동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통일을 전공으로 삼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는 숙명이나 진배없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개별적인 삶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중요한 주문과 욕구가 증식을 거듭할 터이다.
생존 급한 대학가 통일 강의 여유 없어
한반도 분단 해소 여전히 중요한 일
청년세대 새로운 통일 논의 분출하길
지금 생각해 보면 아집과 이기심으로 단단히 무장한 모습으로 대학 강단에 섰던 것 같다. 이를테면 북한과 통일에 대한 수업을 통해서 민족문제에 이바지하겠다는 출발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가변적이다. 지방의 작은 대학이 북한 통일 관련 과목에 집중하는 교수의 수업을 이해할 만큼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교 생존과 학생 모집은 학생의 졸업·취업과 연계되는 데 이에 부합되지 않는 교과 운영과 이를 바라보는 주변의 불편한 시선은 자조의 그늘이기도 했다. 이는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빈틈없는 자본주의국가에서 관심의 팔 할은 생존인 현실에서 나에게 생존의 팔 할은 용기인 셈이다.
한반도가 신냉전의 화약고니 적대적 공존의 모순 등을 떠들어도 하루하루가 바쁜 사람들에게는 실체가 불분명한 분단의 그림자일 뿐이다.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미지근한 담론은 빈곤과 경쟁에서 살아남고 통일보다 어려운 정규직 취업에 성공해야 할 청년들에게 더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분단 서사가 일상을 지배하고 분단 폭력이 난무했던 과거와 달리 분단체제의 일정한 자기 성찰적 부분에서 어린 시절 영혼 없이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억지로 부르지 않아도 될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 확보이다.
희생으로 확보해 온 자유와 다양성의 공간은 향후 청년들에게도 중요하다. 언제 전쟁을 불러올지 모르는 분단 상황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계 및 심각한 저출생 등 복합적 위기에서 서로 연동된 병리적인 현상을 인식할 수 있는 성찰과 사고가 필요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일상과 생활에서 분단을 발견하고 나아가 한반도 전반을 휩쓰는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노력은 도전과 확장성이 될 것이다. 필자 또한 과거 필자의 교수 임명 조건이기도 했던 북한 통일 수업의 고집에서 벗어나 한반도 안에서 다양한 무늬들을 읽어내는 시도로 다양한 과목을 개발, 접목했다. 정치학과 경영학을 전공했던 터라 새로 선보인 한반도의 현대사나 한반도 미래의 기술창업 관련 수업에도 학생들은 예상외의 관심을 보였다.
통일포기론이 표가 되는 시대에 분단은 자연스럽고 또 일부는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은 외면하면서도 한반도로 불리기를 원하는 모순처럼 우리는 대륙(북방)과 해양(남방)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존재한다. 한반도의 대통합을 통해서 우리가 웅비할 무한한 가능성을 간파했다면 주변 강대국들이 왜 통일을 반대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합구필분 분구필합(合久必分 分久必合, 천하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되고, 분열이 오래되면 언젠가 통합된다)’이라 했듯이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분단도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래된 분단이 준 안일함과 복속에 안주해 다가오는 먹구름을 살피지 않으면 미래는 더 위태로울 수 있다. 어쩌면 분단과 통일에 감정적이지도 이념적이지도 않은 청년세대 앞에 미래를 향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용기의 시대가 다가오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