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헝가리, 튀르키예. 21세기 들어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된 나라들이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까지 강행한 끝에 18년째 장기 독재 중이다. 그는 지극히 형용 모순적인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개념을 주창해서 국제적인 논란을 부른 장본인이다. 러시아와 튀르키예도 스트롱맨에 의한 종신 집권으로 가고 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거듭 당선되면서 21년째 권좌에 앉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선을 채우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이 확실시된다.
이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3권 분립의 견제와 균형 원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무소불위의 강력한 지도자에게 입법·사법부와의 건강한 긴장은 거추장스런 존재다. 이처럼 선거로 선출됐지만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체제를 대의 민주주의와 구별해서 ‘위임 민주주의’(delegate democracy)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정치 암흑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로 국민적 자부심은 짓밟혔다. 12·3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의 통치 행위라는 합법의 외피를 쓴 채 3권 분립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계엄군의 선관위 장악 시도는 22대 총선 부정 꼬투리를 잡아 국회를 불법화하고, 해산하려는 수순으로 읽힌다. 계엄이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한국은 권위주의 퇴행 국가 명단에 추가되는 불명예를 안았을 것이다.
어쩌다 한국 대통령은 내란 수괴로 전락했을까. 불온한 일탈의 전조는 대통령의 표리부동에서 나타난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린 건 그가 쌓은 공정과 상식 이미지 덕분이다. 권력에 돌직구를 날리면서 원칙대로 수사를 밀어붙이는 모습에 국민은 ‘효능감’을 기대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다짐은 불공정·불평등에 민감한 정서를 파고들었다.
윤 대통령의 밑천은 취임하자마자 바닥나기 시작했다. 영부인의 각종 의혹에 감싸기로 일관하면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을 무색하게 했다. 수직적 당정 관계 고수도 국민의 눈높이를 한참 비켜 갔다. 대통령은 집권 여당에 충성을 강요하고, 친윤(친윤석열)계를 내리꽂아 쥐락펴락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상징 자본이 무너지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국민이 대통령에 주문했던 것은 타협과 양보를 통한 민생 정치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지 않고 아집에 갇혔다. 야당과 이견을 좁히거나 협상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는 국민 통합의 역할도 철저히 외면했다. 국정 운영은 파행을 거듭할 뿐 성과가 날 리 없었다. 지지도는 폭락하고 특검과 탄핵 공세가 삼각파도처럼 몰아치는 한계 상황에서 끝내 폭주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헌정 파괴라는 극단적인 유혹에 빠지게 된 근저에 우리 헌법의 견제 기능 미흡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점은 뼈아프다. 헌법은 대통령에 ‘국가 원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입법·사법부까지 통괄하는 ‘제왕적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입법·사법부를 압도한다. 의회를 우회해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사법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군주정의 국왕 혹은 권위주의 정권의 스트롱맨에 어울리는 ‘국가 원수’는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지위다. 제헌 헌법에 없던 ‘국가 원수’ 지위는 유신헌법에서 처음 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위헌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가 원수’ 조항을 슬쩍 넣었다.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부를 초월해 국민과 국토를 통치하는 ‘대권’(大權)을 쥐게 된 것이다.
12·3 내란이 52년 전 유신 시대를 흘러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현실로 소환한 대목은 참담하다. 절대 권력의 유혹에 빠진 스트롱맨이 권좌에 앉으면 언제든 헌정 중단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목하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내용으로 한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이참에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도 손봐야 한다. 사생결단식의 정치 양극화도 ‘국가 원수’의 권능을 독차지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편을 처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협하는 정치 문법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대통령은 ‘국가 원수’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