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흠 신한일미래포럼이사장(일신설계 회장), 주요 인사 14명과 함께 최근 일본 홋카이도와 아오모리를 잇는 ‘세이칸 터널’ 현장 답사를 다녀왔다. 세이칸 터널이 만들어진 계기는 1954년 9월 26일 아오모리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증기기관 연락선 도야마루호가 태풍 ‘마리’에 의해 침몰돼 탑승객 1309명 가운데 1159명이 수장되는 참변 때문이었다. 이후 일본은 아오모리와 홋카이도를 연결해 열차가 다닐수 있게 해저터널을 착안했으며 끝내 성공했다.
하코다테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아침 신하코다테역에 도착해 신칸센 하야부사 18호 노조미석을 타고 출발했다. 약 25분간 해저 구간을 지나 아오모리 이마베쯔역에 도착했다. 열차 전광판에는 ‘세이칸터널 53.85km, 해저 구간 23.3km라는 자막과 세이칸 터널은 해저 100m 지점에 터널을 팠고 지질조사부터 40년 이상 세월을 지나 1988년 3월 13일 개업했다”라고 표시되었다.
터널 해저부분을 지나면서 이번 답사가 세이칸터널에서 한일해저터널로 연결되는 모멘텀이 되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아오모리 이마베쯔역에 도착하여 전세버스로 세이칸 터널 기념관이 있는 닷피(龍飛)에 도착했다. 이어 체험갱도 열차에 탑승을 기다리면서 벽면에 부착된 기록을 보았다. 총공사비 6900억 엔, 공사 기간 약 24년, 공사 참여 인원 1400만 명이었다. 세이칸 터널의 선로는 수퍼롱레일이라는 이음매 없는 1개의 레일이 사용됐다. 파낸 토사량은 약 630만㎥(도쿄돔 약 5개), 철강 사용량은 약 17만 톤이었다. 열차가 지나가는 부분의 콘크리트 두께는 약 70cm, 다른 부분은 약 20cm, 화약 사용량 약 2900톤, 시멘트 사용량 약 85만 톤 등 정보가 적혀 있었다. 터널 공사 기간 순직자 수는 34명, 부상자는 1424명이었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 세이칸 터널의 난공사가 완성됐다. 공사 기간 중 가장 위험했던 것이 1976년 대출수(大出水)의 어려움이었지만, 잘 극복했다. 터널이 매우 긴 만큼 중간중간 아주 조금씩 새는 바닷물이 모여 1분당 20톤에 이른다. 이를 24시간 펌프가 퍼내고 있으며 예비 펌프와 예비 배터리도 있었다.
방문 마지막날 저녁에는 가지꾸리 마사요시 국제하이웨이재단 회장과 다케우치 유조 국제하이웨이 기술분과위원장과 한국 측 참석자들이 간담회를 했다. 다케우치 유조 박사는 2010년부터 국제하이웨이재단 기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80년대 국제하이웨이 건설 사업단 조사결과를 해석했다. 지난해 4월 한일해저터널설계도 1100페이지를 완성했다고 보고했고 이것을 국제전문학술지에 게재할 계획이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이 바다 밑에 최장대 해저터널을 굴착한다고 했을 때 무모하다고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굴착에 성공해 많은 승객과 화물을 홋카이도부터 도쿄, 그리고 규수 전체를 연결하는 대역사를 만들어 냈다.
한국의 해저터널 건설 수준도 세계적이다. SK건설이 시공한 터키 보스포루스 해저터널은 기술은 물론 관리시스템도 탁월해 많은 상을 거머쥐었다. 최근 보령해저터널이 완공됐고, 여수~남해 해저터널도 착공에 들어간다. 현재 세계적인 해저터널 건설시장은 140조에 이른다. 세계화 시대, 초국경·탈국경 시대를 맞아 해저터널의 수요는 더욱 증대될 것이다.
한일해저터널이 건설된다면 한일과 동북아번영의 가교가 될 것이다. 특히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다. 부산이 영호남과 연대해 일본 규슈를 연결하는 메가시티를 만들면 총인구 3000만으로 수도권에 필적할 것이며 청년과 수많은 인재가 모여들 것이다. 국제적인 초메가프로젝트인 한일해저터널을 만들면 부산은 가덕신공항 건설과 함께 트라이포트를 구축해 동북아에서 독보적인지정학적 우위를 선점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한일해저터널이 글로벌 허브도시를 주창하는 부산의 프로젝트가 되기를 제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