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산 지산학 협력,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입력 : 2025-02-12 18: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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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철 부경대 토목공학과 교수 전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장

산업 체질 바꿔야 글로벌 경쟁 가능
지자체·기업·대학 공조도 변해야

연구 결과, 경제 가치 창출 목표 돼야
기술 검증·초기 실증 체계 보완 필요

전시·단발성 관행 넘는 지원 시스템
'지속 가능한 도시' 도약에 필수적

지난달 성황리에 막을 내린 미국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5에서는 인공지능(AI), 사물 인터넷(IoT), 지속 가능 기술이 산업 혁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글로벌 기업들은 AI 기반 자동화, 친환경 기술, 초연결 네트워크를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했다. 기술 혁신이 산업 구조를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역과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 역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가치 창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부산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부산의 지자체와 기업, 대학이 협력하는 지산학(地産學) 협력은 지역 산업의 생존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조선·해운, 자동차 부품 산업 등 전통 제조업 중심의 부산은 이제 AI를 비롯한 첨단 기술 혁신과 글로벌 경쟁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고, 지자체와 공공기관, 대학은 다양한 정책과 지원 사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과연 지역 산업의 체질을 얼마나 바꾸고 또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까지의 성과를 되돌아보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는 단순한 연구와 개발(R&D)을 넘어 실질적 경제적 가치 창출과 상용화(R&BD)를 목표로 지산학 협력의 틀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TRL(기술 성숙도 수준)이다. TRL은 기술이 초기 연구 단계에서부터 상용화에 이르기까지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체계로, 1단계(기초 연구)에서 9단계(완전 상용화)까지로 나뉘며, 각 단계는 기술 개발의 진행 상황과 필요 요소를 명확히 구분한다.

대학은 TRL 1~4단계에서 기초 연구와 기술 개발을 담당하고, 기업은 TRL 7~9단계에서 상용화에 집중한다. 문제는 TRL 5~6단계, 즉 기술 검증과 초기 실증 단계의 공백이다. 이 단계는 연구실에서 검증된 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테스트하며, 상용화 가능성을 평가하는 시기다. 이 과정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학의 연구 성과는 경제적 가치로 전환되지 못하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로 발전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크다.

TRL 5~6단계의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선 대학과 기업을 연결하는 전문 코디네이터와 중재 조직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은 기술 실증을 위한 테스트 베드 환경을 제공하고, 초기 상용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줄이며, 기술 성능 테스트와 개선을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인프라와 관련 기관을 적극 활용하고, 산업별 특화 조직을 설립해 지역 내 대학과 기업 간 협력을 촉진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창업 생태계 활성화 역시 지산학 협력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탠포드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는 대학과 기업이 초기 단계부터 협력해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기술을 상용화하는 협력 모델을 보여줬다. 올해 신설 예정인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은 이러한 창업 생태계 활성화의 중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실증 연구 지원과 투자 생태계 구축, 창업 초기 단계부터 성장까지 이어지는 원스톱 지원 체계를 마련한다면, 부산은 창업과 기술 상용화의 선도 지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도 이제는 산학 협력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학문적 성과에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산업과 시장의 요구를 반영해 실질적인 기술로 발전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기업과의 협력이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경제적 기여로 이어지지 못했던 기존 관행은 지역 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앞으로 대학은 기술 검증과 상용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산학 협력의 중심에서 책임 있는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결국, 부산의 지산학 협력이 실질적인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보여주기식 행사나 단발적인 지원 프로그램을 넘어, 기술 상용화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협력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지자체, 기업 그리고 대학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긴밀히 협력하는 체계를 구축해야만 한다. 부산은 이러한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는 혁신적인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이제는 기존의 관행과 한계를 넘어, 지산학 협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시로 나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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